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완은 신간회가 3ㆍ1혁명에서 다하지 못한 자주독립의 꿈을 이루고자 헌신하였다. 임시집행부의 부의장과 전형위원ㆍ총무간사 그리고 지방에 설립된 지회를 안재홍ㆍ홍명희ㆍ신석우 등과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격려하고 연설하였다.
그는 우선, 1927년 8월 8일에 있었던 신간회 개성지회 창립대회에 참석하여 신간회 취지에 관한 연설을 하였고, 이어서 1927년 10월 29일에 있었던 광주지회 창립대회에 참석하여 취지 설명 및 신간회의 현황과 각 지회 분포상황을 보고하였다. 뿐만 아니라 1927년 12월 10일에는 경성지회 정기대회에서 임시집행부의 부의장 및 전형위원으로 선출되어 중요한 일정을 소화하였다.
또한 같은 달 20일에는 신간회 평양지회 창립대회에도 참석하여 본부 대표로서 신간회의 취지연설을 하였다. 이렇듯 박동완은 신간회 창립 당시부터 조직, 운영과 핵심지부 설립에 있어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주석 2)
일제는 전국단위 규모의 신간회 활동을 방치하지 않았다. 총독부가 추진한 민족개량주의 노선을 기대했으나 조직과 활동이 반일주의로 기울자 분열 공작과 해체공작에 나섰다. 내부에서도 이념과 노선의 차이에 따라 차츰 해소론이 제기되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면서 신간회 간부들은 이를 민족ㆍ민중운동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같은 해 12월 13일 민중대회를 개최키로 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신간회 간부ㆍ회원 44명을 구속하면서 내부에 갈등이 심화되고 각 지회에서 해소론이 제기되었다.
신간회 - 지회의 해소론이 제기된 이유 중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① 신간회의 조직형태가 정당적 형태로 되어 있다는 점이고, ② 강령이 추상적이며 구체적 투쟁지침이 없어 오히려 노동ㆍ농민운동을 말살시킨다는 것이며, ③ 객관적 정세가 급격히 변하였고 주체적 조건이 이에 조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급격히 변한 정세란 1929년의 세계공황과 일본의 만주에 대한 침략을 말하는 것이고 주체적 조건의 성숙이란 전투화되고 일층 혁명화한 노동운동의 증대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이 세 가지 이유 중 앞의 두 가지는 신간회 내부에서 이미 1927년 말부터 논의되어 온 문제였고 세 번째의 정세 변화에 대해서는 이미 코민테른의 '9월테제'에서 이를 반영하고 있었다.
또한 각 지회에서 사용되었던 해소운동의 방향제시나 그 용어 등이 '12월테제'나 조선공산당 관계자들의 당 재건이론에서 사용되던 것과 동일하였다. 따라서 해소론의 논리적 구조 또한 이들과 관계가 깊었다. 신간회 해소에 이론적 기초를 제기한 것으로 알려진 '12월 태제'는 코민테른 제6회 대회의 '식민지의 민족혁명'이라는 의제에서 논의된 내용을 기초로 한 것이다. 그러나 '12월테제'에서도 코민테른의 민족ㆍ식민지에 있어서의 반제연합전선론의 의의는 변함이 없었다.(이현주, <신간회>)
신간회는 1927년 2월 창립되어 1920년대 후반 국내 민족운동의 중추적인 열할을 수행하다가 4년 3개월 만인 1931년 5월 16일 해체될 때까지 국내 민족협동전선의 최고기관으로 활동하였다.
국내의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이념적ㆍ사상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동단결하여 항일전선을 구축하고, 이후 좌우협동과 합작에 의한 민족유일당ㆍ민족단일당 결성운동 등에 큰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다만 신간회 해소 과정에서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고, 그 지침에 따라 움직인 것은 애석한 일로 평가되었다. 박동완은 힘써 키워온 신간회가 분열상을 보이자 수습에 나섰으나 여의치 않고, 여기에 총독부의 개입이 심해지면서 1928년 고국을 떠났다.
주석
2> 박재상ㆍ임미선, 앞의 책, 171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대표 33인 박동완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