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완이 열심히 공부하면서 성장하고 있을즈음 나라의 사정은 점점 어려워져갔다.
주요 사건을 살펴보자.
1896년 : 아관파천, <독립신문> 창간, 독립협회 설립.
1897년 : 대한제국으로 국호변경.
1898년 : 흥선대원군 사망, 보부상들 황국협회 설립, 만민공동회 개최, 독립협회 열강의 이권침탈 철회 주장.
1899년 : 영학당 활동.
1890년 : 활빈당 활동.
1901년 : 제주에서 이재수의 난 발발.
1902년 : 서울 -인천 간 전화개통.
1902년 : 제1차 하와이 이민.
1903년 : 용암포사건 발생, 목포 부두 노동자 동맹파업.
1904년 : 한일의정서 체결, 송병준ㆍ이용구 등 일진회 조직.
1905년 : 을사늑약 체결, 시종무관장 민영환 을사늑약 반대하며 자결.
1906년 : 서울에 조선통감부 설치, 의병장 최익현 등 일제에 피체.
1907년 : 국채보상운동, 나철 등 을사오적 습격, 고종 폐위되고 순종 즉위, 한일신협약 체결, 정미의병 활동, 신민회 설립, 13도 창의군 결성 등이다.
박동완은 1907년 22세에 배재학당에 들어가 근대교육을 받으면서 민족의식과 기독교 정신을 수용하였다.
배재의 전도대상은 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 당사자들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부모까지도 확장되어 있다. 또한 세례식을 일종의 전도의 장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을 정규과목으로 편성함으로써 배재학당 학생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기독교 교리와 원리를 배우게 된다. 배재의 교사나 학생들은 믿지 않는 학생들이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하여 특별히 노력하였다. 따라서 배재에 입학한 박동완도 이러한 환경에 쉽게 노출되어 자연스럽게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최병헌 목사의 세례 준비반에서 교육을 받고 회심했을 가능성이 있다. (주석 1)
박동완은 23세이던 1908년 장로목사 존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박동완은 1908년 존스(G. H. Johns, 조원시(趙元時), 1867~1919)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907년 존스 장로목사가 전면에 나서고 최병헌 목사가 도와서 감리교단인 정동제일교회에서 세례식이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토착인 목사 최병헌을 배려하면서 공식적으로는 선교사 목사가 집례하는 형식이었다.
최병헌 목사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1908년 3월 연회에서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로 파송되었다. 따라서 박동완이 세례를 받을 당시에도 존스 장로목사가 집례하고 최병헌 목사가 보조하였을 것이다. 박동완의 개종의 시기나 경위는 명확하지 않다. 이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그가 남긴 여러 글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앙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회심은 아마도 배재학당 재학 중에 이루어졌으며 배재학당의 채플과도 같은 정동제일교회에 출석하였다. 따라서 정동제일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1928년 하와이로 망명하기까지 정동제일교회에만 출석하였다. (주석 2)
전통적인 유학자의 가문에서 신교육을 받고 미국인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은 박동완은 이후 나라를 사랑하는 실천적 기독교인으로 살았다. 배재학생이 되어 상투를 자르고 양복을 입었다. 아버지 세대와는 확연히 달라진 의식이고 모습이었다.
조정은 1895년 백성들에게 머리를 짧게 깎으라는 단발령을 내리고, 관리들이 거리나 성문에서 가위로 머리를 깎기도 했지만, 백성들은 을미사변으로 일본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좋지 않던 차에 친일내각이라는 소리를 듣던 정부가 전통과 백성들의 윤리감정을 거스르는 이같은 조처에 저항했다. 을미의병의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자발적으로 단발을 단행한 것이다.
박동완은 전통적인 조선인에서 근대적인 한국인으로 의식과 외양이 바뀌었다.
"근대화와 국권회복을 위해 배재학당에 들어간 박동완은 당시 학교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회심에 이르게 되고 이를 통해 유교적 전통을 벗었으리라 생각된다. 그의 생전모습이 담긴 사진은 몇 장 남아있지 않지만 모두가 서양식 단발과 양복차림이다. 양반관료 계급이 연상되는 상투와 한복차림이 아니다. 아마도 배재학당 시절에 이러한 머리모양과 서양식복장으로 바뀌었으리라 보인다." (주석 3)
박동완은 이때의 심경을 뒷날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1897년 7월 8일에 방학식을 거행하였는데 그 장면은 우리 학교 역사상 최고 수준(high water-mark)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새 예배당 건축도 마무리되어 사용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베네수엘라에 대해 언급하자 미국 사회에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듯이 그 규모는 작았지만 이곳 배재 학생들도 그동안 애지중지하던 상투를 자르고 한복을 벗어야 함을 알고는 슬픔과 충격에 휩싸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새로운 배재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늘어났다. 충격에서 벗어나 새로운 교복에 적응한 학생들은 새로운 열정을 발산하기 시작했는데 방학식에서 그 열정은 최고점에 달했다. (주석 4)
박동완은 세례 교인이 되었다. 그에게 1908년 세례한 존스 목사는 어떤 인물인가.
박동완에게 세례를 준 존스 장로목사는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대학입학 준비 중에 1887년 선교사로 지원하였다. 그는 1888년에 조선 선교사로 파송 받아 같은 해 5월 17일 21세에 조선에 입국하였다. 존스 장로목사는 최병헌 목사에게 기독교신앙을 전수하였고, 최병헌 목사는 존스 장로목사에게 조선어와 조선에 대한 여러 가지 지식을 가르쳐주었다. 존스 목사는 배재학당 교사를 역임하였고, 아펜젤러가 안식년으로 자리를 비운 1892년 7월부터 1년 간 배재학당 당장으로 일하였다.
또한 그는 제물포지방 감리사로 1892년부터 1903년까지 있었으며, 황성기독교 청년회가 1903년 설립되는 데 공헌하였다. 1907년부터 1911년까지 협성신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한국 감리교 선교 초기 아펜젤러가 씨를 뿌렸다면 존스는 물을 주어 자라게 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크게 공헌하였다. (주석 5)
주석
1> 임미선, <민족대표 근곡 박동완의 생애와 기독교민족주의 연구>(박사학위 논문), 2017,(이후, <임미선의 박사학위논문>, 표기)
2> 박재상ㆍ이미선, <근곡 박동완의 생애와 기독교민족주의연구>, 46쪽, 정한책방, 1919.
3> 임미선, 앞의 학위논문, 32쪽.
4> <배재학당의 방학>, <조선그리스도인회보>, 1897년 7월 14일.
5> 오영교, <정동제일교회 125년사 제1권 통사편>, 박재상ㆍ임미선, 앞의 책, 46쪽, 재인용.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대표 33인 박동완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