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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반올림이 고 황유미님 추모기일을 맞아 수원 삼성전자 본사 앞부터 수원 전역을 방진복을 입고 76명의 산재사망노동자 추모영정을 들고 행진하는 모습.
2017년 반올림이 고 황유미님 추모기일을 맞아 수원 삼성전자 본사 앞부터 수원 전역을 방진복을 입고 76명의 산재사망노동자 추모영정을 들고 행진하는 모습. ⓒ 반올림

18세기 광공업이 발달하면서 유럽에서는 굴뚝청소를 위해 몸집이 작은 아동이 고용되었다. 굴뚝 안에서 검댕(그을음)을 들이마시고 온몸에 뒤집어쓴 아동들은 약 10여 년이 지나 청년이 되어 음낭암에 걸려 건강과 목숨을 잃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외과의사 퍼시벌 포트(Percival Pott, 1714-1788)는 1775년 음낭암 환자들 사이에서 '아동 굴뚝청소부'라는 공통의 직업력을 발견하고 직업병을 의심했다. 그의 의심과 노력은 1788년 '굴뚝청소부법'으로 이어졌다. 이후 굴뚝의 검댕 성분의 하나인 벤조피렌이 DNA를 손상시켜 암을 일으키는 발암기전이 의학적, 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규명된 건 약 150년이 지난 1930년대였다.

이처럼 질병(특히, 직업성암 등 희귀질환)과 업무 사이의 인과관계가 의학적, 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규명되려면 충분한 사례연구가 축적되고 과학기술이 발달하기까지 오랜 기간이 걸린다.

현재 산업재해보상보험법과 대법원 판례로 형성된 '질병과 업무 사이의 상당인과관계에 관한 법리'는 최초의 직업성암으로 규명된 어린 굴뚝청소부에게 발생한 음낭암에 대한 역사적 교훈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상당인과관계에 관한 법리'
질병과 업무 사이의 인과관계는 반드시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법적⋅규범적 관점에서 제반 사정을 고려할 때 상당인과관계가 추단되는 경우에도 그 증명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음낭암이 최초의 직업성암이라는 사실이 의학적, 자연과학적으로 규명된 지 약 90년이 지난 대한민국은 2022년 산업안전보건본부를 거쳐 2023년 산업안전보건청 설립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현행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는 어린 굴뚝청소부에게 발생한 음낭암의 역사적 교훈과 상당인과관계의 법리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있다. 특히, 직업성암 등 희귀질환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2017년 대법원은 삼성직업병사건에서 '첨단산업분야에서 발생한 직업성암 등 희귀질환의 상당인과관계에 관한 법리'를 제시하면서, 이례적으로 행정실무와 하급심 법원의 잘못을 지적하고, 이른바 '추정의 원칙'에 관한 실무지침을 밝히면서 '개별역학조사제도의 한계와 문제점'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21세기 반도체 전자산업의 노동자들에게 발생한 직업성암 등 희귀질환을 직업병이 아니라고 쉽게 단정해온 실무행정과 하급심 법원에, 18세기 어린 굴뚝청소부에게 발생한 음낭암의 역사적 교훈을 일깨워주는 의미 있는 판결이었다.
 
'첨단산업분야의 상당인과관계에 관한 법리'
첨단산업분야에서 유해화학물질로 인한 질병에 대해 산업재해보상보험으로 노동자를 보호할 현실적․규범적 이유가 있는 점,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의 목적과 기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노동자에게 발병한 질병이 이른바 '희귀질환' 또는 첨단산업현장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유형의 질환에 해당하고 그에 관한 연구결과가 충분하지 않아 발병원인으로 의심되는 요소들과 노동자의 질병 사이에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이 현재의 의학과 자연과학 수준에서 곤란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인과관계를 쉽사리 부정할 수 없다. 특히, 희귀질환의 평균 유병율이나 연령별 평균 유병율에 비해 특정 산업 종사자 군(群)이나 특정 사업장에서 그 질환의 발병율 또는 일정 연령대의 발병율이 높거나, 사업주의 협조 거부 또는 관련 행정청의 조사 거부나 지연 등으로 그 질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작업환경상 유해요소들의 종류와 노출 정도를 구체적으로 특정할 수 없었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인정된다면, 이는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는 단계에서 노동자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할 수 있다. 나아가 작업환경에 여러 유해물질이나 유해요소가 존재하는 경우 개별 유해요인들이 특정 질환의 발병이나 악화에 복합적·누적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대법원 2017. 8. 29. 선고 2015두3867 판결).

