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일제가 우리의 민족성을 말살하고자 경복궁을 비롯한 우리의 궁궐 곳곳을 훼손했다는 것은 이미 많이 알려졌다. 그런데 궁궐뿐일까? 남산이나 장충단처럼 우리에게 남다른 곳들을 비롯하여 여러 곳을 훼손했다.
<서윤영의 청소년 건축 특강>(철수와 영희 펴냄)은 건축물로 톺아보는 '일제강점기'다. 책에 의하면 일제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독일의 제국 국회의사당과 비슷하게 짓는 등 당시 공공건물들을 유럽식으로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제가 고종에 의해 설립된 제중원을 견제하고자 창경궁 후원에 세운 옛 대한의원 건물(현재 서울대학교 의학박물관)을 비롯하여 ▲창경궁 대온실 ▲서울역사로 오래 쓰이다가 2011년 복합문화공간(문화역 서울 284)으로 거듭난 경성역사 ▲해방 후 대법원으로 쓰이다가 현재는 서울 시립미술관인 경성 재판소▲오랫동안 서울시 청사로 쓰였다가 서울도서관으로 바뀐 경성부 청사 ▲현재 예술가의 집으로 쓰이는 경성제국대학교 본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역사기록관으로 사용 중인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 ▲조선은행(한국은행 화폐박물관) 등 서울 곳곳에 현재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 당시 건물들 대부분 유럽식이다.
식민지에 자신들의 것을 주입하는데 급급했을 것, 건물들 또한 일본식으로 짓는 것이 당연하다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유럽식을 따른 것이다. 당시를 그린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100여 년 전 유럽의 풍경과 순간 겹치는 묘한 느낌까지 받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다면, 일제는 왜 공공건물들을 일본식이 아닌 유럽식 건축 양식으로 지었을까?
고종은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유럽 각국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정책을 취했습니다. 제중원도 고종의 후원을 받았습니다. 일제는 이를 견제하고자 1907년 대한의원을 세웁니다. 일제는 창경궁 후원인 함춘원에 병원을 짓기로 하는데, 그중에서도 경모궁이 있던 자리에 병원을 짓습니다. 대한의원은 붉은 벽돌로 지은 2층 건물로 1908년 완공됐으며, 한가운데 높은 시계탑이 설치됐습니다. 이는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시계탑입니다.
일제강점기 지어진 건물 중에는 경성역사나 경성부 청사와 같이 시계탑이 설치된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시계가 당시의 첨단 기기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무척 비싸서 큰 부자가 아니고서는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형 공공건물에 설치된 시계탑은 행인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한양에는 원래 종로 보신각에 큰 종을 걸어두고 정해진 시간에 종을 치는 것으로 시간을 알려주었습니다. 시계탑은 중세를 대체하는 새로운 근대문명의 시작을 상징했습니다. 부정확한 시간 개념에 기인하는 피식민지의 나태와 무질서를 계몽한다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 <서윤영의 청소년 건축 특강> 83~84쪽.
일본은 "일본이 한국을 지배한다"는 논리는 철저히 숨긴 채 "동양에서 먼저 진보한 나라가 아직 그렇지 못한 나라들과 연합하여 서구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야 한다"는 논리로 침략을 정당화했다. 거짓인 만큼 자신들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한편 부각할 뭔가가 필요했다. 기본적으로 일본식은 아니어야 했다. 최대한 진보된 양식이어야 했다. 책에 의하면 그래서 일본이 택한 것이 유럽식 건축. 당시 유럽이 세계의 주류이자 선망이었기 때문이다.
책은 '일제강점기 일제에 의해 지어진 건물들이 왜 일본식이 아닌 유럽식인가?'에 대한 설명을 시작으로 조선총독부 건물을 유럽식 건물 중 하필 독일 제국주의 국회의사당과 비슷하게 지은 이유, 시계탑이나 (덕수궁의) 분수대 같은 건축물에 숨긴 의도, 당시 건축물들과 그에 깃든 세계인들의 생활상, 당시 일제에 대항하며 지었다는 우리의 건축물들과 우리의 일제 잔재 청산 노력 등을 조목조목 들려준다.
사실 일제가 우리의 궁궐 곳곳을 훼손한 사실은 그동안 종종 이야기되었다. 그런데 역사적인 측면에서 이야기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경복궁 흥례문을 헐고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었다던가,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덕수궁을 미술원으로 만들어 버린 것 등 이미 많이 알려졌거나 겉에 드러난 일부분만 되풀이하듯 이야기된 경우가 많다.
