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개인적으로 이 보고서를 안 내면 퇴사해야할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걱정도 했다."
딜로이트 안진(아래 안진) 출신의 전직 회계사 오아무개씨는 2015년 5월 22일, 자신의 팀에 '합병비율 검토보고서'를 의뢰한 삼성물산 측 우아무개 부장을 만나고 난 뒤 딜레마에 빠졌다. 삼성 측이 요청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 합병 적정 비율을 시가총액을 봤을 때 도저히 "맞출 수 없다"며 대안을 제시하자, 우 부장이 "이런 보고서는 필요 없다"며 역정을 냈기 때문이다.
1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5-2부(부장판사 박정제·박사랑·권성수) 심리로 열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불법 승계 의혹 재판에서 언급된 한 대목이다. 새해부터 다시 시작된 이 부회장의 재판은 오씨의 등장으로 새 국면을 맞게 됐다. 지난해 증인으로 출석한 인물 대부분이 삼성 출신이거나, 현직 '삼성맨'인 합병 실무 책임자들인 점을 감안하면, 삼성과 연고도 없고 현직에 있지도 않은 오씨는 다른 증언을 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다.
특히 그는 이날 재판에서 지난 2020년 연말 안진을 퇴사한 배경을 묻는 검찰 질문에 "(불법 승계 의혹 재판) 대응과 관련 제 입장과 다른 부분이 있었다"면서 "회사에선 (합병비율) 평가 업무에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대응했고, 결국 제가 반대 의견을 내 퇴사했다"고 말했다.
삼성 뜻대로 합병비율 '1 대 0.35'로 맞춘 보고서
오씨가 자신의 거취를 고민할 정도로, 고객인 삼성은 "당혹스럽고 두려운" 대상이었다. 검찰에 따르면, 안진 측은 결국 고객 뜻대로 제일모직에 유리하고 삼성물산에 불리한 합병비율 '1 대 0.35'가 적힌 약식보고서를 이사회 바로 직전인 2015년 5월 25일 오후 11시 제출했다. 보고서 작성을 시작할 때부터 삼성물산 측의 '배임 가능성'을 우려했지만, 이 보고서는 결국 삼성물산 대주주인 국민연금이 종국에 합병을 찬성하게 하는 근거로 활용됐다.
오씨가 합병비율 문제를 우려한 대목은 보고서를 도출하기 위해 팀원과 나눈 이메일 곳곳에서 등장한다.
"이재용 부회장님은 제일모직의 지분만 가지고 있고, 국민연금은 삼성물산 지분만 가지고 있어서... 국민연금이 합병비율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도 있을 것 같네요."
"삼성물산 입장에선 순자산 가액보다 낮은 금액으로 만드는 것이 딜레마인데요. 제일모직을 뻥튀기하는 것이 더 딜레마에 빠질 것 같습니다. (중략) 우리 법인의 문제를 떠나 자문을 받는 고객에게도 도움이 전혀 안 되는 상황입니다."
"삼성물산 내부 보고자료 만들면서 자사 본질 가치가 주가보다 더 낮다고 하면 어떻게 의사결정 자료를 쓸 수 있나요? 배임을 공식화하는 것밖에 안됩니다."
어떻게든 적정 비율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한 흔적도 등장했다. 삼성물산의 가치를 낮추는 대신, 제일모직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제일모직의 바이오 사업 및 유휴토지(개발 예정인 땅)에 대한 평가를 요청했으나, 목표 가치의 절반을 채우기도 힘든 숫자가 나왔다. 오씨는 "더이상 (보고서 발행을) 진행하지 않고, 시가총액의 괴리를 설명할 수 없다고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고 증언했다.
오씨는 '울며겨자 먹기'식 보고서가 제출되기 직전 양사 합병을 자문한 삼성증권 측 실무자의 접근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실무진에게 현 수준으로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했는데, 삼성증권 측 이아무개 부장이 급히 내게 와서 (제일모직 측 합병비율 보고서 의뢰사인) '삼정KPMG 결과 나왔는데 보내드릴까요'라고 했고, 볼 시간이 없다고 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나 이 보고서(삼정KPMG 보고서)는 결국 안진 측 실무자인 김아무개 이사에게 전달됐다. 합병 경쟁사의 합병비율 보고서를 참조해야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오씨는 "우리가 보고서를 못 맞춘다고 하니, (삼성증권 측이) 삼정 결과를 보여주려 한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삼성증권 측 이아무개 부장은 지난 공판에서 "선의로 결과 값을 알려줬을 뿐"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오씨가 받아들인 분위기와는 다른 맥락이다. (관련 기사 :
휴정 때 검사 어깨 두드린 이재용, '억지 합병비율' 파고든 검찰 http://omn.kr/1udw3)
고민에 빠진 오씨는 삼성물산 대신 합병을 주도한 미래전략실 관계자에게 연락했다. "무리한 합병 비율을 맞추면 보고서에 제약사항을 기재할 수밖에 없고, 그런 보고서를 제공하는 것은 나중에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우려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오씨는 ▲ 제일모직 패션사업 가치가 상당히 높게 평가 돼있고 ▲ 삼성물산의 건설부문 매출액이 제일모직의 같은 사업보다 10배 크지만 평가액이 비슷하게 나왔으며 ▲ 제일모직의 바이오 지분가치 사업계획을 받지 못한 상태로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제약사항을 보고서에 담았다.
검찰은 "이는 사실상 해당 보고서를 신뢰하기 어려우니 시장 참여자들이 주요 의사결정을 할 때 참고용으로도 사용하기 어려운 수준이라는 걸 보여주는 게 아닌가"라고 물었고, 오씨는 "이 정도도 안 넣으면 보고서를 낼 수 없다고 판단했고 (참고용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이런 제약을 달았다"고 말했다.
오씨는 엘리엇의 등장으로 합병 성사가 불투명해진 상황에서 다시 삼성 측으로부터 자문 요청을 받았지만, 두 차례 거절했다고도 밝혔다. "제대로 된 보고서가 아니기 때문에 대응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는 관련 보고서 내용으로 자료 대응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후 자문에 참여했다.
한편, 이 부회장 및 미래전략실 측은 다음 주 공판부터 오씨에 대한 반대신문을 이어간다. 검찰 측 주 신문 일정까지 고려하면, 1월 한 달은 오씨에 대한 증인신문으로 내내 이어질 전망이다. 불법 승계 의혹의 뇌관 격인 '합병 비율 적정성' 여부에 대한 당사자 증언인 만큼, 변호인 측의 반대 논리도 주목된다. 오씨 이후엔 관련 작업에 함께 참여한 김아무개 회계사가 증언대에 설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