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이라는 이름으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책더미 속에서 사심을 담아 알리고 싶은 책, 그냥 지나치긴 아까운 책을 오마이뉴스 라이프플러스 에디터가 골라 소개합니다.[편집자말] |
손꼽히는 명문 대학의 영문과를 나왔다. 졸업 후엔 대한민국 주요 일간지를 만드는 한 신문사에 입사해 4년 동안 일했고, 그곳에서 평생의 반려자가 될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보통의 한국 여성들에게 결혼과 임신, 출산은 경력 중단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다행히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은 뒤에도 공부를 놓지 않을 수 있었다. 둘째 딸을 갑작스럽게 임신하고도 무사히 미국 유학을 떠나 교육심리학을 전공했다.
이력만 보면 누구나 선망할 만한 인생, 그러나 점점 그 삶이 버거워졌다. 그러던 와중에, 한국에 남아 첫째 딸을 돌보며 회사를 다니던 남편은 나이 마흔에 '은퇴'를 말했다. 뒤늦게 부부의 폭풍 같은 방황이 시작됐다. 그런데 이게 서로의 인생에 '전환점'이 됐다. 새로운 삶을 구상하던 두 사람은 가족 모두가 한국을 떠나 미국에 정착하는 길을 택한다. 사회가 규정한 '안전한' 트랙에서 벗어나, 원하는 만큼만 벌고 쓰며 살아가는 실험을 시작한 것이다.
도시에 살던 이들은 미국 시애틀에서 한 시간이나 떨어진 시골 숲 속에 가족의 새 둥지를 틀었다. 소박한 이동식 주택이 이들의 '집'이 됐다. 직접 농사를 짓진 않았지만, 끼니 때면 가족이 총출동해 숲 속에서 채취한 과일과 야생초로 밥상을 차렸다. 빵이 고플 땐 직접 통밀을 갈아 만들었고, 콩을 삶아 된장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때론 마트에 가서 간단한 음식을 사 먹거나 생활에 필요한 가전을 사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4인 가족 한 달 생활비를 100만 원에 맞춰 쓰는 게 가능했다.
새로운 삶의 방식을 택한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과잉도, 부족함도 없는 '적당함'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코로나19로 아이들의 학교에서 핫스팟을 무료로 제공해주기 전까지, 2G 휴대전화 두 대와 라디오 하나로 세상 소식을 전해들었다. 인터넷이 필요할 땐 도서관을 찾으면 될 일이었다. 이쯤되면,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21세기에 그런 아날로그적인 삶이 정말로 가능하냐'고. 이들은 답한다, 가능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은 오히려 '최첨단'이라고.
본 적 없는 가족의 등장
위 내용은 에세이 <오히려 최첨단 가족>을 쓴 박혜윤 작가의 이야기다. 사실 이 책을 처음 마주했을 땐, '최첨단'이라는 표현이 일종의 반어법이라고 생각했다. 와이파이가 잠깐만 끊겨도 손발이 묶인 것처럼 답답함을 느끼는 이 시대에, 다소 느리고 불편한 생활 방식을 구사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최첨단'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는 아무래도 영 어색한 것이 사실이니까.
그런데 이 가족을 뜯어보니, 실로 그랬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새로운 가족의 형태였다. 박혜윤 작가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건 적게 벌고 적게 쓰는 소비의 형태나 독특한 생활 방식이 아니다. 그저 '우리는 이렇게 산다'고 말할 뿐, 독자들에게 이런 형태의 삶이 옳다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보다 집중하는 건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나, 가족과 새롭게 관계를 맺는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다.
이들 사이엔 '능력 있는 배우자, 희생적인 부모, 은혜에 보답하는 자녀'가 없다. 누구든 가족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잃지 않은 한 명의 개인으로 존재할 뿐이다. 가사노동은 모든 구성원이 동등하게 나눠서 한다.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의무를 짊어지게 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당연히 부모가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거나, 자식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자유롭다. 또 무언가를 성취하지 못한다고,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서로를 책망하거나 비난하지도 않는다.
다만 거짓말을 하거나 남을 해하지 않고,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지기만 하면 된다. 물론 늘 이 같은 원칙이 지켜지는 건 아니다. 여느 가족들이 그러하듯 이들도 '나 빼놓고 초밥을 다 먹었다'고 삐지고, 아끼는 물건을 줬다 뺐었다고 자매끼리 투닥거리기도 한다. 때론 서로의 가치관이 맞지 않아 부딪히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다툼과 갈등을 해결할 때도 이들은 조금 다른 길을 택한다.
