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니가타현 사도섬 사도광산은 한국인 강제징용뿐 아니라 '일본인 강제징용'으로도 유명했다. 임진왜란 종전 3년 뒤인 1601년에 금맥이 발견되어 도쿠가와막부(에도막부, 1603~1867)의 재정 수입원이 된 이곳은 무숙자(잘 곳이 없는 사람, homeless)나 죄수들의 강제노역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이로 인해 사도섬은 강제노역 노동자들의 무덤이 됐다. 그들 중 일부의 무덤이 사도섬에 남아 있는 '무숙인의 묘(無宿人の墓)'다. '부랑자의 무덤'으로 한국에도 알려진 이 무덤에 관해 니가타현 관광협회가 운영하는 '니가타 관광 내비게이션(にいがた觀光ナビ)은 이렇게 설명한다.
"1853년에 물 교체 노동자로 일하다가 갱내에서 죽은 무숙자 28명의 출신지·계명(戒名, 사후에 붙이는 이름)·성명·연령을 새긴 묘비가 산중에 세워져 있습니다. 에도를 비롯해 막부 직할지였던 오사카·나가사키에서 1800여 명의 무숙자들이 보내졌습니다. 막부의 치안대책 차원에서 체포된 주소 불명의 사람들입니다. 지나치게 가혹한 노동으로 인해 그들의 수명은 대단히 짧았다고 합니다."
"무숙인의 묘... 지나치게 가혹한 노동으로 수명이 짧았다"
국영이던 사도광산은 제국주의 침략기에 민영 사업장으로 변모됐다. 훗날 대표적인 전범기업으로 활약하게 될 기업이 이곳을 인수했다. 미쓰비시 합자회사가 바로 그 기업이다.
미쓰비시그룹의 핵심 기업인 미쓰비시머터리얼의 홈페이지는 '미쓰비시의 역사' 코너에서 사도광산에 관해 "최대급의 산출량을 자랑했던, 일본의 금의 보고(寶庫)"라고 평가한 뒤, 일본 정부가 금본위제 시대에 대비해 금광 시설을 현대화하는 과정에서 이곳이 미쓰비시에 넘어갔다고 설명한다. "1896년에는 미쓰비시합자회사(우리 회사의 전신)에 불하되고, 사도광산은 급성장을 이룹니다"라고 말한다.
미쓰비시가 인수하기 얼마 전부터 사도광산과 한국인들의 관련성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직 국영으로 운영되던 시절에 이곳을 찾은 한국 유학생들의 발길이 그 출발점이었다.
2000년 3월 <니가타국제정보대학 정보문화학부 기요(紀要)> 제3권에 실린 히로세 데이조 교수의 논문 <사도광산과 조선인 노동자 1939~1945(佐渡鉱山と朝鮮人労働者 1939~1945)>는 광산 직원 자녀들을 기술자로 양성할 목적으로 1889년 1월 설립한 사도광산학교에 조선인 학생들이 있었다고 전한다.
논문은 1892년 4월 제1회 졸업식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제1기생 생도들 중에는 도쿄의 공과대학 학생과 함께 조선 정부에서 파견된 박창규·구연수·박치운 3명이 있다"며 "그들은 일본어 통역관과 함께 수업을 받으면서 근대 광산학을 배웠다"고 설명한다.
한국인 노동자들이 이곳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국권 침탈 뒤인 1910년대부터다. 이 시기에 작성되고 1920년대에 보충된 광산 문건에 따르면, 출신지가 확인된 노동자 685명 중에서 21명이 식민지 한국인이었다고 한다.
일제 침탈 뒤 늘기 시작한 한국인 노역자들... "매우 가혹한 갱내 노동"
일제 침략전쟁이 확대되면서 이곳에는 더 많은 한국인들이 나타났다. 위 논문은 "일본의 전시체제가 진행됨에 따라 미쓰비시광업소 사도광업소는 금 산출, 또한 은 산출의 증산을 위해 나아갔다"며 "이런 증산 체제를 위해 조선인 남성들이 전시 동원됐다"고 말한다. 그런 뒤 이렇게 설명한다.
