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복이 작가 그림책 <왜 우니?>의 표지. 이것은 눈물인가 빗물인가. 반짝이는 빗물들이 보석같이 빛나는 표지 가운데 눈물이 눈에 가득 고인 채로 서 있는 아이. 제목대로 "왜 우니?"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도대체 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이야기는 면지에서부터 시작된다. 털래털래 걸어가고 있는 아이. 결국 감정을 못 이겨 눈물이 터진다. 한참을 울었을까. 마음이 진정된 아이는 다시 걷기 시작한다. 그러다 잠옷 바람으로 울고 있는 아이를 만나 묻는다. '너는... (왜 우니?)'.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왜 우니?"란 질문에 대한 25개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책 속 등장인물들이 왜 우는지 듣다 보면 이유가 너무나 공감이 간다. 맞아맞아, 저럴 때 울지. 그 마음이 뭔지 이미 아는 것 같지만 새롭고 내 이야기인 것처럼 소중하다. 그림으로 풀어낸 이야기라 그런지 더 선명하게 마음에 흔적을 남긴다. 지금까지 눈물의 종류를 이렇게 세세하게 다룬 책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다양하고 소소하다. 귀여운 울음들이다.
사과를 해도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울고, 더 이상 보드라운 털을 만질 수 없어서 그리운 마음에도 운다. 기뻐서 좋아서 울기도 한다. 안 울고 싶은데 옆에서 우니까 따라서 울고, 어느 쪽에서도 서 있을 자신이 없어서 우는 아빠도 있다. 우는 이유가 슬프기 때문만은 아니다. 엄마가 없어서 울고, 엄마가 있어서 울게 되는 상황에서는 웃음도 터진다. 아, 같이 울어주고 싶은데 눈물이 안 나서 곤란한 사람까지 소복이 작가는 놓치지 않는다. 세심하기도 하지.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소복이의 "왜 우니?"는 들어주겠다는 말이었다. 믿고 말해도 된다는 신호였다. "왜 우니?", "왜 울어?"를 반복해서 소리 내어 읽다가 그 다정한 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소복이의 "왜 우니?"는 '우는' 너를 위해 기꺼이 내 마음 한쪽을 내줄 수 있다는 말이라는 걸. 다 울 때까지 기꺼이 기다려주겠다는 말이라는 걸. 그래서 읽는 동안 위로가 되었다. 때론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우는 이유까지 찾아내 그려줘서 눈물이 났다. 고마워서.
내 아이의 "왜 울어?"도 그랬다. 아이의 "왜 울어?"는 '엄마 마음을 알고 싶다'일 때가 많았다. 아이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고열로 힘들어하는 아이를 볼 때마다 눈물이 났다. 아이는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왜 울어? 엄마가 자꾸 우니까, 나도 눈물이 나잖아"라며 아이는 울었다. 걱정의 말이었다. 아픈데도 내 걱정을 해줘서 고맙고 미안해서 나는 또 울었다.
둘째 아이 돌 무렵인가, 아이를 안고 걷다가 넘어져서 가슴을 쓸어내린 일이 있다. 놀라서 우는 아이를 겨우 재우고 화장실에서 물을 틀어놓고 혼자 울었다. 나 때문에 다칠 뻔해서, 놀라게 한 게 미안해서 울었다. 그걸 본 큰 아이는 왜 우냐고 묻지 않았다. 한참을 지나서야 물었다. 그때 엄마 화장실에서 왜 울었냐고. 속이 깊은 아이였다.
나의 "왜 우니?"는 소복이의 말도, 내 아이들의 말도 아니었다. 나의 "왜 우니?"는 다정한 모습도, 걱정의 모습도 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놀라서 "왜 우냐?"라고 물을 때도 있었지만, 차갑고 날이 서 있을 때가 더 많았다. 나의 "왜 우니?"는 화의 말이었고, 혼내는 말이었고, 이유를 다그치는 말이었다.
아이가 혼날 일을 해 놓고 울 때, 잠투정을 부리다가 울 때, 뜻대로 안 된다고 발을 동동 거리며 울 때 내가 물은 "왜 우니?"는 거부의 말이었다. 받아주지 않겠다는 표현이었다. 뭘 잘했다고 우냐고, 둑 터진 아이의 마음을 결국 허물어 버리는 말이었다. 아이의 고운 마음을 담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 작았다. 아, 미안해서 울고 싶다.
들어주겠다는 말 "왜 우니?"와 다그치는 말 "왜 우니?"의 차이를 왜 이제 알았을까. 나의 "왜 울어?"가 너무 익숙해서 몰랐다. 다르게 들릴 수 있는 말이라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그 한끝 차이가 "넘어져서 피가 나도 '괜찮아, 괜찮아' 하며 걱정해주는 엄마를 생각하며" 울다가 웃을 수도 있게 만드는 건데... 너무 늦게 알아버린 내가 너무 한심해서 운다. 엉엉.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베이비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