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완은 시대를 절망하면서 '길이 없는 길'을 찾아나섰다.
식민지 조선 사회는 마치 봉인된 병속에 갇힌 물고기의 운명이었다. 그는 3ㆍ1혁명을 주도한 대표의 일원으로서 역사에서 부여된 책무를 다하지 못하더라도 구도자의 신분이라도 지키고 싶었을 터이다.
고국을 떠나기로 했다. 시대를 내다보는 심원하고 예리한 통찰력은 아니라도 향후 국제질서는 미국이 큰 역할을 할 것으로 짐작되었다. 일본의 파충류적인 영토야망은 중국을 넘고 더 나아가 태평양을 건널 것으로 관측되었다.
국내에서 신간회운동의 한계, 남산신궁 축성으로 상징되는 기독교 탄압 등 활동의 공간이 사라져갔다. 최남선이 1928년 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 촉탁이 된 것도 견디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점차 시들어가는 마음을 토닥거리며 찾는 길이 하와이행이었다, 만주나 러시아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육신이 추위를 버티기 어려웠다.
그가 망명 또는 이주ㆍ이민의 지역으로 하와이를 택한 것에는 연고도 있었다. 이제껏 열성으로 활동해온 흥업구락부는 이승만이 조직한 미주 대한인동지회의 자매단체 성격을 갖고 있었다. 대한인동지회는 1921년 7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설립되었다. 국내에서 흥업구락부가 결성되기 전, 그러니까 그가 <기독신보> 주필이던 1923년 6월 하와이 거주 한인학생들의 고국 방문이 있었다. 이에 그는 <하와이 재류(在留) 우리 학생의 고국 내한에 대하여>란 사설을 썼다.
하와이 와히아와 한인기독교회에서 초청장이 왔다. 세워진지 9년 동안 전임목사가 없는 교회에서 담임목사가 되어 달라는 요청이었다. 하와이 한인들은 기독교인으로서 3ㆍ1혁명의 민족대표로 활약하고 출감 뒤에도 줄곧 민족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그를 주목했던 것이다.
마침내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1919년에 세워졌으나 9년 넘게 전임 목사 없이 시간제 목사가 시무를 대신하고 있던 하와이 와히아와 한인기독교회(Wahiawa Korean Christian Church)에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당시 하와이의 민찬호 목사와 한국의 임두화 목사의 주선에 힘입은 바가 컸다. 하와이 동포를 대상으로 목회를 하고자 했던 것은 그의 오래된 숙원이기도 하였다. (주석 3)
박동완은 1928년 8월 25일 많은 동지들의 송별을 받으며 서울을 떠났다.
"조선사회 각 방면으로 활동을 많이 하던 박동완 씨가 얼마 전 하와이 재류 동포들의 예수교의 목사가 되어 25일 임시 하와이를 향하여 동 오전 10시 10분 다수의 동지들의 송별리에 경성역발 경부선 열차로 발정(發停)하였다더라." (주석 4)
이로 미루어보아 그는 공개리에 미국행을 택했던 것 같다. 망명ㆍ이민ㆍ이주의 복합적인 모습이다. 총독부로서는 귀찮은 인물이 스스로 떠난다기에 방치했을 것이다. 그래서 여권이 발급되었다. 국내에서 언론 기고나 민족운동에 참여하여 물의를 일으키는 것 보다 이역멀리 떠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했을 터이다. 막을 방법도 없었다. 일제가 가장 눈치를 봐야하는 곳이 국제 기독교 세력이었다. 미국령 하와이의 교회에서 초청하는 일이라 개입도 어려웠다.
박동완은 서울역에서 기차로 부산에 도착하여 선편으로 45일이 지난 10월 8일 하와이에 도착했다. 가족을 남겨둔 채 홀로 떠난 길이다.
1919년 약 20명의 한인들에 의해 시작된 와히아와교회는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의 분(分)교회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한인기독교회는 일종의 독립교회로, 어느 교단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원래 호놀룰루의 한인감리교회 소속이었던 한인기독교회 교인들은 당시 한국학교 설립과 항일 독립투쟁을 위한 기금 마련에 힘을 쏟았는데, 교회의 기금이나 재산 등이 미국 감리교회 관할 아래 있었기에 제재를 받게 되었다.
이에 애국심이 강한 몇몇 교인들은 그러한 간섭을 피하고자 기존의 감리교회에서 이탈할 마음을 품었다. 이들은 그 전에 이미 같은 원인으로 교회를 떠나있던 이승만 박사에게 독립교회의 설립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동기로 인하여 1918년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가 설립되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오아후 섬의 와히아와, 하와이 섬의 힐로, 마우이 섬의 파이아에 분교회가 서게 되었다. (주석 5)
주석
3> 박재상ㆍ임미선, 앞의 책, 69쪽.
4> <동아일보>, 1928년 8월 27일.
5> 박재상, 임미선, <근곡 박동원의 국내 및 하와이에서 행한 기독교민족운동>, <현상과 인식>, 2019년 가을호.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대표 33인 박동완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