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명선(가명) 소위는 경기도 여주군(현 여주시) 능서면 용은리 어귀에서 지프차를 멈췄다. 차에서 내린 그는 논에서 일하는 노인들에게 손나팔을 하고 외쳤다. "어르신. 여기 박용순 동무네 집이 어댑니까?" 노인들은 지프차에 탄 젊은 군인이 낯설었지만 경계하지 않고 알려 주었다.
잠시 후 그는 박용순 집 대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문을 연 이는 박용순의 아내 이씨(李氏)였다. "누구세요"라고 묻는 그녀는 잔뜩 겁을 먹은 듯 자라목을 하고 있었다. "저는 인민군 소위 리명선이라요." "..." "저는 군의관입네다. 제가 박용순 동무를 수술한 사람입네다. 차도가 어떤지 보러 왔습네다."
리명선이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 피내음이 확 풍겨왔다. 리명선이 박용순의 대퇴부를 덮은 피로 물든 헝겊을 풀자 수술 자국이 드러났다. "총알을 빼낸 곳이 아물기 시작했습네다. 헝겊을 자주 갈아주고 여기 가져온 약을 바르시라요." "네. 정말 고맙습니다." 군의관은 박용순에게 목발을 건넸다. "당분간 안정을 취해야 합네다. 꼭 목발을 짚고 다니시라요." 리명선을 배웅하고 나자 박용순은 한 달 전 그를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탕 탕 탕!" 총소리에 박용순은 의식을 잃었다. "이보시라요. 동무, 정신차리시오." 흐릿하게 정신이 돌아온 박용순은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급소를 비켜갔지만 몸 어딘가에 총상을 입은 것이다. "동무 아프더라도 참으시라요." 박용순은 의식이 왔다갔다 해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그는 양쪽 대퇴부에 박힌 총알을 빼내는 수술을 1시간에 걸쳐 받았다. 마취제도 없이 생살을 갈라 수술했다. 총알이 급소를 피해 대퇴부를 관통했기에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박용순이 여주 읍내의 병원에 누워 있다는 소식에 가족들은 함석에다 종이를 깔고 데리러 왔다. 박용순은 1950년 여름 내내 목발을 짚고 다녔다.
한국전쟁 발발... 사라진 사람들
"쿵" "쾅" "이게 뭔 소리여?" "..."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에 여주군 용은리 농부들은 모내기를 잠시 멈추고 허리를 폈다. 귀를 쫑끗했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허리를 굽혔다. "전쟁이 났답니다!" 며칠 전 휴가를 받아 나온 송숙범이 소리쳤다. 한국전쟁 발발로 인한 귀대조치에 그도 부대 복귀를 서둘렀다. 그제야 용은리 사람들은 전쟁이 난 것을 알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인 1950년 6월말 용은리에서 사람 여럿이 경찰에 연행된다. 거기에는 모내기 끝난 논에 비료를 주던 박용순도 포함됐다. 그는 해방 후 남로당 활동을 했다. 여주지역 보도연맹원들이었다. 그들은 여주경찰서 임시유치장으로 쓰인 얼음창고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7월 1일경 그들은 여주읍 중앙동 건지미골짜기로 끌려가 경찰과 국군 6사단 헌병에 의해 학살되었다. 인민군이 무서운 기세로 밀고 내려오자 대한민국 군경은 후퇴하면서 북한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며 보도연맹원들을 없앤 것이다. 인민군이 여주에 들어오기 바로 전날, 학살은 단행됐다. (신기철·이인수, 『짧은 전쟁 긴 아픔』, 2020)
당시 흥천초등학교 교장 성관식과 전 흥천면장 이근덕, 금사면 이포리 최병화, 최영찬, 김성한과 능서면 매류리 민치복(세정중학교 교장)이 죽임을 당했다. 이 죽음의 골짜기에서 천만다행으로 살아남은 이가 있었으니 여주읍의 노학수와 능서면 매류리의 박용순이었다. 총에 맞고 건지미골짜기에서 신음하던 박용순을 다음날 여주읍에 들어온 인민군이 발견했고, 인민군 군의관이 수술을 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여주의 모스크바' 용은리
1950년 9월 24일 낙동강까지 밀려갔던 유엔군이 여주땅을 다시 밟았다. 인민군이 여주에 들어온 때가 7월 4일이니 만 80일만의 수복이었다. 그동안 여주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여주군에는 군·면·리 인민위원회가 만들어져 북한군의 통치행위가 이루어졌다. 북한식(무상몰수에 의한 무상분배) 토지개혁이 이루어졌다지만 전쟁으로 인한 공출과 짧은 인민군 점령 기간으로 별 의미가 없었다.
