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 3명이 모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게 주민 참여의 문턱을 낮춘 마을공동체 지원정책이 내년이면 10년을 맞는다. 뜻이 맞는 주민들이 지역 문제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직접 해결해 가며, 조금 더 행복해진 이야기들을 통해 아래로부터의 변화. 그 10년의 이야기를 몇 차례에 나눠 싣는다.[편집자말] |
폭염이 기승을 부렸던 여름의 끝자락이 가을장마로 이어지던 8월 말 어느 날 서울 양천구 신정동에 위치한 사람사랑양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이하 양천센터) 김범준 소장을 찾았다. 양천구에서 20년 동안 장애인 활동을 이어온 김 소장은 지난해부터 양천구 신정2동 주민자치회 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주민자치회가 "다시 시작하는 에너지!"가 됐다고 말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은 지역에서 어울려 살기보다 거주시설에서 집단생활을 해왔다. 시설생활을 하는 장애인의 인권문제가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지역에서 함께 어울려 사는 장애인의 인권을 위해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 장애인 자립생활지원이 시작되었다. 2000년 초 설립된 양천센터에도 지금까지 10명의 장애인이 자립생활을 하고 있다.
마을,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연결해 주는 공간
- 양천센터는 장애인의 탈시설, 자립생활 지원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나요?
"센터의 역할 중 무엇보다 중요한 게 장애인 당사자 한 분 한 분에 맞는 개별적이고, 적절한 지원을 하는 것일 텐데, 솔직히 기관 하나에서 다양한 상황과 조건에 처해있는 개개인의 자립에 필요한 모든 지원을 감당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요. 그래서 센터는 부족한 자원을 지역에서 마련하기 위해 유기적인 네트워크로 연계하고 계획을 세워나가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지역 시민사회를 비롯해 지역의 다양한 인적·물적 네트워크와 관계를 맺는 일은 장애인의 자립지원을 위해 센터가 하는 중요한 활동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어요."
- 소장님이 양천구 주민자치회 위원으로 활동하게 된 계기도 센터 활동과 관련이 있는 걸까요?
"아무래도 연결이 되는 부분이 있죠. 양천센터도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기관이고, 그 기관에서 활동하는 장애인·비장애인 활동가들도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주민자치회를 통해 더 많은 주민들과 더 지역에 가깝게 연결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장애인 자립지원 운동만 20년 가까이 해오면서 자립 지원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자립에 성공한 장애인 분들이 지역에서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지역 역시 장애인들이 함께 살 수 있는 곳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양천센터가 다양한 기관이나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연결되는 것도 중요하고, 또 지역이 전반적으로 장애인이 함께 살 수 있는 곳이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장애인이 살기 좋은 동네는 사실 모두가 살기 좋은 동네이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좀 더 동네로, 골목으로 깊숙이 참여해서 효과적으로 바꿔보자고 생각했어요."
- 주민자치회 위원에 지원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있었나요?
"양천센터가 참여하고 있는 양천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의 네트워크인 사단법인 양천마을에서도 양천구 주민자치회 사업이 시작되니 많이 참여하자는 이야기가 계속 있었고, 양천구청과 주민센터에 붙어 있는 홍보물을 보기도 했습니다.
아주 직접적인 계기는 양천구마을공동체지원센터 자치단장님이 어느 날 양천센터를 직접 찾아와서 젊은 사람들이 주민자치회에 많이 참여해서 이전의 주민자치위원회와는 달라진 제도를 통해 지역을 함께 바꿔나가 보자고 이야기하셨기 때문이에요. 제가 그렇게 젊은 편은 아니지만(웃음), 그 길로 지원을 하고 결국 2020년 11월 말에 신정2동 주민자치회 위원으로 최종 위촉되었습니다."
- 그럼 주민자치회 활동한 지 아직 채 1년이 안 된 거군요. 주민자치회 활동해보니까 어떤가요?
"사실 처음부터 난관이 있긴 했어요. 11월에 위원으로 위촉이 되고 12월에 첫 모임이 있었는데 모임 직전에 담당 주무관님께 전화를 받았습니다. 모임을 신정2동 주민센터에서 진행할 예정인데 그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요. 지원서에서 휠체어를 타고 있는 제 사진을 보고 전화를 하셨다는데, 그걸 오히려 저한테 묻는 상황이 난감했죠.
