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자 글쓰기 그룹 '대체왜하니?'는 초4에서 중3까지 10대 사춘기 아이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엄마 시민기자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편집자말] |
"가느냐 마느냐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때아닌 햄릿의 고뇌까지 빌려온 까닭은 고입 선택지를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이다. 경기도권 중학생들은 고등학교를 추첨의 방식으로 배정받는데, 공정성을 위한 그 배정 방식이 상당히 복잡하다.
배정은 '1단계 학군 내 배정'과 '2단계 구역 내 배정'으로 나누어 시행되는데 '1단계 배정'에서는 사는 곳이나 출신 중학교에 상관없이 전 지역(예를 들어 용인 전 지역, 성남 전 지역)을 대상으로 배정하고, 여기에서 배정받지 못한 지원자는 구역권(예를 들어 수원과 성남 등의 지역은 2개 구역으로 나뉘고, 용인은 3개 구역으로 나뉜다)에서 '2단계 배정'을 받는다.
문제는 그 구역이 상당히 넓어 원거리 통학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 또 내가 사는 지역은 18개교의 고등학교가 있어 18지망까지 선택하게 되는데, 이 선택에 운이 따르지 않을 경우 정말 18지망으로 선택한 학교에 배정되기도 한다.
지역 내에 18개교나 있으니 아이들 모두 근거리 배정을 받으면 고민할 것도 없이 좋으련만... 고등학교가 균형 있게 분포되어 있지 않다 보니 전부 근거리 배정을 할 수도 없어 지금의 추첨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 교육청의 표면적인 이유다.
그런데 학교마다 정원은 정해져 있고, 학생들은 가고 싶은 학교가 정해져 있으니 1지망으로 지원한 학교에 배정받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까닭에 중3 졸업을 앞두고 고등학교 선택에 치열한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가 중학교 1학년이었을 때는 선배 엄마들의 이런 고민이 남일 같았다. 그냥 다니기 쉽도록 가까운 고등학교를 지원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지금에 와서 보니 그야말로 치기 어린 생각에 불과했다.
일단 1지망 학교에 배정되지 않으면 2지망 학교, 다음은 3지망 학교에 배정되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2지망 이후는 원하는 학교에 배정될 확률이 줄어든다. 왜냐하면 이미 내가 쓴 2지망 학교에 1지망으로 지원한 학생들이 우선 배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2지망부터는 선호도가 낮은 학교를 선택해야 마지막 순위로 지망한 학교까지 배정이 밀리는 참사를 막을 수 있다.
정답 없는 문제에 '최선'을 찾아야 한다니
상황이 이러니 엄마들의 마음이 바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입시제도가 한 해가 다르게 바뀌고 있어 작년이나 재작년 하고도 또 다른 상황에 놓이니 머리가 복잡하다. 고교 블라인드가 시행되고 있고 정시가 늘어나는 상황이다 보니 더욱 그렇다.
내신 따기는 어렵지만 공부를 많이 시키는 정시형 학교를 선택할 것인가, 내신 따기 쉬운 수시형 학교로 선택할 것인가부터 시작하여 어느 학교의 분위기가 내 아이와 맞을 것인지, 집 앞의 학교에 배정받지 않는다면 3년을 매일 같이 아이를 실어나르는 라이드 역할까지 따져봐야 하다보니 집과 학교의 거리가 만만한지도 살펴야 한다.
또 사립학교인지 공립학교인지, 과학중점고는 아닌지, 특목 영재고를 지원했다가 떨어진 아이들이 선호하는 학교는 아닌지, 학생 수가 너무 적은 학교는 아닌지, 교육과정 편제표상 너무 어려운 과정들이 선택 과목으로 있는 것은 아닌지 등등도 따져봐야 한다.
