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용일은 6·25전쟁 막바지인 1953년 7월 강원도 제암산 전투중 중공군에 생포돼 북으로 끌려간 국군포로다.
1931년 8월생인 전씨는 고향인 경북 영천군 신영면에서 농사를 짓던 중 전쟁이 터지자 만 19세의 나이로 입대해 6사단 19연대 3대대 2중대 2소대에서 복무했다. 전씨의 군번은 0347876번. 1953년 8월 16일 실종자로 분류된 후 사흘 뒤 전사 처리됐다. 당시 계급은 일병이었다.
국군포로는 6·25전쟁의 휴전협상 과정에서 북측에서 송환하지 않은 국군 실종자를 일컫는다. 남한에서 전사자로 처리돼 전씨의 이름이 잊혀져가는 동안 포로가 된 그는 평남 강동 포로수용소, 성천 광산수용소 등을 거치며 교화 교육을 받았다. 교육을 마친 후 1956년 6월에 수용소에서 석방돼 함경북도 무산군 광산 노동자구에서 광부로 일했다. 그곳에서 결혼해 부인(1992년 사망)과의 사이에 2남 1녀를 뒀다.
2003년 5월에 아들과 함께 탈북해 중국 베이징으로 이동했으나, 8월말 아들이 중국 공안에 의해 체포돼 북송됐다. 같은 해 9월 중순에 베이징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을 찾은 그는 국군포로 신분을 밝히고 귀국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국방부가 전사자 명단이 아닌 국군포로 생존자 명단만을 확인하고 "전씨가 명단에 없다"는 내용을 대사관에 통보하는 바람에 일이 꼬였다.
대사관측의 미온적인 행동에 실망한 그는 같은 해 11월 13일에 항저우 공항에서 위조여권을 소지한 채 항공편을 이용하려다 중국 공안에 체포됐으며 북송을 위해 북한과의 접경지역인 투먼의 한 수용소로 이송됐다. 하지만 국군 포로라는 신분이 알려지고 그의 북송을 막아야 한다는 국내외 여론이 일면서 제3의 장소로 옮겨져 조사를 받았다.
그가 국군포로임이 확인되자 대한민국 외교부는 중국에 요원을 급파하는 등 본격적인 송환 노력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뒤늦게나마 그의 호적등본 등을 중국 정부에 전달하고 외교채널을 통해 우리의 입장을 전하는 등 북한으로의 송환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를 빗대어 여러 언론들은 "국가가 외면한 그를 국민 여론이 구했다"고 평했다.
그는 그해 크리스마스 전날인 12월 24일에 대한민국에 입국했으며, 2004년 1월 19일에 참전 당시 소속 부대였던 6사단에서 하사로 퇴역하고 귀향했다. 2008년 7월에 사망 후 국립대전현충원 사병 3묘역에 안장됐다.
한국전쟁 참전 5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노병 전용일에게 한국전쟁은 반세기에 걸친 기나긴 전쟁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전쟁은 끝났다'고 단언할 수 없다. 남북은 화해하고 교류하려는 노력을 해왔지만, 군사적 긴장은 여전하고 정전협정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으며, 평화협정은 아직 미래의 일로 남아있다. 그가 귀환 과정에서 겪은 우여곡절은 그런 현실을 이미 잘 드러냈다.
북한은 지금까지도 국군포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당시 유엔군(미국 측)이 억류하고 있는 포로가 11만 명 정도인 반면, 공산군이 억류하고 있던 포로는 8만 명 정도였다. 이에 유엔군은 양측 1:1교환을 제안했으나 북한은 반대하고 강제송환 원칙에 의한 포로 전체의 송환을 주장했다. 그러자 유엔군 측은 포로 본인의 의사를 심사해 송환을 원하는 포로만 교환하자는 '자유송환' 원칙을 제안했다.
결국 양측은 귀국희망 포로는 송환하고 귀국반대 포로는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인계해 그 의사를 확인토록 하고, 여기에서 결정되지 않은 포로들은 '정치회의'에 넘기며 정치회의에서도 결정되지 않은 포로들은 민간인으로 석방하도록 합의했다. 이에 따라 남한에 억류됐던 공산군 포로 8만3000여명(북한군 7만6000여 명, 중공군 7000여 명)이 귀환했고, 북한에 억류됐던 유엔군 포로 1만3469명(한국군 8343명, 유엔군 5126명)도 귀환했다.
유엔사 자료 등에 따르면 정전협정 후 공산군에 붙잡힌 국군포로 중 8343명만이 인도되고 8만여 명은 북한에 억류됐다. 이들은 대부분 북한에서 수용소를 거쳐 탄광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생존자는 560여 명으로 가장 최근인 2014년에 파악된 숫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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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국군포로 1호 조창호 중위는 서울현충원에
우리나라 귀환 국군포로 1호(1996년 10월)로 기록되는 조창호 중위(예편)는 지난 1994년 탈북했다. 그해 10월 24일 국군수도통합병원, 64세의 노병 조창호는 탈진한 몸을 병상에서 일으켜 이병태 국방부 장관에게 귀환 신고를 했다. "육군소위 조창호, 군번 212966, 무사히 돌아와 장관님께 신고합니다."
해골 같은 모습에 목소리는 힘이 없고 떨렸지만 '이것이 참군인의 모습'이라는 것을 세상에 일깨워줬고, 전후 50년 동안 국민도 국가도 잊고 있었던 '국군포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청천벽력의 함성이었다. 국군포로는 탈북 귀환하면 현역병으로 제대 전역식을 치른다. 북에 있는 국군포로는 미귀환 '현역 국군 장병'이다.
조창호씨는 국립현충원을 찾아가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위패를 지우며 스스로를 '돌아온 사자(死者)'라고 불렀다. 이후 현역, 예비역 단체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43년 포로생활을 고발하는 강연활동에 열중했고, 국군포로 송환과 북한의 열악한 인권에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통일부, 국방부 등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불편한 몸이었지만 지팡이에 의지한 채 미국의회 청문회 초청에도 응해 국군포로와 북한인권 실태를 고발하기도 했다.
'전쟁 영웅' 조창호는 2006년 11월 19일, 북한에서의 오랜 노역으로 얻은 지병이 악화돼 76세(향군장)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충혼당에 안장됐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미디어마당사회적협동조합 누리집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