우선 그동안 주민자치회에 장애인 위원이 없었는지 물어봤어요. 이렇게 접근조차 못하는데 참여하고 싶다가도 체념하게 될 것 같다, 앞으로 다양한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기본적인 접근성은 확보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당장은 모임 장소를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바꾸든지, 장소를 바꾸지 않으려면 휠체어를 탄 채로 들어서 옮겨달라고 했습니다. 전동휠체어가 무게가 많이 나가요. 사람까지 하면 총 무게가 200kg 가까이 됩니다.
설왕설래 끝에 결국 주민센터 근처 엘리베이터가 있는 교회 건물로 장소를 옮겨 첫 모임이 진행되었습니다. 사실 주민센터에 엘리베이터가 없는 곳들이 많아요. 장애접근성이 제대로 보장되어 있지 않으니 장애인 당사자들이 참여를 못하게 되고, 그러니까 접근성을 보장하기 위한 변화는 더디고 악순환이었던 것 같아요. 장애인 당사자들이 주민자치회에 많이 참여해서 목소리를 내는 만큼 변화가 시작될 것 같습니다."
의견 충돌은 내 활동을 돌아보게 한 계기
- 주민자치회 환경분과 위원으로 활동 중인데 환경분과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휠체어를 타고 생활을 하는 장애인이다 보니 일상의 모든 부분에서 장애접근성이나 장애감수성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고 의견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애인이 꼭 복지정책에 관한 의견만 낼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환경분과에서 신정2동을 안전한 동네로 만들기 위해 어둡고 외진 곳에 LED 등을 달아 밝게 만들자는 사업 제안이 나왔어요.
그래서 저도 거기에 더해 휠체어에 안전표시등을 달아 어둠 속에서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나 비장애인 주민 모두의 안전을 담보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또 자전거 도로 바닥에 자전거 그림 이외에 휠체어 그림도 포함해서 자전거 도로에 휠체어가 다니도록 하자는 제안도 했습니다. 휠체어가 인도로 다니는 것보다 자전도 도로로 다니는 게 보행자나 휠체어 모두에 좀 더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제안이 결국 총회에 올라가지는 못했어요(웃음)."
- 지역의 변화를 위해 당사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안한 의견인데 잘 공감 받지 못한 것 같아 솔직히 속상하지 않았나요?
"(웃음) 오히려 장애인 운동가로 20년을 살아온 저의 활동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제 활동의 반경이 그리 넓지 않았구나, 더 지역으로, 동네로, 골목으로 들어가 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마을에 필요한 이야기들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지난 6월에 신정2동 주민총회가 있었어요. 주민들이 제안한 의제에 주민들이 직접 투표를 할 수 있도록 투표소도 꾸미고 했는데, 주민자치회 대표님이 제게 몸도 불편하고 하니 다른 일 말고 테이블을 지켜 달라 하시더군요. 다른 역할을 해보겠다고 의견을 말씀드렸지만 결국 받아들이지 않으셨어요. 나름대로 장애인을 배려한다고 하신 거겠지만, 사실 이런 태도는 배려도 아니거든요. 그동안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려 서로 존중하며 살아보지 못한 경험 부족 때문이라 생각하고 이러한 부분을 활동으로 채워나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장애인 활동가 동료들에게 주민자치회에 더 많이 참여해서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 행복한 마을을 같이 만들자고 하려고요. 주민자치회가 장애인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주민들의 목소리를 반영해서 지역을 변화시키고, 지역의 문제를 해결해 간다면 서로 주민자치회 하려고 하지 않을까요?(웃음)."
- 마지막 질문입니다. 주민자치회 활동은 소장님께 무엇인가요?
"한마디로, 주민자치회는 제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활동을 '다시 시작하게 하는 에너지'입니다!"
20년 장애운동을 해온 장애인 활동가에게 주민자치회란 일상을 같이 하는 이웃 주민들과 장애와 비장애 구분 없이 서로 존중하며 더불어 사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다시 시작하게 하는 에너지"였다. 그 가운데 만나는 가로막힘이나 편견, 차별은 운동으로 변화시켜야 할 대상이지 걸림돌은 아니라고 하는 찐 활동가와의 인터뷰는 주민자치회 추첨에서 떨어져 낙담해있던 기자에게 다시 도전할 힘을 주었다. 마을은 다시 시작하게 하는 에너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