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의 <분신>은 한 인간의 정신이 분열되어 서서히 미쳐가다 끝내 파멸하는 이야기이다. 소설은 관청에서 일하는 하급 관리 골랴드낀의 소심하고 우유부단하면서도 자의식에 가득 찬 내면 상태를 따라간다.
이를 통해 본 골랴드낀은 평소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사람이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을까, 그들이 자신의 험담을 하고 다니지는 않을까, 늘 노심초사한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을 대하는 골랴드낀의 모습은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왠지 모르게 불안해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관청에 골랴드낀과 모든 것이 닮아있는 사람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새로 온 사람은 골랴드낀의 생김새와 말투, 행동 심지어 이름까지 똑같다. 그는 다니면서 골랴드낀 행세를 하고 뻔뻔하고 대담한 행동으로 사람들을 속여 넘기며, 직장에서 그의 자리까지 빼앗는다.
이렇게 가짜 골랴드낀은 진짜 골랴드낀의 '분신'과 같이 행동한다. 이런 가짜 골랴드낀의 행동에 심한 분노를 느낀 진짜 골랴드낀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일일이 해명해 보지만 누구 하나 그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없다. 그러던 중 진짜 골랴드낀이 어느 파티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는 일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진짜 골랴드낀을 구경거리 삼아 조롱한다. 이 일이 있은 후, 진짜 골랴드낀의 정신은 피폐해지고 점차 광기에 시달리면서 현실과 환상을 분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다 결국 진짜 골랴드낀이 정신병원으로 끌려가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지금 시대 우리를 '분신'처럼 따라다니는 것
도스토옙스키는 1846년 25살의 나이에 이 책을 썼다.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이 대단한 성공을 거둔 뒤에 나온 이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는 컸다. 그러나 그런 기대와는 달리 이 작품에 대한 혹평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이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고, 비평가들은 완성미가 떨어지는 지루한 소설이라며 외면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이 작품의 주인공 골랴드낀은 앞으로 '가장 중요한 인간의 전형'이 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렇다면 골랴드낀은 이 시대의 전형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을까. 도스토옙스키가 골랴드낀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
골랴드낀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평가하고 그 존재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다. 그는 끊임없이 타인의 눈치를 살피면서 생각하고 행동한다. 타인의 시선에서 안정과 불안을 동시에 느끼는 인물이 바로 골랴드낀이다. 타인이 자신을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면 자신은 인정할 만한 사람이 되고 반대로 자신을 형편없는 태도로 대하면 자신은 한심한 사람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타인은 골랴드낀에게 자신을 인식하는 거울과 같다.
지금 시대 타인의 시선에 구속되어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을 우리는 흔하게 볼 수 있다. SNS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그 반응에 따라 울고 웃는 사람들은 지금 시대 제2의 골랴드낀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도스토옙스키가 골랴드낀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는 바는 가볍지 않다. 그것은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옭아매는 사람은 결국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는 섬뜩한 경고가 아닐는지.
아이러니 한 점은 바로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즐기고 또 갈망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원하면서도 혐오한다. 타인의 시선에 과도하게 몰입하고 그것에 자신을 맡겨버리는 삶이 온전할 리 없다. 노예의 삶인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진짜 골랴드낀이 끝내 미쳐가는 이유가 '타인의 시선'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타인의 시선'이라는 '분신'은 골랴드낀이 사로잡힌 사회적 성공과 명성, 그에 따른 불안과 우울 같은 속물적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타인이 자신을 평가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골랴드낀이 점점 미쳐간 이유는 바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과잉된 자의식'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니까 골랴드낀을 궁지로 몰아넣은 '분신'은 골랴드낀 그 자신에게 있는 셈이다.
지금 시대 우리를 '분신'처럼 따라다니는 것은 성공과 인정에 대한 욕망, 그것에서 비롯된 불안과 우울이 아닐까.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분신이 175년이라는 시간을 건너와서도 여전히 유효하게 읽히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분신'이라는 환상이 나를 파멸시킬 때까지 가만히 있지 말라는 메시지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타인의 시선에서 좀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고. 그것은 속물적 욕망에서 비롯된 환상에 불과하다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길이 바로 자신을 지켜내는 길이라고, 도스토옙스키가 말하는 듯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작가의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