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20일, 서울 용산4구역 철거민들이 남일당 건물 망루에 올랐다. 원주민에 대한 대책 없는 개발정책으로부터 삶의 터전에서 쫓겨날 위기에 내몰렸기 때문이었다. 용산 재개발 사업에는 150층 빌딩 건설 등 사업비만 28조원에 달하는 엄청난 개발이익이 걸려 있었다. 시공사들이 얻는 이익은 4조원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상가 세입자들은 사업 결정과 추진 과정은 물론 개발이익으로부터도 철저히 배제됐다. 이주 보상비만으로는 살길이 막막한 그들에게 망루 농성은 벼랑에 몰린 생존권의 절박한 표현이었다. 생존권은 사람으로서 생존하는 데 필요한 것을 국가에 요구할 수 있는 권리다.
이후 영화에나 나올법한 상황이 현실에서 벌어졌다. 망루를 쌓아 올린 지 하루도 채 안 돼 대테러진압에 투입된다는 경찰특공대가 투입됐다. 경찰특공대를 태운 컨테이너가 지게차에 실려 망루로 날아올랐다. 무장한 200여 명의 경찰특공대가 30여 명의 철거민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했다.
진압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철거민 5명, 경찰특공대원 1명이 목숨을 잃었다. 서울경찰청은 순직한 김남훈 경장에 대해 경사로 승진시키고 옥조근정훈장을 추서했다. 김 경사는 서울 가락동 경찰병원에서 서울경찰청장 장으로 장례가 거행된 뒤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철거민 희생자들의 장례식이 치러진 것은 참사 355일 만인 2010년 1월 9일이었다. 서울역 광장에 마련된 영결식에서 1년 동안 검은 상복을 입었던 유족들이 망자에게 꽃을 바쳤다. 1년 가까이 냉동고에 갇혀 있었던 망자들은 그날 저녁 비로소 흙에 묻혔다. 직무를 수행하다 목숨을 잃은 김 경장이나 생존권을 잃고 저항하다 숨진 철거민들이나 모두 자본의 물신주의와 국가폭력이 결합돼 일어난 비극의 희생자들이었다.
검찰은 화재의 원인을 철거민들의 화염병으로 단정 지었고 재판과정에서 수사기록 3000쪽을 은폐했다. 은폐된 수사기록에는 1월 20일 당시의 진압이 무리한 지시였음을 알 수 있는 경찰 관계자들의 진술과 화재의 원인이 화염병이 아님을 알 수 있는 진술이 담겨 있었다. 무리한 진압의 책임자였던 김석기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진압 당시 무전기를 꺼두고 있었다는 거짓말을 일삼으며 책임은커녕 제대로 된 조사조차 받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각종 진상규명의 일환으로 실시된 경찰청 진상 조사위에서 "경찰지휘부가 안전 대책이 미비했지만, 진압을 강행했다"며 "진압과정에서 순직한 경찰특공대원과 사망한 철거민 등에게 사과를 하고, 유사 사건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용산참사는 화재 가능성이 높은 장소에서 위험한 작전을 펼쳤다는 점에서 20년 전인 1989년 동의대 사건과 공통점이 많다. 2016년 4월엔 '용산4구역 정비계획 변경안'이 통과되면서 참사가 벌어졌던 곳에는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인 용산 센트럴파크 해링턴 스퀘어가 들어섰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미디어마당 사회적협동조합 누리집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