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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불신의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권력으로의 편향된 시각과 부당한 공권력으로부터 진실의 편에 서지 않은 언론의 과거가 큰 이유 중 하나이지 않을까 합니다. 국가폭력피해자들의 과거를 통해 우리 사회의 언론이 진실을 추구하고 공정한 보도를 위해 노력했는지 돌아보고자 합니다.[편집자말]
1987년 1월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대학생 박종철군이 사망했다. 이로써 공안기관의 고문 수사가 대대적인 문제로 떠올랐다. 한편으로 그즈음 공안기관에서 수사받고 있던 피해자들에게는 고문 수사가 일시적으로 멈추는 계기가 되었다. 1986년 12월 불법 연행되어 고문받고 있던 심진구(2014년 11월 사망)씨도 마찬가지였다.
 
서울구치소에 들어가서 맞은편 방에 있던 수감자에게 오늘이 며칠이냐고 물으니까 1월 15일(1987년)이라고 알려주어 지금까지 저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날과 제가 구치소로 옮긴 날짜가 같기 때문에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안기부에서의 37일간 제게 가해졌던 고문도 중지되었습니다. (2008년 4월 29일 진실화해위원회)

고문은 멈췄으나 그에게 덧씌워진 조작된 범죄 사실은 그대로 남았다. 그리고 그 범죄 사실은 정권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소재로 사용되었다.

[관련기사]
피해자가 그림으로 남긴 가해자들의 얼굴 http://omn.kr/1o4y7
 
 1987년 2월 24일 경향신문 1면
1987년 2월 24일 경향신문 1면 ⓒ 변상철
 
친북괴 반미 공산혁명 기도

지검 총책 등 13명 보안법 위반 구속 기소
노학 침투 민족해방당 결성
무장봉기 실패면 입북 계획
인천사태 건대 사건 등 배후조종도

=서울지검 공안부(최환 부장검사)는 24일 학원 및 노동계에 침투,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NLPDR) 이론에 따라 친북괴반미공산혁명을 기도한 총책 김영환 씨(24.일명 강철.서울대공법4제적)와 심진구 씨(27. 전인식품공원) 등 13명을 국가보안법(이적단체구성 등)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했다고 발표했다. (중략)

검찰에 따르면 김 씨등은 북괴 대남혁명노선에 입각한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이론'을 정립, 학원 및 노동계에 전파시키고 김일성을 찬양하고 북괴 사회주의체제의 우월성을 주장한 '민주주의혁명', '강철시리즈' 등 11종의 불법 유인물을 제작, 배포함으로써 좌경, 용공세력을 반국가적인 친북괴 공산세력으로 조직하려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러한 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정권수립 민족통일이라는 3단계 공산혁명 투쟁 목표를 설정, 비타협적 공산혁명 시각을 고수하고 김일성 주체사상에 따른 조직강화 전략을 기도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이들은 또 운동권 출신들이 이미 활동하고 있는 공장 밀집지대인 인천 지역 노동현장이 소요 및 폭동에 용이한 혁명 거점이라고 판단, 86년 7~11월 사이에 이곳에 '민족해방 노동자당'을 결성키로 모의하고 인천, 부평 등지의 위장 취업자를 대상으로 '수도권지역 노동자해방동맹' 등 하부조직을 만들어 모두 5개조 74명의 당 기반 조직을 관리해 왔다는 것이다.
- 경향신문 1987. 2. 24 1면

노동자 심진구씨는 '민족해방노동자당'을 결성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는데 언론은 그의 혐의를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저는 1986. 12. 10 오후 5시경에 서울 구로구 시흥7동 대로에서 아내와 동네주민들이 보는 가운데 영장도 없이 불법 체포되어 남산 지하2층 안기부 사무실로 끌려가 온몸이 벌겨벗겨진 채 정현근 단장의 지휘 하에 총 10여 명의 고문 수사관들에 의해 약 37일간 구금되어 1987. 1. 15에 서울구치소로 옮겨질 때까지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저는 당시 박영진 열사 장례 주도와 '선진적 노동자의 임무'를 쓴 것, 구로독산지역 노동자회 회원으로 활동했을 뿐인데, 당시 안기부에 불법적으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 등을 통해 제 활동을 '친북한 반미공산혁명을 위한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으로 자작했고, 언론보도를 통해 사실을 왜곡한 일이 있습니다. (2008년 4월 29일 진실화해위원회)

안기부는 신문뿐만 아니라 KBS, MBC를 동원해 심진구씨를 출연시켜 그가 연루된 노동해방동맹이라는 단체의 허구성과 좌익세력 비난에 열을 올렸다. 심진구는 구치소 수감 중 TV 출연 경위에 대하여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다음과 진술했다.
 
