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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불신의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권력으로의 편향된 시각과 부당한 공권력으로부터 진실의 편에 서지 않은 언론의 과거가 큰 이유 중 하나이지 않을까 합니다. 국가폭력피해자들의 과거를 통해 우리 사회의 언론이 진실을 추구하고 공정한 보도를 위해 노력했는지 돌아보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1985년 보안대에 끌려가 50일이 넘는 구금과 고문 끝에 간첩이라고 허위자백한 정삼근씨, 법원의 재심을 통해 24년 만에 누명을 벗었다.
- 2009. 1. 24. 세계일보
 
 24년만에 납북귀환어부 정삼근 씨가 무죄를 선고받았다.
24년만에 납북귀환어부 정삼근 씨가 무죄를 선고받았다. ⓒ 세계일보
 
이씨는 1969년 4월 인천 덕적도 근해에서 타고 있던 어선이 나포돼 북한으로 끌려갔다가 6개월 만에 돌아왔다. (중략) 1985년 국군보안사령부 107보안부대가 그를 구속영장도 없이 연행해 구타 등 가혹행위를 당한 것이다. 당시 수사기관은 이씨가 북한에 억류된 동안 지령을 받고 귀환, 국가기밀을 탐지하고 태백시에서 발생한 소요사태를 선동했다는 누명을 씌웠다.

이씨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고 6년간 복역하다가 1991년 가석방됐다. 민주화 이후 억울함을 호소해 온 이씨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로부터 지난 2010년 진실규명결정을 받았다. 그는 곧바로 재심을 신청해 이듬해 무죄판결을 받았다.
- 2013. 5. 20 아시아경제
 
 납북귀환어부 출신 이병규 씨가 재심에서 무죄선고되었다는 기사
납북귀환어부 출신 이병규 씨가 재심에서 무죄선고되었다는 기사 ⓒ 아시아경제

지난 2009년, 2013년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은 정삼근씨와 이병규씨는 서해와 동해에서 조업활동을 하다 정삼근은 68년, 이병규는 69년에 각각 북한경비정에 나포되어 1년여간 억류되어 있다가 돌아온 귀환 어부들이다.

그 뒤 정삼근씨는 군산 개야도에서 조업활동을 하는 어부로 살았고, 이병규씨는 태백의 탄광에서 광부로 생활했다. 각기 다른 지역, 다른 생계방식으로 살던 이들은 1985년 같은 신문에 대서특필된 주인공이 되었다.
 
국군보안사 발표 고정간첩 5개망 타진

7명구속, 3명 불구속 송치
- 입북교육받고 25년간 암약
- 산업, 군부 지하당 조직기도, 난수표 등 증거물로 압수

지난 68년 어부로 납북됐다가 돌아온 간첩 정삼근은 지금도 소흑산도 해군함정경비상황, 어청도와 오식도의 레이더기지 탐지, 고군산열도 해안경계상태를 탐지해 왔다.

- 1985. 11. 1 경향신문 1면
 
 정삼근, 이병규 씨를 포함한 간첩단 사건을 발표한 보안사령부
정삼근, 이병규 씨를 포함한 간첩단 사건을 발표한 보안사령부 ⓒ 경향신문
 
5개 간첩망 개인별 범죄사실 북괴 대남 도발 다각화 입증

폭력소요 유발 사회혼란 기도
유언비어 유포, 국제행사 방해에 혈안
5개 간첩망 개인별 범죄사실

이병규 납북어부로 69년 북한에 6개월간 억류돼 있으면서 간첩교육을 받고 노동당에 입당한 후 탄광근로자 계층에 침투, 소요를 일으켜 제2의 사북사태를 유발하라는 지령을 받고 귀환. 85년 2월 장성광업소 노조지부장 선거를 앞두고 대의원 출마자 김근택 등에게 직선제 관철을 종용하면서 극렬투쟁을 조장하던 중 3월 1일 소요가 유발되자 철암갱 광부 2백여명을 배후 선동, 사북사태와 같은 대규모 폭동으로 확산시키려고 획책하는 등 암약하다 검거

정삼근 전북 군산에서 출생, 중학교를 중퇴한 후 어부로 일하다 68년 5월 서해 연평도 근해에서 북괴경비정에 강제 납치된 후 1백50여 일 동안 평양에 머물면서 대남공작지도원 정 모에게 포섭됐다. 정은 어민들의 반정부감정 유발 및 북뢰를 찬양, 선전해 왔다.

- 1985. 11. 1 매일경제 11면
 
 1985. 11. 1 매일경제신문에 발표된 간첩단 사건. 정삼근, 이병규 씨 등의 사진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1985. 11. 1 매일경제신문에 발표된 간첩단 사건. 정삼근, 이병규 씨 등의 사진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 매일경제신문
 
위 기사에 따르면, 정삼근씨와 이병규씨는 모두 납북되었을 때 북한으로부터 지령을 받아 각기 20여년 이상 한국 내에서 비밀리에 간첩활동을 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이병규씨의 경우 정삼근씨와의 기사와는 조금 다른 점이 발견된다. 이병규씨가 1969년도 납북될 당시 북한으로부터 제2의 사북사태를 유발하라는 지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1980년에 일어난 사북사태를 1969년도에 어떻게 예견하고 이런 지령을 내리느냐는 것이다. 더욱이 1969년 납북될 당시 이병규가 1980년도에 태백의 탄광으로 입사한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하고 간첩지령을 주고받느냐는 것이다. 결국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기사를 작성한 것이다.
 
