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1일 "조선반도(한반도) 지역의 군사적 긴장을 야기시키는 적대세력들의 온갖 비열한 행위들에 견결하고 단호한 자세로 맞설 것"이라며 자신들의 신무기 개발을 정당화했다. 그러면서도 김 위원장은 "우리의 주적은 전쟁 그 자체이지 남조선이나 미국 특정한 그 어느 국가나 세력이 아니"라는 유화적 태도를 보였다.
앞서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12일 북한이 전날 노동당 창건 76주년을 맞아 3대혁명전시관에서 국방발전전람회 '자위-2021'을 개최했다고 보도했다(관련 기사:
김정은 "주적은 전쟁 자체... 남조선·미국 아니다"). 북한이 노동당 창건기념일(10월 10일)을 맞아 무기전람회를 열고 이를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북한 매체가 공개한 사진에 따르면 이번 전람회에는 '화성-15형'과 '화성-16형' 등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북극성 계열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최근 시험 발사한 극초음속 미사일 '화성-8형' 등이 공개됐다. '북한판 이스칸데르'로 불리는 단거리탄도미사일 KN-23도 모습을 보였다.
김정은 위원장은 기념연설을 통해 "그 누구도 다칠 수 없는 무적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계속 강화해나가는 것은 우리 당의 드팀없는(조금도 틀림없는) 최중대 정책이고 목표이며 드팀없는 의지"라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원인으로 한국의 군 현대화 작업을 지목했다. 그는 F-35A 스텔스 전투기 및 RQ-4 고고도무인정찰기 도입, 신형 미사일 시험 발사 등을 일일이 거론하면서 "도가 넘을 정도로 노골화되는 남조선의 군비 현대화 시도"라고 주장했다.
김정은 "이중적인 태도에 유감... 남조선 겨냥한 국방력 강화 아니다"
그러면서 그는 북한의 국방력 강화를 도발로 규정하는 한국의 '이중기준'을 또다시 지적했다.
김 위원장은 "자기 할 일을 다 하는 남조선 당국이 이제는 우리의 자위적인 국방력 발전 권리까지 빼앗으려고 심지어 우리의 상용 무기 시험까지도 무력 도발이라느니 위협이라느니, 긴장을 고조시키는 부적절한 행위라느니 하는 딱지들을 잔뜩 붙여놓고 미국을 위시한 적대 세력들의 반공화국 목소리를 솔선 선창하는 데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이어 "우리는 남조선의 이같은 과욕적인 야심과 상대방에 대한 불공평을 조장하고 감정을 손상시키는 이중적이고 비논리적이며 강도적인 태도에 커다란 유감을 표한다"면서 "앞으로 계속 우리의 자위적 권리까지 훼손시키려고 할 경우 결코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강력한 행동으로 맞설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남조선이 한사코 우리를 걸고들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주권 행사까지 건드리지 않는다면 장담하건대 조선반도의 긴장이 유발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며 "그것만 아니라면 우리가 남조선과 설전을 벌릴 일도 없을 것이며 그럴 이유도 없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또 "다시금 말하지만 남조선은 우리 무장력이 상대할 대상이 아니다"라며 "분명코 우리는 남조선을 겨냥해 국방력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 동족끼리 무장을 사용하는 끔찍한 역사는 다시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한국이나 미국 모두 자신들의 주적이 아니고, 자신들의 전력 증강 노력은 전쟁 억제력을 키우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도 펼쳤다. 그는 "우리가 말하는 전쟁 억제력과 남조선이 말하는 대북 억지력은 어휘의 뜻과 본질에서 다른 개념"이라며 "남조선 사회의 대(對)조선 관점이 북조선의 위협을 억제해야 한다는 낡고 뒤떨어진 근심 고민과 몽상적인 사명감을 벗어놓고 과도한 피해의식에서 헤어 나오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하노이 2차 북미회담 결렬 뒤엔 '적' 표현... "'대화 열려도 군사력 강화 지속' 시사"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열렸던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되면서 남북 및 북미 대화가 교착상태에 빠진 이후 북한은 여러 차례 한국과 미국에 대해 '적'이라는 표현을 써왔다.
지난 2020년 6월 9일 북한은 <조선중앙통신사> 보도를 통해 일부 탈북자 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를 문제 삼으며 청와대 핫라인을 포함한 남북 간 모든 통신연락선을 차단하며 대남 사업을 '대적 사업'으로 전환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일주일 후에는 개성공단 내 남북연락사무소 건물을 일방적으로 폭파했다.
김 위원장은 지난 1월 열린 노동당 대회에서 미국을 향해 '최대의 주적'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우리의 주적은 전쟁 그 자체이지 남조선이나 미국 특정한 그 어느 국가나 세력이 아니다"라고 한 김 위원장의 전날 연설은 북한이 외교 기조를 선택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조심스럽게 나온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당장 대화가 재개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분석했다. 김 위원장의 연설은 북한이 그동안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 담화를 통해 주창해온 '이중기준 철회' 등의 주장을 최고지도자의 언급을 통해 재확인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임을출 경남대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향후 북미대화와 협상이 진전되더라도 (북한 측의) 자위력을 내세운 군사력 강화는 지속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시사한다는 점에서 향후 북미대화 재개에 부정적 영향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임 교수는 또 "국방력 강화보다는 경제발전, 주민 생활안전을 더 바라는 인민들에게 국방력 강화의 필요성을 설명할 필요성에 따라 국방 전람회를 열어 국방건설을 더 강력하게 추진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소상하게 설명했다"며 "이번 연설을 통해 또 다시 국가 방위력 강화에 대한 명료한 메시지를 대내외에 분명하게 전달했다"고 평가했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자위적 권리를 훼손할 경우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강력한 행동으로 맞설 것'이라는 북한의 경고는 앞으로 지속할 핵 및 미사일 개발에 문제를 제기하지 말라는 요구로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라는 강압적 메시지"라고 분석했다.
북한이 대규모 열병식 등 호전적인 행사를 통해 무력을 과시하지 않고 '국방발전전람회' 형식을 통해 메시지를 낸 것에 대해서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사실상 수위가 낮은 형식의 국방무력 과시"라면서 "김 위원장의 연설이 국방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자극적인 표현도 있지만 그동안 북한이 견지해온 입장과 일치한다"고 평가했다.
양 교수는 또 "국방 관련 주권 행사를 건드리지 않으면 전쟁도 설전도 할 이유가 없다고 함으로써 남한의 태도 변화를 조건으로 대화 가능성을 열어놓으면서 이른바 '선결조건'에 대한 남한 당국의 응답을 촉구한 것"이라면서 "미국에 대해서는 한반도 정세 불안정의 근원은 미국이라며 바이든 행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행동을 촉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통일부는 김 위원장이 연설에서 문제 삼은 한국의 '이중기준'에 대해 대화를 통해 이견을 해소해가자는 입장을 밝혔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날 오전 기자들과 만나 "(김 위원장은) 이중기준과 관련한 내용을 집중 제기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며 "남북관계라는 게 어느 일방의 기준을 일방적으로 요구·관철하는 방식으로 풀기 어렵다는 게 정부의 기본 생각"이라고 말했다.
국방부는 북한이 국방발전전람회에서 공개한 장비들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있다고 밝혔다.
문홍식 국방부 부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전람회를 통해 공개된 장비는 이미 한·미 정보당국이 분석 중"이라면서 "지속적으로 면밀히 확인해나갈 예정"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