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저녁 산책을 다녀오니 어느새 눈과 코가 붉게 물든 둘째 아들이 할아버지를 뒤에서 꼭 끌어안고 뭐라뭐라 속삭이고 있다. 치료차 올라 오셔서 3주간 머무셨던 할아버지 할머니와 보낸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가 어느새 이별 전날 밤이다. 포근한 어린시절의 기억으로 남은 두 분을 아이들은 마음 깊이 사랑하는데 그 중에서도 늘 유쾌하고 에너지 넘치는 할아버지를 아이들은 특히 따른다.
저녁을 먹자마자 머리가 아프다던 막내 녀석은 해열제를 먹은 뒤 내 품을 파고들며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앞에서는 맘껏 울지 못하니 내 품에 안겨 슬픔을 꺼내는 것이다. 처음엔 흐느끼더니 점차 크게 소리 내어 엉엉 울기 시작했는데 십분 후부터는 정말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이전의 울음에 비해 오늘이 왠지 더 길고 깊다고 느껴진 건 3주간의 긴 시간이 건넨 여운 때문이리라.
우리 아이들이 슬퍼할 때, 나는 그저 실컷 울게 하는 편이다. 삼십 분이고 한 시간이고 아이 안에서 나오는 슬픔이 안전하게 꺼내질 때까지 기다려준다. 가만히 안고 등을 쓰다듬거나 몸을 어루만지며 아이가 슬퍼하는 그 시간이 외롭지 않도록 돕다보면 길게 이어지던 아이의 울음이 잦아들고 어느새 대화를 할 수 있는 시점이 보인다. 오늘 막내의 울음은 삼십분이 넘어도 잦아들 줄 몰랐다. 마치 이전의 다루지 못했던 슬픔을 모조리 엮어 줄줄이 꺼내는 아이처럼 오랜 시간 꺼이꺼이 울었다. 작고 마른 이 아이가 이러다 탈진하는 건 아닌가 싶어 삼십분 쯤 지났을 때 아이를 달래며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가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슬프지? 엄마도 우리 아들 마음 이해해. 우리 막내가 많이 슬펐나보다. "
"너무 슬퍼...할아버지가 안 갔으면 좋겠어."
"그랬구나. 실컷 울고 난 후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여러 생각을 할아버지한테 직접 이야기 하는 건 어떨까. 할아버지랑 함께 있는 동안 어떤 순간이 좋았는지, 헤어지게 되어서 얼마나 슬픈지, 겨울방학 때 영주에서 다시 만나면 뭘 같이 하고 싶은지... 아직 할아버지가 저 방에 계시니까 우리 가서 이야기 하는 건 어떨까?"
슬픈 감정에 푹 빠져 울고 있던 아이가 내 말을 듣더니 조금씩 진정하는게 보인다. 지금의 마음을 전달할 대상이 아직 곁에 있다는 사실. 그것이 아이에게 새로운 발견이었나 보다.
아이의 손을 잡고 할아버지가 잠자리를 깔고 있는 방으로 갔다. 울먹이는 막내를 보시곤 얼른 안아주며 울음을 그치도록 달래시는 할아버지. 할아버지 품에 안기니 다시 눈물이 나 아무 말도 못하는 아이에게 '할아버지가 네 마음을 잘 아실 수 있도록 또박또박 이야기 해드리자'고 다시 권했다.
"할아버지랑 있는 동안 어떤 게 참 좋았어?"
질문을 하자 눈물이 그렁그렁한 두 눈을 잠시 위로 굴리며 할아버지와의 시간을 더듬는 녀석.
"음...할아버지가 학교 앞까지 같이 가주는 것....그리고 목욕 시켜주신 것.....그리고 내 생일 파티 한 것...그리고 할아버지랑 같이 자는 것....또... 밤에 매일 기도해 주신 것. ....같이 산책한 것... 같이 밥 먹은 것...모두 다."
