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오입'이란 단어가 불쑥 튀어나왔다.
10일 끝난 더불어민주당 대선경선이 시작점이다. 민주당 선관위는 이재명 후보가 50.29% 득표율을 기록했다고 공식발표했지만, 이낙연 후보 캠프는 이재명의 실제 득표율이 49.32%라고 주장한다. 정세균·김두관 후보가 사퇴 이전에 획득한 표를 모두 유효표로 보고 산출하면 이재명의 득표율이 50% 아래로 내려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결선투표를 치러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논란이 생긴 건 따지고 보면 이런 상황까지 예견한 당규를 만들어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상민 민주당 선관위원장이 '50.29% 득표율' 계산의 근거로 제시한 특별당규 제59조와 제60조 역시 논란을 해소하는 데에는 시원하지 않다는 평가다.
이와중에 국민의힘에선 '사사오입'의 역사를 거론하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국민의힘 대선경선 후보인 원희룡 전 제주도지사는 1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민주당엔 민주가 없습니다"라고 한 뒤 "제2사사오입으로 '반쪽짜리 대선후보'가 탄생했습니다"라며 "국민께서 납득하기 어려운 기준으로 결선 투표를 무마시켰습니다"라고 비판했다.
국민의힘 경선에 참여했던 장성민 전 의원도 같은 날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웬 사사오입의 독재 정치인가?"라며 "이승만의 사사오입과 이재명의 사사오입은 무엇이 다른가?"라는 페이스북 글을 썼다.
그러나 이 사안은 사사오입까지 거론할만한 문제는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3선 연임을 위해 자유당 정권이 밀어붙인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은 민주당 무효표 처리 논란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사안이다. 민주당 논란은 해석이 엇갈리는 문제지만, '사사오입'은 헌법까지 위배했다.
위헌이었던 사사오입
사사오입의 결과로 통과된 1954년 헌법의 제55조 제1항은 "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한다"는 본문과 "단, 재선에 의하여 1차 중임할 수 있다"는 단서를 뒀다. 단서 조항에 따라 대통령의 3선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1954년 헌법은 부칙에서 "이 헌법 공포 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는 제55조 제1항 단서의 제한을 적용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했다. 이승만에 한해서만 3선 출마를 허용한 것이다. 이승만에 한해서만 헌법적 특권을 부여하는 이 개헌을 통과시키기 위해 자유당 정권은 1954년 5월 20일 치러질 제3대 총선에 3선 개헌 찬성자들을 대거 공천했다. 그런 뒤 선거 이후에 무소속 의원들을 끌어들이며 개헌 드라이브에 속도를 붙였다.
그로부터 2년 전에 개정된 1952년 헌법의 제98조가 헌법개정 권한을 국회에 부여했기 때문에, 지금처럼 국민투표를 거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재적의원 3분지 2 이상의 찬성으로써 한다"는 제98조 제4항에 따라 재적 국회의원 203명 중에 3분의 2인 136명 이상이 찬성해야 헌법개정이 확정될 수 있었다. 203에서 3분의 2는 135.33이므로 3분의 2 이상이 되려면 136표 이상을 확보해야 했다.
그런데 이승만의 3선을 인정하는 개헌안은 1954년 11월 27일 국회 투표에서 부결됐다. 그달 29일 치 <조선일보> 기사 '국회 개안(改案)을 부결'은 "재석 202명 중 가(可) 135표, 부(否) 60표, 기권 7표로 부결되었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개헌안 부결이 선포되고 이승만의 3선 도전이 불가능해졌다. 그런데도, 이승만 정권은 이상한 계산법을 내세워 상황을 뒤집었다. 자연인인 사람의 숫자를 135.33명으로 계산할 수는 없으니 '0.5부터는 위로 올리고 그 미만은 버린다'는 사사오입 원칙을 적용해 '3분의 2 이상'을 '135명 이상'으로 봐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이승만 정권을 힘을 앞세워, 이상한 논리를 관철시켰다. 그래서 위 <조선일보> 기사가 발행된 29일에 개헌안이 통과됐다. 이승만이 1956년 대선에 출마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위헌적 개헌의 결과였다.
이처럼 사사오입 개헌은 명백한 위헌·위법이었다. 이것은 해석상의 문제도 아니었다. 135.33 이상이 136이라는 것은 해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2002년 이인제의 후보 사퇴, 계산법은... 해석의 문제
그에 반해, 이번 민주당 논란은 당규 해석의 문제다. 이는 사퇴한 후보가 사퇴 이전에 얻은 표를 유효표로 볼 것이냐 무효표로 볼 것이냐 하는 해석상의 문제다. 원희룡 후보 등은 서로 차원이 다른 두 문제를 동일선상에 놓고 사사오입을 운운하고 있다. 명백한 오류다.
사실, 말없이 조용히 지나가긴 했지만, 유사한 일이 2002년 새천년민주당 경선 때도 있었다. 1997년에 이회창과의 신한국당 경선에 패배한 뒤 결과에 불복하며 국민신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했던 이인제씨가 2002년 민주당 경선 도중에 사퇴한 적이 있었다.
2002년 3월 9일 시작된 경선이 노무현 후보 쪽으로 기울어지자 이인제 후보는 경선 도중인 4월 18일 사퇴했다. 노무현은 다소 홀가분해진 상태에서 4월 27일 승리를 확정지었다. 4월 28일 치 <동아일보> '민주 대선후보에 노무현 씨... 경선 72% 득표' 기사는 최종 득표율을 보도하면서 "득표 누계는 노 후보가 1만7568표(72.2%), 정 후보가 6767표(27.8%)를 기록했다"고 전했다.
노무현과 정동영 두 후보의 득표율을 합하면 정확히 100.0%다. 이는 이인제 후보가 경선 포기 이전의 열두 차례 지역경선에서 얻은 표는 물론이고 3월 12일 사퇴한 김근태 후보, 3월 14일 사퇴한 유종근 후보, 3월 19일 사퇴한 한화갑 후보, 3월 25일 사퇴한 김중권 후보가 얻은 표를 제외한 것이다.
이인제 후보가 받은 표는 정동영 후보가 받은 것보다 많은 8190표였다. 사퇴한 이인제·김근태·유종근·한화갑·김중권 후보의 표를 모두 더하면 9822표가 된다. 그래서 노무현·정동영의 표와 다섯 사퇴자의 표를 합치면 총 3만4157표가 된다. 이렇게 되면 노무현의 득표율은 72.2%가 아니라 51.4%가 된다.
72.2%와 51.4%의 차이는 엄청나다. 60% 이상이면, 보통은 압승이라고 부른다. 그에 비해, 50% 정도면 신승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잦다. 하지만 2002년에는 이것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노무현 후보가 어차피 과반을 달성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당시엔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민주당 논란을 '사사오입'에까지 빗대는 것은 과도하고 엉뚱하다. 하지만, 이 논란은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국가적 차원의 선거든 정당 차원의 선거든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므로, 선거의 공정을 기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핵심이다. 이번 논란은 유사한 논란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상황에 대비한 정밀한 선거 규정을 만들어둘 필요성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