대공방심이 독버섯 키운다
군부, 학원침투 간첩단 검거


우리의 일시적인 정치, 사회적 혼란을 틈타 표면적으로는 미소와 회유작전을 펴는 한편 뒷전에서는 사회저변의 불평과 폭력을 선동, 질서를 교란시키자는 목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나종인이 대학생인 자신의 동생을 부추겨 데모를 선동한 사실이라든지 납북됐던 어부 이병규와 정삼근에게 지령을 내려 광산과 어촌에서의 소요를 선동, 유도하도록 한 것으로도 입증된다. 우리는 항상 지저분한 곳에 벌레가 모이듯 사회 어느 곳이나 취약점이 생기면 간첩이 스며들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대공경계심은 한시도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 1985. 11. 2 경향신문 2면
 
 1985. 11. 2 경향신문 사설.
1985. 11. 2 경향신문 사설. ⓒ 경향신문
 
기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위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이병규씨와 정삼근씨는 '지저분한 곳에 벌레'로 묘사되었다. 그들의 존엄과 인권이 국가공권력에 의해 훼손되고 망가져 범죄자라는 누명을 썼음에도 언론은 그들을 '벌레'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표현에 의해 언론을 접하는 다수의 시민들은 그 언론의 내용을 신뢰한다. 심지어 조작간첩사건의 당사자였던 정삼근 역시 자신이 살던 개야도 섬에서 조작간첩으로 잡혀갔던 서창덕씨의 뉴스를 보면서 언론에서 보도하는 내용 그대로 같은 마을 주민 서창덕씨를 간첩으로 오해했다는 것이다.
 
"그 뉴스(서창덕 간첩) 나왔을 때 내가 (서)창덕이 욕을 얼마나 했다고요. 저런 썩을 놈. 할 짓이 없어 간첩질을 하느냐고 뉴스를 보면서 막 뭐라고 했다고요. 내가 딱 1년 뒤에 그 놈 꼴이 나올지도 모르고, 참 미련한 놈..."
-1985년 납북어부 간첩사건 정삼근

언론의 피해는 언론에 '간첩'으로 노출된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의 사회관계망도 모두 파괴한다.
 
"방송 나간 뒤에 학교에 갔는데 애들은 모르고 나도 말을 못하고 그랬어요. 그때가 고1이었는데 친구들이 집에 와도 아버지 얼굴을 직접적으로 봤다거나 그러지는 못 했던 거 같애요. 그리고 내가 말 안 하니까 아는 애들이 없더라고요. 무관심 한 거지요, 뭐. 설마 옆에 있는 짝궁 아버지가 간첩이라고 그렇게 알고 아는 척을 한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담임선생님도 몰랐던 거 같애요. 내가 말 안하면 잘 모르는 거지요. 그러니까 난 항상 불안하고 기죽어 사는 거지요. 혹시 알면 어쩔까, 내 가정환경을 알면 어쩔까, 그런 두려운 마음에 학교를 다녔어요."
- 1985년 납북어부 간첩사건 정삼근 딸 당시 18세

"교도소에 들어간 지 며칠 후, 보니까 저를 전주에서 조사했던 수사관이 저를 데리러 왔습니다. 그래서 교도관 1명이 저와 함께 군인차를 타고 군산에 있는 보안대로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곳에 들어가니 카메라 앞에다 앉혀놓고 촬영하면서 내가 보안대에서 진술할 내용을 다시 이야기해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간첩을 한 일이 없다, 난 이런 적 없다고 하자 카메라를 딱 거버리더니 "이 새끼, 안 돼, 안 돼, 이 새끼 다시 교도소로 보내"라고 하여 다시 교도소로 돌려보내졌던 일이 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때 잠깐 찍은 영상이 텔레비전에 크게 나와 우리 동네사람들이 다놀라고 가족들은 그 이후로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고 합니다."
- 1985년 납북어부 간첩사건 정삼근(2007년 진실화해위원회 진술)

언론의 잘못된 오보로 피해 받은 피해자는 정삼근, 이병규 외에도 더 많은 피해자가 있었다. 같은 개야도 섬에서 살다 납북 귀환되었던 임봉택씨 역시 서창덕, 정삼근 사건으로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신문이니 텔레비전이니에서 내가 간첩이라고 보도되니까 마을에서 소문이 눈덩이처럼 불어났어요. 결국 방송 나가고 나서 아버지는 제가 끌려갔던 그 해에 돌아가시고 말았어요. 아버지 돌아가신 경찰에서 조사받고 나온 이후에는 TV에서 납북어부 간첩단을 일망타진했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또 죄 없는 몇 사람이 걸려들어 고통당하겠구나'하는 생각부터 들었어요."
- 납북어부 간첩사건 임봉택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들 납북귀환 어부 조작간첩피해자들은 재심을 통해 상당수가 무죄를 선고받았다. 사법적 정의는 조금이나마 회복되었으나 사회적 정의는 어떠한가. 정삼근, 이병규씨 등을 간첩이라고 대서특필하며, 피해자들을 '벌레' 로 표현했던 언론은 이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언론의 신뢰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잃었던 언론의 신뢰를 회복하려는 자세, 즉 오보에 의한 피해자들을 상대로 진정어린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평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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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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