아무리 모든 경우의 수를 대입해도 딱 떨어지는 정답이 없다는 게 이 문제라는 것을 안 순간, 왜 고입을 앞두고 점을 보러 간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쉽지 않은 선택지 앞에서 오죽 고민이 되었으면 점을 보러 갈까. 안타까운 것은 점을 보고 와서 지망한 학교에 배정되지 않는 웃픈 경우가 많다는 것. 그러니 점을 보는 것은 일찌감치 패쓰하고 나는 설명회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엄마들의 고민을 덜어주기 위함인지 더해주기 위함인지, 이 시기에 각 학교들과 학원들은 수많은 설명회를 연다. 학교들은 우수한 아이들을 유치해야 입시 결과가 좋아지니 설명회를 정성껏 준비하고, 학원들은 학생들의 입장에서 대입에 유리한 학교를 정리해 주는 설명회를 연다.
한 학원의 설명회에서는 학교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각 학교에 다니는 고등학생들에게 자기 학교의 장단점을 서술하라고 하여 그 통계표를 보여주었는데 이건 그냥 쉬어가는 페이지인가 싶어 웃음이 나왔다. 단지 아이들의 개인 의견일 뿐이니 참고만 하시라는 부연 설명이 달린 설문지를 보니, 동상이몽도 이런 동상이몽이 따로 없다.
아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학교의 장점은, 내신도, 세특('교과 세부 능력 및 특기 사항'의 줄임말)을 잘 써주는 선생님도, 집과의 거리도, 과학중점고도, 학생 수도 아니었다. 아이들의 첫 번째 관심사는 '급식이 맛있는지'와 '매점이 있는지'였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관심사였다.
그 외에도 아이들의 의견은 '교복 착용에 관대하다', '친구들이 착하다', '자판기 카드 사용이 가능하다', '자판기 음료수 안 채워준다', '잘 생긴 아이들이 많다', '화장실 휴지 일주일에 두 번만 리필된다' 등등 생활과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엄마들의 높아진 긴장도를 해소할 겸 보여주는 설문조사였을지는 몰라도 나는 이 설문조사를 보니 아이들은 고등학교라는 곳을 대입을 준비하는 기관이 아니라 3년을 생활해야 할 공간으로 인식한다는 것을 알았다. 엄마들에게는 수시 6장을 잘 쓸 수 있는 학교인지 아닌지, 가까운 거리인지 아닌지가 가장 큰 관심사인데 비해, 아이들은 인생의 3년을 지내야 하는 그곳이 과연 사람이 살 만한 곳인지 아닌지가 가장 중요했다. 그 모습이 꽤나 진심으로 보여 슬프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다.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낼지 모르겠지만
제출을 하루 앞둔 고교선택지를 앞두고 나는 아이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보았다. 어떤 고등학교를 가겠느냐고 묻는 내게 그동안 많은 고민이 있었던 듯, 아이의 비장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 OO고 갈래."
순간 내 마음 속에는 탄식과 환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OO고는 이 지역에서 가장 라이드가 힘든 학교라는 것과 수시원서 6장을 날려야(?) 할 정도로 내신이 힘든 학교라는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선호도가 낮은 학교라 1지망에 배정될 확률이 높다는 것 정도.
엄마의 입장으로서는 그리 반갑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 어렵다는 학교를 고민 끝에 지원하겠다고 할 정도로 아이의 결심이 확고하다는 것이 어찌 보면 좋은 징조 같기도 하여 희망과 걱정이 뒤섞인 만감이 교차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아이가 진짜 놀랄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원하는 결과를 가지고, 과거인 지금을 돌이켜 "그때의 결정이 신의 한 수였어"라고 할지, 아니면 지난 선택을 후회할지. 그러나 아이의 확고한 결심 앞에서 나는 섣부른 충고도 낙관도 그 무엇도 하지 않을 생각이다.
오늘의 선택이 좋은 선택으로 기억될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학교 이름을 적어내려갔다. 문득 선연하게 찍히는 도장을 내려다보니 깊은 한숨이 나온다. 3년간 라이드는 어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