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자 글쓰기 모임 '두번째독립50대'는 20대의 독립과는 다른 의미에서, 새롭게 나를 찾아가는 50대 전후의 고민을 씁니다. [편집자말] |
미국에 이런 농담이 있다고 한다.
"내가 피아노를 배우고 나면 몇 살이 될 것 같아요?"
"당신은 피아노를 배우지 않아도 어차피 그 나이가 될 거예요."
얼마 전, 친구들 단톡방에서 생일 맞은 이를 위해 직접 친 피아노 연주를 올려준 친구를 보고 이 농담이 생각났다. '무엇을 배우기에 늦을 때란 없다'라는 농담의 속뜻처럼, 친구는 50세가 된 올해 봄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초보자를 자처한 사람들
이 친구의 피아노에 대한 열망은 20대 때 전공인 발레 연수를 위해 러시아에 갔을 때부터였다. 발레 수업이 끝나 라이브 연주를 해주는 피아니스트가 떠나도, 연습실에서 서로 피아노를 쳐주며 고된 훈련의 긴장을 풀고 예술적 교감을 나누는 현지 무용수들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고 했다.
50이 된 친구는 더 늦기 전에 피아노를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새로운 것을 배우면서 성장한다는 느낌이 좋다면서. 무엇보다 오롯이 집중하는 시간이 즐겁다는 친구는 매일 한두 시간씩 연습하고, 일주일에 한 번 레슨을 받으며 피아노에 푹 빠져 있다. 그에게 생동감이 넘쳤다.
주변에 나이 오십이 넘어 피아노를 시작한 이들이 한두 명씩 늘고 있다. 50대 중반인 지인 역시 두 달 전 동네 피아노 학원 간판을 보고 무작정 들어가 등록했다. 중학교 때, 친구네 거실에서 그랜드 피아노를 본 이후 피아노 배우기는 그의 오랜 소원이었다.
"솔솔라라 솔솔미~."
그는 말한다.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르는 대로 나오는 피아노 소리가 맑고 좋다. 빨리 잘 치고 싶다는 진도 욕심은 없다. 이제는 배우는 과정을 소중하게 여기고 즐길 줄 아는 나이가 되었으니까. 쉬운 곡이지만 악보 하나를 넘길 때마다 성취감이 있고, 차곡차곡 배워가는 과정이 즐겁다.' 코드를 익혀 노래 반주를 할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해보기로 마음먹었다는 친구의 취미가 내 일처럼 반갑고 좋다.
미국 작가 줄리아 카메론도 60세가 되었을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초보자라도 얼마간의 발전이 있었고, 무엇이든지 진전이 있다는 것은 만족스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실제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종종 '초보자가 되고 싶지 않다'라는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주 조금이라도) 발을 담그고자 한다면 그 보상으로 어린아이 특유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 <새로운 시작을 위한 아티스트 웨이> 52쪽
나이 들어 '초보자 되기'란 힘들다. 나이 들수록 내가 능숙한 일을 앞세우고, 잘나가던 과거를 되새김질하며 살기 쉽기 때문이다. 초보자의 미숙함과 어색함이 창피하고 부끄러울 때가 많지만, 우리는 이제 무언가 익숙해질 때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인내해야 하는 것도 안다.
서두르지 않고 여유를 가질 수 있기에 새로운 배움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기꺼이 "초보자가 되는 용기"를 낸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기계적 연주가 목적은 아니라서
노화가 진행되는 50세에 새로운 것을 배우면 이점이 많다. 우선 대뇌를 자극하여 두뇌의 노화를 방지하고 기억력을 높인다. 뇌는 개인의 경험으로 계속 변하고 발달하기 때문(뇌 가소성, brain plasticity)이다.
'늙은 개에게 새로운 기술을 가르칠 수 없다'라는 속담은 낡은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피아노와 같은 악기를 배우면 신체적 이점도 있다. 손가락의 미세 운동이 활발해지면 부족해진 혈액순환에 도움이 된다.
물론 나이들어 피아노를 시작하면 기술적인 면에서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경험에서 오는 음악적 감성이나 표현력은 오히려 깊고 풍부할 수 있다. 음악적 감성이란 음악에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능력, 공감 능력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 부모님의 강요로 억지로 학원에 다니며 악보 위에 바를 정(正)을 채워가던 기계적 연주가 아니라 이제는 내 감정을 표현하고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연주다.그뿐 아니라 피아노를 통해 인생의 통찰력 또한 얻게 된다.
연습곡이 어려워도 꾸역꾸역 치며 스트레스를 받았던 친구는 이 곡을 멈춰도 된다고, '포기가 아니라 잠시 미루기'라는 강사의 말에 완벽주의라 힘들었을 자기 자신에게 사과했다고 한다.
또 다른 친구는 '처음엔 아주 느린 속도로 천천히 연습해라. 악보에 나온 빠르기는 나중에 자연스럽게 된다'라는 피아노 학습법을 통해 지금까지 남들보다 앞서기 위해 달려온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수 있었다.
지난달, 순천만 국가정원에 갔을 때 본 튤립 구근(알뿌리)이 생각났다. 초겨울을 앞두고 마늘보다 크고 양파보다 작은 튤립 구근 심기가 한창이었다. 튤립은 추위를 이겨내고 봄에 예쁜 꽃을 피운다. 흔히 중년을 인생의 가을에 비유하곤 한다.
여기 인생의 가을에 '피아노'라는 구근을 심은 이들이 있다. 그들은 어릴 때와는 다르게 경험과 시간, 열정이라는 값진 거름을 가지고 있다. 피아노 구근은 땅 밑에서 더디게 움틀지 모른다. 하지만 푸른 싹이 나고 언젠가 각자만의 색깔과 향을 가진 꽃으로 피어나리라 믿는다.
뻔한 말로 들리겠지만 늦은 때란 없다. 악기, 그림, 운동, 글쓰기, 언어…… 평소에 당신이 원했던 구근을 심을 때가 바로 지금이다. 호기심을 가지고 새로운 경험에 도전한다면, 우리에겐 또 다른 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