유엔군에 밀려 후퇴하기 직전 북한군은 우익인사들을 학살했다. 전주, 대전, 청주 등지에서 대규모 학살이 이루어졌고, 규모의 차이는 있었지만 여주에서도 벌어졌다. 여주군 금사면에서는 박규관이 얼음창고에서 희생됐고, 능서면에서는 용은리 홍순국·홍순대가, 북내면에서는 서울에서 피신 온 학생을 포함해 7명이 냇가 모래사장에서 북한군과 지방 좌익에 의해 살해당했다.
또 인공 시절 주요 활동을 했거나, 민간인 학살에 가담한 이들은 인민군을 따라 월북할 수밖에 없었다. 인민군에 의해 목숨을 건지고 인공 아래에서 이런저런 활동을 한 박용순도 선택의 기로에 섰다. 그는 신원리 처갓집으로 가 "숨겨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는 용은리 사촌 처남 집 사랑방 다락에 숨을 수 있었다. 하지만 "빨갱이를 숨긴 자는 똑같이 처벌한다"는 소리에 그는 그 집에서 나와야 했다.
그의 이후 행적은 정확히 전해지지 않지만 군·경에 의해 학살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아내 용인 이씨(李氏)와 아들 박준원(당시 17세)도 매류리 고령토구덩이(공동묘지)에서 부역혐의로 학살되었다. 박용순의 동생 박용옥은 월북을 시도하다가 경기도 광주군 석바다에서 사살 당했다.
용은리에서는 유독 박씨들의 희생이 컸다. 능서면 부인민위원장 박천원과 그의 아버지 박용달과 어머니가 매류리 공동묘지와 능서면 일대에서 죽임을 당했다. 박천원의 아버지 박용달은 용인리 인민위원장을 했다. 같은 마을 박중원과 그의 어머니, 할머니, 남동생 박형원도 같은 신세였다.
능서면 용은리는 부역혐의로 학살된 이들도 많고, 월북한 이들도 많고 의용군도 간 이도 많다. 당시 용은리는 '여주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였다. 이천수(90세, 여주시 능서면 용은리)옹은 "용은리에는 해방 후 박씨들이 죄다 남로당 활동을 했어요. 그이들 때문에 (전쟁) 피해가 컸지요"라고 했다.
이천수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에 대학을 다녔던 박용술은 인공 시절 경기도 인민위원장을 했다고 한다. 수복기에 그는 부모와 함께 월북했다. 같은 마을 박용만도 어머니, 남동생 박용조와 여동생 박용분을 데리고 북으로 갔다. 물론 용은리의 전쟁 피해가 박씨에게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이병기 가족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병기와 그의 아내, 아들 이시현과 그의 동생 세 명까지 해서 총 6명이 공동묘지에서 죽임을 당했다.
형은 의용군, 동생은 국민방위군
"18세 이상 남자들은 전부 모이시오"라는 전갈에 이천호(당시 만18세)는 마을 회관으로 갔다. 회관 안에는 능서면 부인민위원장 박천원과 그의 아버지 박용달(용은리 인민위원장), 그리고 여성동맹 간부들이 앉아 있었다. 18세 이상 남성들이 회관 밖에까지 길게 줄지어 있었다.
즉석 심사로 의용군 입대 여부가 가려졌다. 말이 좋아 의용군이지 강제로 끌려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천호의 형 이만호 순서였다. "너 의용군 가라." "저는 안 돼요. 농사지을 사람이 없습니다" "네 아버지, 동생도 있는데 왜 못 가냐? 가!" 그렇게 해서 형 이만호가 의용군으로 가고 이천호는 제외됐다.
이 소식이 전해진 이만호 집은 상갓집 분위기가 됐다. 그날 저녁 이만호의 아버지가 닭을 두 마리 잡아 한 마리는 만호에게 주고, 다른 한 마리는 나머지 가족들이 먹었다. 먹는 내내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만호를 포함한 인민군 의용군에 입대한 여주 용은리 청년 20명은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다만 홍종태와 인한영만이 의용군 대열에서 도망쳐 고향에 살아돌아왔다.
이후 이천호는 제2국민병(국민방위군)에 소집되었다. 그는 1950년 11월 경북 경산에서 현역에 자원입대했다. 대구8교육대에서 2주간 훈련을 받은 후 강원도 정선에 배치되었다. 전선은 강릉과 고성, 양구로 이동되었다. 이천호는 양구에서 부상을 입고 1953년에 의병제대했다. 이렇게 여주군 능서면 용은리 사람들이 겪은 전쟁의 아픔은 크고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