"1939년 2월부터 1945년 7월까지 '모집', '노무협회 알선'의 형식에 의해 약 1200명이 사도광산에 보내졌다. 이 중에서 약 1000명이 모집 형식이었으며, 그들의 출신 지역은 주로 충청남도였고, 패전이 다가오면서 전라북도로도 확대됐다."
30일자 <연합뉴스> 기사 '일본 사도광산에 강제동원된 조선인 2300명대 추정'에 따르면, 지금은 후쿠오카대학 명예교수인 히로세 데이조 교수는 지난 10월 23일 온라인 강의에서 강제징용된 한국인 숫자를 최소한 2천 명으로 설명했다고 소개한다.
2000년에 발행된 위 논문은 1939년~1945년을 대상으로 했다. 그 뒤에도 히로세 교수의 연구가 계속됐으므로 연구 성과가 진척됐으리라는 점을 감안하면서 2000년 논문과 <연합뉴스> 보도를 비교할 필요가 있다.
위안부 강제동원에서도 나타났듯이, 일본은 모집이나 자원 혹은 알선 등의 형식으로 식민지 출신들을 끌고 갔다. 이같은 외형은 그러나 이들이 노예 상태로 전락된 실상을 은폐할 수 없다. 모집 및 알선 형식으로 사도광산에 투입된 한국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위 논문은 한국인들이 "매우 가혹한 갱내 노동에 종사했다"며 "이 때문에 10명 이상의 사망자, 36명 이상의 부상자가 나왔다"고 한 뒤 "노동 조건을 둘러싼 2건의 쟁의가 발생했고 1943년 6월까지 도망자는 150명 이상이었으며, 그 후에도 사도광산에서 도망자가 잇따랐다"고 알려준다. '무숙인의 묘'에 묻힌 일본인 노동자들의 처참한 운명이 한국인 피해자들에게도 전이됐던 것이다.
이같은 한국인 강제징용을 통해 미쓰비시그룹이 이룩한 성과가 있다. 그 성과가 니가타현 사도시가 발행한 '재발견!! 걷고 듣고 지키자! 사도 금은산(佐渡金銀山)'이라는 홍보 책자에 실려 있다.
이 책자는 "이러한 시설들이 건설됨에 따라 많은 금이 생산되기에 이르고, 1940년에는 사도 금은산 역사에서 가장 많은 연간 1537킬로그램의 금을 생산했습니다"라고 서술한다. 공짜 노동력 덕분에 역대 최고가 됐다고 기술하지 않고, 시설 덕분에 신기록에 도달했다고 서술한 것이다.
착취 통해 자본 축척한 사도광산... 하필이면 이곳이 유산 등재 후보라니
전범기업 미쓰비시그룹이 운영했다는 사실로도 느낄 수 있듯이, 사도광산은 인류에 대한 착취를 통해 자본을 축적한 곳일 뿐 아니라 일본의 세계 침략을 위해 금은을 생산한 곳이다. 그래서 사도광산을 생각할 때마다 일본인들은 죄 없이 끌려간 사람들의 피와 땀이 그곳에서 생산된 금과 은에 서려 있다는 점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도 일본인들은 '코로나 경기 회복'을 위해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서두르고 있다. 일본 기업 MOV가 운영하는 일본 안내 사이트인 '방일 래보러토리(訪日ラボ)'의 7월 26일자 기사 제목은 '경제 효과는 약 520억 엔, 사도 금은산 세계유산 등록을 향한 리포트 발표'다. 사도시가 이로 인해 얻게 될 경제적 파급 효과가 한국 돈 5000억 원이 넘을 것이라고 전망한 것이다.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 등으로 인해 한국인들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를 최근 수년간 일본인들은 충분히 경험했다. 이로 인해 2019년 7월부터 한국 국민들과 일본 정부의 관계는 한층 크게 악화돼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인들은 하필이면 전범기업이 운영했던 사도광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려 하고 있다. 그것도, 경제적 파급 효과를 운운하면서 말이다. 군국주의 침략으로 인해 이웃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에 대해 일본인들이 너무나도 둔감하고 무책임하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