"엄마, 우리 싸울 거야!"
내가 달려가는 동안, 아이들이 서로를 노려보면서 기다리고 있다. 규칙과 틀로서의 싸움판이 잘 형성된 것이다. ... 부모 입장에서 보면 언니는 참 쌀쌀맞고 못돼 보이고, 동생은 왜 가만히 있는 언니를 먼저 건드리나 답답한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때 부모가 아니라 스포츠 중계자가 된다. 주로 전략을 설명한다. (p.100)
예를 들어, 박혜윤 작가는 딸들이 싸우려고 할 때 하던 일을 멈추고 그 현장으로 간다. 그가 하는 건 싸움을 말리는 일이 아니다. 싸움의 '중계자' 역할을 자처한다는 그는, 싸우면서도 다치지 않기 위한 안전수칙을 설명하고, 룰을 규정하고, 각자의 '싸움 전략'을 알려준다. 그래서인지, 아이들 또한 싸움이 시작될 기미가 보이면 엄마를 찾는단다. 중계자가 있어야 '제대로'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박 작가가 자매의 싸움에 적극적인 관전꾼으로 참여하는 이유는 다툼이 그저 다툼에 그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자녀의 싸움이 '관계를 쌓아가는 연습'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다투면서 타인과 나의 차이점을 파악하고, 상대가 누구인지 파악하는 기술을 익힐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이 같은 싸움을 복기하며 아이들뿐만 아니라 부모도 자녀의 특성과 성향에 대해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익숙한 가사노동과 육아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가족 문법'을 만들어가고 있는 이런 엄마와 가족의 등장이 낯설면서도 반가운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은 가족
작가가 이런 새로운 관계 맺기를 추구하게 된 데에는 배경이 있다. 스스로 설명하길, 박혜윤 작가는 "가정불화가 끊이지 않았는데, 각자는 지극히 모범적"이었던 가정에서 자랐다. 부모는 각자의 의무를 다하는 검소하고 근면성실한 이들이었고, 박 작가와 동생은 큰 말썽부리지 않고 컸다.
하지만 그는 이 지극히 '평범'한 대한민국 4인 가족의 틀 안에서 "모두가 공평하게 지옥을 살았다"고 단언한다. 이 '평범함'을 유지하기 위해선 모두의 헌신이 필요했고, 그 헌신이 보상 없는 일방적인 희생으로 변하거나 서로에 대한 원망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구성하는 가족만큼은 '느슨한 관계'이길 바랐단다.
... 행복해지겠다는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서로에게 더 나아지거나, 더 채우거나, 더 좋은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기대 없이 관계가 저절로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이해만으로 가족을 지탱할 수 있는지 실험해보고 싶었다. 행복을 구하지 않고, 의무도 없으며, 더 발전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그냥 현재의 나로도 충분한 관계가 가능할지 궁금했다. - p.48
작가가 책에서 조심스레 덧붙이듯, 모든 이들이 이 가족처럼 사는 게 '정답'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최첨단 가족>이 그린 삶의 방식 중에 동의가 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또 이들이 이 같은 '실험'을 할 수 있었던 건, 결국 몇 가지 배경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옳다'고 여겨지는 관습(이라는 이름의 억압)을 훌훌 벗어던진 이 가족의 모습을 엿보는 건 그 자체로 우리에게 '틈'을 열어준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다는, 조금 다르게 사는 길도 있다는 가능성의 틈 말이다.
서로 끈끈하게 뭉쳐,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더라도 괜찮은 가족. '지금 그대로'에 머물러도 조바심을 느끼지 않고, 다만 각자가 각자로 존재할 수 있도록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서로를 응원하는 가족. 행복해지기 위해 불행해지지 않는 가족. 그런 '최첨단' 가족의 형태에 대해 더 상상할 수 있다면, 세상은 좀 더 자유롭고 재밌어지지 않을까.
... 우리는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주거나 행복을 줄 수는 없지만 대신 각자의 외로움, 불안, 부족함을 서로 인정해준다. 지금까지의 가족이 더 많은 재산을 모으고 더 경쟁력을 갖춘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면, 앞으로의 가족은 (여전히 존재한다면) 더 발전하지 않고 지금 그대로여도 괜찮다고 서로에게 말해주는 관계여야 할 것이다. (p.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