들으시던 할아버지가 꼭 안으시며 "할아버지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야. 할아버지도 너랑 있는 시간 모두 다 좋았어"라고 덧붙이신다. 한결 진정된 아이가 겨울방학 때 영주에 가면 할아버지의 일도 돕고 강아지 밥고 주고 교회도 같이 가겠다고 약속한다. 슬픈 감정에 휩싸여 어찌할 줄 모르던 아이는 마음껏 눈물을 쏟아내고, 이별의 대상을 직접 마주하고 좋았던 순간과 슬픈 감정을 자신의 언어로 전달하면서 조금씩 마음이 진정되는 것을 보였다. 자신도 무엇이 그리 슬펐는지, 할아버지와 무엇이 좋았던 건지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이별의 경험이 특별한 아아들
한 시간여의 이별의식이 마무리 되고 할아버지는 손주들과 함께 누우셨다.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는 세 녀석과 할아버지의 소리가 살짝 열린 방문 틈으로 흘러 나온다. 아이 곁에서 한 시간 가량 진을 뺏더니 나도 이제야 긴장이 풀리는지 몸이 노곤하다.
아직도 이별이 쉽지 않은 우리 아이들. 세 아이의 양상은 다르지만 이별이 쉬운 녀석은 아무도 없었다. 입양아동들은 입양 이전 자신의 온 우주였던 생부모와의 결별을 경험하고 우리에게 왔다. 생부모 뿐 아니라 이후 만난 여러 명의 양육자와 영문도 모르는 이별을 반복적으로 경험한 채 오는 아이도 있다. 이전의 이별 경험은 어렸거나 기억에 없기 때문에 숨겨진(억압된) 상실로 자리 잡았을 확률이 크고, 이는 삶에서 다른 종류의 이별을 경험할 때 건드려져 밖으로 터져 나올 수 있다.
애완동물의 죽음이나 할아버지 할머니의 죽음, 부모의 이혼 혹은 먼 곳으로의 이사도 아이의 상실을 건드릴 수 있다. 친한 친구와 결별, 연애 대상에게서의 거절 모두 이전의 상실을 건드리는 방아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입양 이전의 상실이 우리의 책임은 아니지만 이전에 경험한 상실을 다루고 치유하는 과제는 우리 부모의 몫이다. 이전의 상실은 아이가 미처 대처할 기회도 없이 벌어졌고, 대상마저 사라진 후였다. 하지만 앞으로 경험하는 여러 상황은 부모가 돕는다면 다르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가 경험한 상실을 잘 드러내고 다루도록 돕는 것이 우리 부모의 중요한 역할이다.
존 제임스.러셀 프리드만.레슬리 랜던 매슈스의 책 <우리 아이가 슬퍼할 때>는 아이의 슬픈 마음을 어루만지고자 하는 부모에게 좋은 가이드가 되어준다. 이 책은 슬픔은 상실의 경험에 대한 정상적이고 당연한 반응이며 병적인 상태나 정서적인 장애가 아니란 걸 강조하면서 부모가 아이의 슬픈 김정을 억압하거나 다른 감정으로 쉽게 대체시키지 않도록 알려주는데 나 역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느끼고, 언어로 표현하며 이별할 대상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금' 표현하도록 돕는 것, 우리 아이들과의 시간에서 나도 그 힘을 경험했다.
여느 가족들처럼 평범하고 즐겁게 살면서도 '상실과 애도' 의 터널을 한 번씩 지날 때면 온몸의 수분이 다 날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도 쉽지 않은 과정을 순리대로 잘 통과하고 있다고 믿기에 걱정하지 않는다. 어느새 방에서 흘러나오던 소리가 잦아들었다. 이제 나도 부모님과의 이별을 준비할 시간이다. 내일 새벽 영주로 내려가시면서 드실 김밥을 위해 쌀도 불리고 된장국에 넣을 봄동도 다듬어야겠다. 오늘 밤은 왠지 더 짧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우리 아이가 슬퍼할 때 / 북하우스 / 2004 /존 제임스.러셀 프리드만. 레슬리 랜던 매슈스 지음 / 홍현숙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