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9일 제주4.3사건 희생자에 대한 국가차원의 보상 기준을 규정한 '제주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일부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민간인 집단 희생 과거사 사건 중 법원 판결이 아닌 국회 입법으로 피해 보상을 해주는 사례는 제주4·3사건이 처음이다. 국가에 의한 폭력은 돈으로 모두 회복될 수 없다. 하지만 당시 제주에서 삶을 살아갔던 이들은 어떤 폭력의 순간들을 통과했는지 우리는 선명하게 기억해야 한다. 1940년에 태어나 1948년 4.3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었지만 삶의 끈을 놓지 않았던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는 이유이다. 글은 엄마의 시점에서 서술했다.[기자말] |
인생 怒: 제주 4.3
저는 4.3을 표현 안 하려고 해요
왜냐하면 너무 치욕적이었기 때문에
자녀들 앞에서도 일절 안 꺼내요
그것이 잘못인 줄 알면서도 말하고 싶지 않아요
마음이 너무 아프니까 분노는 그래서 어두운 색을 칠했고
밑에는 두 주먹 꾹 쥐고 인내하는 모습을 그려봤습니다.
분노
4.3에 대해 표현할 수 없는 그 서러움들이 많으니까
누구한테 얘기를 전혀 못 하고
자식들한테도 아무 얘기도 못 했어요
나 혼자 이렇게 먹구름 낀 마음으로 슬픔을 껴안고
여기까지 견뎌온 거를 표현한 거예요
자녀들과 맞대 앉아서 말하지 못할 것 같아서
나중에 글로 한번 써서 전해줘야겠습니다.
(2021 4.3트라우마센터 예술치유프로그램 작품집 2에 실린 글과 그림)
우리 가족이 두 번째 피난을 떠난 것은 외할머니 죽음 이후였다. 특히 나의 고종사촌이 집으로 자주 찾아와서 아버지에게 분위기가 너무 흉흉하니 산으로 가자고 여러 번 설득했던 기억이 난다. 제주도에 11월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마을 사람들은 모두 공포에 떨고 있었다. 빨갱이 가족이라는 지목을 받으면 언제 어디로 끌려갈지 혹은 죽음을 당할지 모르게 되었다. 게다가 우리 집은 이미 외가 쪽이 빨갱이 집안으로 찍혔기에 어떤 수난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통령령 제31호
제주도지구 계엄선포에 관한 건
제주도의 반란을 급속히 진정하기 위하여 동 지구를 합위(合圍)지경으로 정하고 본령(本令) 공포일로부터 계엄을 시행할 것을 선포한다.
계엄사령관은 제주도 주둔육군 제9연대장으로 한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p. 279, 제주4 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2003)
고종사촌은 '언제 잡혀갈지도 죽을지도 모르는 여기서 공포에 떨면서 사느니 산으로 올라가자. 산에 가면 산사람들이 지어놓은 집도 있고 먹을 것도 배급을 해준다. 여기보다 훨씬 살기가 나을 것'이라며 아버지를 설득했다.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한 막내와 병약한 아내,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피난길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한동안 마음을 결정하지 못했던 아버지는 고심 끝에 결국 피난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한겨울 엄동설한에 우리 가족은 집에서 키우는 말과 소를 끌고 막내 동생을 등에 업고 산으로 올라갔다.
산으로 올라간 우리 가족... 오빠와 막내는 결국 죽고
지금 떠올려봐도 너무나 고통스러운 피난길이었다. 사촌이 말한 대로 산에 올라갔지만 우리가 살 집이 마련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가 머물 적당한 동굴을 찾아 짐을 풀었다. 산사람들이 조 같은 식량을 나눠주면 제대로 요리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삶아서 먹었다. 어린 아이들이 그것을 그대로 먹고 변비에 걸렸다. 똥구멍으로 나오지 못한 똥으로 아파하는 아이들의 울음 소리가 동굴에 퍼졌다. 동굴 속에서 마주한 추위와 배고픔도 문제였지만 여기저기서 울려대는 총소리, 언제 어떻게 토벌대들이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공포와 두려움이 사실 더욱 우리 가족을 힘들게 했다. 총소리가 잠잠해질 무렵이면 오빠와 언니가 나가서 토벌대의 눈을 피해서 물을 길어왔고 그 물로 간신히 우리 가족들은 목마름을 달랬다.