또한, 현재 서울대학교 의학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옛 대한의원 건물이나 옛 경성 재판소 건물 등 서울 곳곳에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 공공건물들에 관한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더욱이 그 건물들을 언제, 누가, 어떻게 지었으며, 어떤 과정과 변화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는지는 모르는 이들이 더 많다.
1936년 일제는 석조전(덕수궁) 서쪽에 별관을 하나 더 지어 미술관의 규모를 키웁니다. 1937년에는 석조전 앞에 분수대를 설치했습니다. 분수는 상징성이 매우 강한 시설물입니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로마 제국이 속주를 개척할 때 식수를 확보하고자 우물을 파고 음수대를 만든 것에서 유래합니다. 물이 귀한 유럽에서 음수대를 만들어 시혜를 베풀면서 제국의 힘을 과시했고, 또한 이것은 세금 징수의 명분이 되기도 했습니다. - <서윤영의 청소년 건축 특강> 59~60쪽.
건축물로 읽는 일제강점기이다. 그런 만큼 서울 곳곳에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 당시 공공건물들과 조선철도호텔(현 웨스틴조선호텔)이나 미츠코시백화점 경성점(현 신세계백화점)처럼 민간 자본에 의해 지어진 건물들, 남산에 지어졌던 조선 신궁이나 고종에 의해 조직된 별기군이 훈련하던 곳에 지었다는 경성운동장, 장충단에 지은 이토 히로부미 추모사찰인 박문사 등처럼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건축물에 얽힌 것들을 들려준다.
책 제목에 '건축'이란 용어가 들어갔기 때문일까. 얼핏 다소 딱딱하거나 건조한 내용의 책으로 지레짐작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관련 최근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이 되었다. 인용처럼 관련 지식이 없는 데다가 무심코 지나치기 일쑤였던 시계탑이나 분수대 등 건축물들에 얽힌 흥미로운 사실들을 일제강점기 역사와 녹여 설명해주고 있어서 당시가 한결 쉽게 이해됐기 때문이다. 조각조각 알고 있던 당시를 나름 정리해보기도 할 정도로 말이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할 무렵 여론이 분분했다. 철거하는 것이 맞다와 그대로 두고 당시를 기록하자는 상반의 여론이었다. 그렇다면, 창경궁의 동물들은 이사시키면서 당시 지어진 '창경궁 대온실'은 왜 그대로 두었을까? 조선총독부 건물은 철거하면서 다른 건물들은 왜 그대로 두었을까? 당시 건축물을 둘러싼 현대적 해석까지 폭넓게 다뤄 더욱 인상 깊은 책이 되었다.
현재의 DDP(동대문 플라자) 자리에 있었다는 경성운동장에서는 오늘날 지역에 연고를 둔 프로축구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경평전(1930년, 경성:평양)이 인기리에 열리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앞선 조선 시대에는 고종이 조직한 별기군이 훈련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군사를 훈련하던 곳이 오늘날 어떻게 패션의 주류지가 되었을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을 인용한다. 일제강점기를 최대한 제대로 알음으로써 바람직한 역사관을 갖는 청소년들이 많아지길 기대하며.
그곳은(동대문 근처) 원래 훈련원 터여서 주변에 군인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직업군인인 이들은 돈이 아닌 옷감으로 봉급을 받았습니다. '방군수포제'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조선 후기 모병제를 실시했는데, 군대를 가지 않는 사람은 대신 세금으로 베를 냈습니다. 이는 군대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경비와 군인들 봉급으로 사용됐습니다. 군인 가족은 이 베를 팔아서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샀습니다. 이 때문에 동대문 주변에는 훈련원 가족이 내다 파는 옷감이 많았고, 솜씨가 좋은 사람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댕기나 버선, 띠, 대님 등을 만들어 팔았는데, 이를 직뉴업(織紐業)이라 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자본이 밀려오기 시작하자 가내 수공업 형태로 일하던 이들 직뉴 업자들이 모여 1910년 경성직뉴회사를 만들고 이듬해인 1911년에는 주식회사로 전환합니다.(...)조선 시대에 시작된 의류 가공업의 맥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고, 지금도 동대문에는 소규모 의류공장이 많습니다. 이곳을 의류 디자인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발상으로 지어진 것이 DDP(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입니다. - <서윤영의 청소년 건축 특강> 124~1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