구치소에 있을 때 안기부 수사관이 구치소로 방문하여 TV 인터뷰(1987. 2. 25. TV 편성표(동아일보)에 의하면, KBS1 보도특집 <수인번호 30의 고백>(21:50~22:20), MBC 보도특집 <나는 후회한다> (21:40~22:00)가 편성되어 있다)를 하라고 해서 거절했으나 안기부 수사관들이 '그렇지 않으면 너는 간첩이 되고 사형이나 최소 20년간 감옥에서 썩을 것이다. 그러면 네 아내 어떻게 되는 줄 알지?' 라고 협박하여 어쩔 수 없이 자포자기 심정으로 안기부 수사관들이 불러주는 대로 적은 내용을 가지고 기자회견을 하게 되었다. (2010년 1월 22일 진실화해위원회)
 
 심진구 씨가 직접 그린 고문 수사관의 몽타지
심진구 씨가 직접 그린 고문 수사관의 몽타지 ⓒ 심진구
 
 정형근 의원에게 고문을 받았다고 증언하는 심진구씨
정형근 의원에게 고문을 받았다고 증언하는 심진구씨 ⓒ 김보성
 
이에 대해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구아무개 수사관은 이렇게 진술했다.
 
구치소로 심진구를 찾아간 이유는 윗선에서 강철시리즈를 평가절하 시키기 위해 방송이 필요한데 연행된 서울대생들이 그걸 할 리가 없으니 심진구에게 가보라고 오더가 내려왔다. 그래서 안기부 수사관 몇 명이 구치소에 가서 TV 출연하면 기소유예를 해주겠다고 했다. 심진구가 TV 인터뷰를 요청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안기부)가 출연을 강요하거나 협박하지는 않았고 기소유예 이야기를 하니까(안기부 조사 시에도 아내가 보고 싶다고 한 것으로 보아 아내를 보려고) 풀려나고 싶었는지 하겠다고 한 것 같다. 우리(안기부)가 사건 개요를 방송국 PD에게 주었고 거기서 시나리오를 작성해 심진구가 대본에 맞춰 인터뷰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구치소에서 피의자를 데리고 하는 거라 검사의 승인이 있었을 것이다. (2010년 3월 29일 진실화해위원회).

심진구씨는 생전 필자에게 '37일간 고문의 시간을 보내면서 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루라도 풀려나길 바라며 안기부 수사관들이 하라는 대로 하자는 마음밖에 없었다. 아내를 잡아다 조사하겠다는 협박에 어쩔 수 없이 방송 취재에 협조했는데, 그 방송으로 인해 나는 사회에 나와 운동권으로부터 변절자 취급을 받았다. 신문과 방송에 나온 나의 범죄사실은 나를 빨갱이로 만들었다. 나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라는 취지의 하소연을 자주 했다.

언론은 한편으로 심진구씨를 국가보안법 전과자로 만들었고, 또 한편으로는 변절자로 만들었다. 권력의 요구대로 방영한 언론은 언론이 아니라 선전도구일 뿐이다. 심진구씨는 이미 고인이 되었으나, 국가 권력의 시나리오대로 사실을 왜곡하고 국민을 기만한 것에 당시 방송과 신문은 여전히 사과 없이 침묵하고 있다.

한편 심진구씨는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재판에서 집행유예 선고를 받아 풀려났다. 진실화해위원회를 통해 안기부 수사 과정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가 있었고, 그의 혐의 역시 조작되었음이 밝혀졌다. 2011년 재심 개시가 결정돼 수사 과정에서의 고문 등 가혹 행위와 민족해방노동자당을 결성하려했다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평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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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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