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이른 봄. 빨래를 널러 가다 마당 보도블록 틈에 핀 제비꽃을 밟고 말았다. 그해 봄 처음 본 제비꽃이었다. 살아오면서 만난 제비꽃 중 가장 작게 핀 것이라 며칠 동안 신기하게 바라보곤 했던 것이기도 했다. 게다가 발길이 가장 잦은 곳에 피어 며칠째 밟지 않으려고 신경 쓰곤 했었던지라 밟았다는 느낌과 동시에 제비꽃으로 눈이 갔다. 그런데 착시였을까? 순간 제비꽃이 부스스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사실 신발 바닥으로 미세하지만, 뭔가가 느껴질 정도로 밟았었다. 그런데도 멀쩡했다. 심지어 여리디여려 보이는 꽃잎조차 전혀 손상되지 않고 말이다. 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마당에서 발길이 가장 잦은 곳에 핀만큼 밟힐 확률이 높다. 그런데도 자신이 뿌리내린 환경을 무시하고 몸집을 키웠다면 아마도 쉽게 꺾였을 것이다. 그러니 제비꽃은 아마도 몸집은 최소한만, 그 대신 밟혀도 꺾이지 않도록 줄기를 강하고 탄력성 있게 하는 것에 더 신경 쓰지 않았을까?
같은 마당, 사람 발길이 그다지 닿지 않는 곳엔 그 제비꽃과 같은 종류의 제비꽃이 해마다 훨씬 크게 자라곤 한다. 밟힐 가능성이 거의 없으니 아마도 줄기를 맘껏 키우면서.
식물은, 특히 잡초는 씨앗으로 떨어진 그 자리에서 일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다음 세대를 이어야 한다. 그러니 우리 집 마당 제비꽃들처럼 자신이 살아가는 환경과 조건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자라고 꽃을 피우는 등 살아남기 위한 나름의 투쟁을 한다.
<전략가, 잡초>(더 숲 펴냄)는 우리 집 마당 제비꽃처럼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연약해 보이지만 강인한 풀 혹은 잡초들의 생존을 위한 다양하며 치밀한 전략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잡초는 변화하기 쉽기 때문에 변이가 자주 일어난다. 예를 들어 토끼풀은 청산이라는 독물질을 만드는 유형과 만들지 않는 유형이 있다. 유럽 북쪽 지방에는 독물질을 만들지 않는 유형이 분포되어 있지만 남쪽 지방으로 가면 독물질을 만드는 유형이 분포되어 있다. 남쪽 지방에는 토끼풀을 먹어 치우는 달팽이가 있기 때문에 토끼풀이 몸을 보호하기 위해 독물질을 생산하는 것이다. 그러나 추운 북쪽 지방에는 해충 달팽이가 없으니 토끼풀이 독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추운 지역으로 갈수록 눈바람에 견디기 위해 키가 작아지거나 수분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잎이 작아진 풀이 있다. 또 추운 지역으로 가면 갈수록 꽃이 피거나 이삭이 나올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짧아지는 풀도 있다. 추운 지역에서는 여름이 짧으므로 꽃을 빨리 피워야 유리하기 때문이다. -<전략가, 잡초> 73쪽에서
혈족 간의 결혼을 법으로 금지하는 나라들이 많다. 기형 발생 등 유전적으로 불리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동성동본 결혼에 일정의 제한을 두고 있다. 책에서 읽은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식물들도 같은 꽃에 있는 암술과 수술이 수정하면(제꽃가루받이) 불리하다는 것. 그래서 그를 막으려는 다양한 전략을 펼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꽃들은 암술이 수술보다 길다. 수술이 더 길면 수술에서 꽃가루가 떨어져 암술에 붙을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암술과 수술 길이를 달리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보다 믿을만한 장치를 한다는 것이다.
암술이 성숙하기 전에 수술을 먼저 성숙시킴으로써 암술이 성숙할 즈음에는 수술이 꽃가루를 만들어 내지 못하게 하거나, 반대로 암술이 성숙을 마친 후 수술을 성숙하게 해 꽃가루를 만들어 내도록 시기를 달리하거나, 앵초처럼 같은 종류의 꽃인데도 장주화(암술이 길고 수술이 짧은)와 단주화(암술이 짧고 수술이 긴)로 피게 함으로써 가능성을 낮추거나 등처럼 말이다.
그런데도 한 꽃의 암술과 수술이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 '같은 꽃 수술에 있는 꽃가루가 암술로 옮겨붙는 일이 일어나면 수술이 화학물질 등으로 꽃가루를 공격하고 꽃가루가 발아해서 꽃가루관을 늘리거나 수정을 막는다(112~113쪽)'고 한다. 우리가 무심코 보거나 지나치는 그 순간에도 꽃 한 송이 혹은 풀 한 포기는 생존을 위한 치열한 노력을 하는 것이다.
제꽃가루받이와 딴꽃가루받이에는 각각 장점과 단점이 있다. 그렇다면 식물은 어느 쪽을 선택해야 유리할까? 잡초가 자라나는 환경은 대개 불안정해서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으니 어느 쪽이 더 유리한가에 대한 답은 잡초세계에는 없다. 오히려 잡초는 양쪽 다 갖는게 좋다. 그래서 잡초는 제꽃가루받이와 딴꽃가루받이를 상황에 따라 다 할 수 있는 '양다리 전략'을 선택한다.
예컨대 닭의장풀은 하루만 피는데 오전에 피었다가 오후에 진다. 만약 이 사이에 곤충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닭의장풀은 꽃가루받이를 해서 씨를 남길 수 없다. 그래서 닭의장풀은 꽃이 오므라들 즈음이 되면 암술이 안쪽으로 휘어 들어간다. 이때 툭 튀어나와 있던 수술도 마찬가지로 휘어 들어가 암술에 꽃가루를 붙여 제꽃가루받이를 한다. 별꽃이나 큰개불알풀 등도 꽃이 질 즈음 수술이 중앙으로 모여 꽃가루받이를 하는데 이 또한 제꽃가루받이를 알아서 하는 구조다. -<전략가, 잡초> 120쪽에서.
그렇다고 모든 식물들이 제꽃가루받이를 막는 것은 아니다. 한 포기로 홀로 자라거나, 꽃을 피우는 동안 벌이나 나비를 만나지 못한 잡초는 다음 세대를 이을 가능성이 작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닭의장풀처럼 필요에 따라 제꽃가루받이를 하는 등 필요에 따라 수정 방법을 선택하는 식물들도 많다고 한다.
잡초는 어떻게 싹틔울 때를 감지할까? 제초제를 뿌리면 잡초는 시들어 죽는데 같은 식물인 작물이나 채소는 왜 시들지 않을까? 꽃잎을 드러내지 않고 열매를 맺는 폐쇄화는 어떤 식으로 수정을 할까? 밤꽃같은 풍매화들은 왜 그처럼 엄청나게 많은 수꽃을 발달시킬까?
'잡초' 혹은 '풀'이란 단어와 함께 쉽게 떠올리는 것은 '강한 생명력'이다. 그런데 저자에 의하면 '잡초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타고난 연약함'이다. 책은 길가 혹은 공터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잡초들의 연약해서 더욱 치열하며 강인한 생존 전략과 인간과의 오랜 싸움을 7장으로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