고용노동부와 국회가 결자해지의 자세로 나서야

2017년 대법원 판결에서 보듯이, 직업성암 등 희귀질환에 대한 산재보상행정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바로 '개별역학조사제도'에 있다. 개별역학조사제도는 신속하고 공정한 보상과 재해 예방이라는 산재보상제도의 시행을 지연⋅왜곡시키는 문턱으로 기능하고 있다.

2017년 대법원 판결 이후, 고용노동부와 산하기관은 역학조사 생략지침(2018년), 직업성암 재해조사 및 판단 요령(2018년), 직업성암 업무상질병 업무처리요령 확대(2019년), 역학조사에서 업무관련성 높음인 경우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심의 생략지침(2020년), 직업성 암의 업무관련성 평가 지침(2020년) 등 관련규정을 제⋅개정했다.

그런데 직업성암에 대한 역학조사 생략지침은 그 적용범위가 지나치게 협소하고, 역학조사 처리기간(180일 이내)은 1년에서 3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리는 등 여전히 준수되지 않고 있다. 긴 시간을 기다렸지만 영업비밀 문제로 막히거나 첨단산업의 희귀질환 특성상 업무관련성이 부족하다는 역학조사결과가 여전히 대부분이다. 그래서 역학조사에서 업무관련성 높음인 경우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심의가 생략되도록 한 지침은 실효성이 낮다.

안전공단이 2020년 10월 공포한 '직업성 암의 업무관련성 평가 지침'은 2017년 대법원 판례의 지적과 실무지침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직업성암 등 희귀질환에 대한 개별역학조사 결과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심지어 재해자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동료작업자에 대한 인터뷰를 실시하지 않고, 회사 측이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부 작업현장의 방문조사를 생략하기도 한다. 추가 발병자가 있다는 재해자의 주장을 확인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여러 집단역학조사를 통해서 이미 확인된 첨단산업분야의 (정해진 작업수칙과는 다른) 실제 작업과정과 작업환경, 환기공유 구조, 제조과정에서 새로운 발암물질이 2차적으로 생성된다는 사실 등조차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있다.

OLED 등 새로운 공정의 유해요인에 대한 연구 부족, 자료의 보존기간 경과⋅영업비밀⋅이미 오래 전 폐기한 물질 등을 이유로 회사 측이 제출하지 않는 정보를 비롯해 재해자의 책임 없는 사유로 인하여 과거 근무당시 작업 환경상에 존재했던 유해요인의 종류와 그 노출 정도를 구체적으로 특정할 수 없는 특별한 사정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재해자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하지 않고, 회사가 제출한 최근의 제한된 정보를 토대로 노출평가를 실시함으로써, 과거 근무당시 작업환경의 위험성을 희석시키고 있다.

측정결과치가 노출기준에 미달하는 저농도 노출일지라도 장기간 여러 종류에 노출될 경우 그 유해성이 누적적⋅복합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2017년 대법원 판결이 제시한 실무지침과 함께 노출기준은 단일 유해요인에 대한 기준이고 개인마다 감수성의 차이가 있으므로 노출기준 미만에서도 얼마든지 직업성 질환에 이환될 수 있다는 '화학적 인자 및 물리적 인자의 노출기준'에 관한 고용노동부 고시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음으로써, 저농도 장기간 복합노출의 위험성을 희석시키고 있다.

18세기 광공업이 발달하면서 나타난 음낭암에 걸린 노동자들에 대한 퍼시벌 포트 등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노력이 '굴뚝청소부법'으로 이어졌던 것처럼, 21세기 반도체 전자산업이 발달하면서 나타난 직업성암 등 희귀질환에 걸린 노동자들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개별역학조사제도가 여전히 2017년 대법원 판례가 제시한 실무지침과 지적한 잘못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와 국회에 있다. 2023년 산업안전보건청 출범 이전에 2017년 대법원 판결이 제시한 실무지침과 지적한 잘못이 개별역학조사제도에 충분히 반영될 수 있도록 고용노동부와 국회가 결자해지의 자세로 나서야 한다.

덧붙이는 글 | 반올림 지원 노무사 모임에서 활동하는 김민호 노무사님이 기고한 글입니다.


#산재#산재보험#반도체#직업성암#추정의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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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황상기 씨의 제보로 반도체 직업병 문제가 세상에 알려진 이후, 전자산업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시민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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