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낀40대'는 40대가 된 X세대 시민기자 그룹입니다. 불혹의 나이에도 여전히 흔들리고 애쓰며 사는 지금 40대의 고민을 씁니다. 이번 회에는 '초심'에 대해 이야기 해 봅니다.[편집자말] |
필요한 서류를 찾아, 책장 서랍을 뒤적거리던 중 비닐 파일 안에 종이 꾸러미를 발견했다. 열어보니 작년 연말에 가족들과 작성했던 버킷리스트였다. 이사 온 후 짐을 정리하느라 넣어두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올 한 해 이루고자 했던 일들이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3년 전쯤 우연히 유튜브로 '골든벨 소녀'로 유명했던 김수영씨 영상을 보았다. 어릴 때 왕따도 당하고, 불량 교우들과 어울리며 방황하다가 마음을 잡고 공부를 시작해 연세대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외국계 회사에 입사하는 등 입지적 인물이었다. 그렇게 승승장구를 달리던 중 암에 걸리게 되었고, 그때부터 바쁜 삶을 멈추고 버킷리스트를 작성해서 많은 꿈을 이루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영상을 보고 나서 가슴 속에서 미묘한 바람이 불었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나도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이제는 꿈은커녕 퍽퍽한 하루를 보내기도 버거웠다. 그저 머릿속에는 회사 걱정, 대출금 걱정, 아이 걱정뿐이었다. 그 안에 '나'는 없었고 '가장의 무게'만 남았다.
그래서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비록 끄적이는 한 줄 문장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기록하고 싶은 충동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처음에는 어떤 꿈을 적어야 하나 고민이 많았으나 점점 늘더니 흰 종이를 가득 채웠다. 여전히 심장은 뜨겁게 뛰고 있고, 깊숙이 숨겨 놓은 꿈도 있었다.
가족 버킷리스트를 쓰다
작년 말에도 홀로 테이블에 앉아 무언가 골똘히 생각 중이었다. 그때 호기심 많은 둘째가 궁금한지 다가왔다.
"아빠. 뭐해?"
"버킷리스트 작성 중이야."
"그게 뭔데?"
"꼭 이루고 싶은 꿈을 여기에 적는 거야. 너도 해볼래?"
"응!"
옆에서 둘째가 내게 조잘대며 열심히 꿈을 떠올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온 가족이 함께 적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아내와 첫째를 불렀다. 다 같이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면 어떻겠냐는 말에 아내는 흔쾌히 좋다고 했다. 이제 막 사춘기의 터널에 진입한 첫째는 살짝 난감한 표정이었으나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꽤나 흥미로운 모습이었다. 다들 양미간을 찌푸리며 열심히 꿈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씨름하다가 둘째를 끝으로 모두 완성했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버킷리스트를 낭독하고 간단히 소감을 말했다.
나의 꿈은 크게 글쓰기, 가족, 건강으로 축약되었다. 매일 글쓰기를 이어가고, 계약 맺은 책을 반드시 출간하는 것이었다. 가족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고, 양가 부모님께도 2주에 한 번은 연락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떨어지는 체력이 걱정되어 주 3회 운동을 하기로 했다.
아내는 이제 중학교에 입학하는 첫째가 학교 적응 잘하도록 돕고, 가족들과 여행도 가고 시간을 많이 보내기가 주요 목표였다. 그리고 운동이나 악기 등 취미를 찾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늘 가족들 챙기느라 정작 본인을 놓치기 일쑤였는데, 이렇게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갖는다는 다짐이 기뻤다.
첫째는 공부와 게임이 주였다. 중학교에 입학해서 새로운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다짐이 대견했다. 다만 즐겨 하는 게임의 레벨을 높이겠다는 각오를 보니 과연 공부와 양립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도 믿어보기로 했다.
둘째는 오래도록 고민한 것에 비해 목록은 달랑 두 가지였다. 가족 모두가 건강하고 짜증 안 내고 행복하길 바랐고, 새해에는 코로나가 없어져 여행도 갔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담겨 있었다. 짧지만 강한 메시지였다. 우리는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을 빌며 각자의 버킷리스트를 고이 간직했다.
버킷리스트는 초심을 돌아보는 일
올해도 이제 두 달 남짓 남았다. 2021년 버킷리스트를 살펴보니 이룬 꿈보다 이루지 못한 꿈이 훨씬 많았다. 당연한 결과이리라. 그중에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생겼다.
첫째는 운동이다. 요즘 들어 살도 많이 찌고, 자주 피곤했다. 이대로 가다간 어디 아픈 곳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평일 이틀은 일찍 퇴근해서 아내와 아이들과 공원을 걷고, 주말 하루는 운동장을 뛰어야겠다. 지금부터 챙겨야 건강한 중년을 보낼 수 있으리라.
둘째는 양가 부모님께 연락을 드리는 일이다. 나 사는 것이 바쁘다는 핑계로 지키지 못했다. 버킷리스트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 잡은 목표가 몹시 부끄러웠다. 가끔 뵐 때마다 주름도 많이 늘고, 왜 이리 빨리 늙으시는지. 더구나 장인어른은 최근에 빈혈이 심하여 병원을 정기적으로 다니는 중이다. 그런 중에도 늘 못난 자식 걱정뿐이다. 효도는 못 할지언정 사람의 도리는 잊지 말고 살아야지. 남은 기간 꼭 이뤄보리라 다짐했다.
올해도 12월 말이 되면, 온 가족이 모여 버킷리스트를 작성할 것이다. 모두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함께. 비록 대다수는 먼지처럼 사라지더라도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설레는 일이 또 있을까. 이제는 그날이 그날 같은 중년이 아니던가.
더구나 가족이 함께 꿈을 작성하는 일은 모두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한 해 동안 연초에 다짐한 목표를 얼마나 지키며 살았는지 초심을 돌아보고, 새로운 꿈을 꾸는 소중한 시간이다. 오래도록 가족의 문화로 지켜나가고 싶다. 벌써 가족 버킷리스트 작성하는 시간이 기다려진다. 그 안에는 또 어떤 꿈과 소망들이 가득 담길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발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