당시 제주도지구전투사령관 유재흥씨 증언
제주도에 가보니까 산중에 피난민 2만 명 정도가 있었어. 그리고 바닷가에는 경찰 군인이, 산쪽에는 공비하고 피난민이 있는 등 서로 갈라져 있으면서 밤이 되면 욕하고 싸우는 상황이었어. 그래서 나는 '군인은 무조건 산으로 올라가라, 공비토벌 해야 한다'며 3개 대대와 1개의 유격대대 등 4개 대대를 한라산 중복지역으로 이동시켰어. 처음에는 각기 전투지역이 있으니까 각 대대가 다니면서 소탕을 했고, 마지막에는 내가 4개 대대를 기동시키면서 작전을 했지.(같은 책 p. 279)
하지만 지난회에서 이야기했듯이 토벌대들이 점점 가까이서 우리를 옥죄여 오는 가운데 막내 동생은 동굴 안에서 싸늘하게 시체로 변했고 다른 동굴로 옮기는 중에 큰 오빠는 토벌대의 총에 맞아 피범벅이 된 채 죽음을 맞이했다. 아들과 막내를 잃은 아버지는 자수를 택했고, 자수의 결과는 혹독한 고문과 언니의 형무소행으로 이어졌다. 산에 계속 남아 있기로 선택했다고 해서 더 나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토벌대에게 끌려 내려오거나 그들의 총구에 죽임을 당하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언니는 당시 산에서 내려와 주정공장에서 취조를 당한 수많은 사람들처럼 대답을 제대로 못했다는 이유로 아직 스물도 채 안된 열아홉 나이에 육지 형무소로 끌려갔다. 당시 언니는 옆 동네 다랑곳 마을의 사람과 혼인을 약속한 상태였다. 나중에 확인을 해보니 언니의 약혼자였던 사람도 육지 형무소로 끌려갔다고 했다.
몸이 약한 엄마를 대신해서 우리 집의 살림을 도맡았었던 언니는 나와 우리 형제들에게는 엄마보다 더 의지가 되었던 사람이었다. 그토록 나에게는 큰 우산이었던 언니가 갑자기 죄인이 되어서 육지 형무소로 끌려갔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내가 붙잡고 의지했던 큰 기둥 하나가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언니가 사라졌다고 해서 나까지 무너질 수는 없었다. 열 살을 갓 넘긴 내가 언니의 역할을 이어서 감당해야 했다.
산사람들의 침입을 막기 위한 돌 성을 쌓는 노역에 강제로 동원되었던 마을 사람들은 돌성이 완성되자 의무적으로 보초를 서야만 했다. 마을의 청년들 상당수가 산에 올라갔거나 형무소로 끌려갔거나 토벌대 손에 죽은 상태였기 때문에 나 같은 어린애도 보초를 서는 순번에 들어갔다. 마을 사람들은 성 밖에 있는 밭에 나갈 때나 밭일을 끝내고 집이 있는 성 안으로 들어올 때 증명서를 보여주어야만 출입을 할 수 있었다.
보초를 서는 일은 꽤나 고역이었고 어린 나이에 졸음을 못 참아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보초를 서는 우리들을 감시하기 위해 순찰을 돌던 순찰대원들이 졸고 있는 나에게 한바탕 욕을 퍼부었던 기억도 난다. 보초를 서는 와중에 성 밖 동산에서 생목소리로 연설하는 산사람들의 모습을 보기도 했다. 산사람들은 몇 사람씩 짝을 지어 내려왔는데 그 중에 칼칼한 목소리로 야무지게 연설하던 젊은 여자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중에 아버지에게 들으니 작은할아버지네 며느리인데 원래부터 야무지다고 마을에서는 소문난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넋 놓고 그 연설을 듣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산사람들의 모습이라도 보일라치면 나는 재빨리 동네 안으로 뛰어가서 정보원에게 산사람들이 내려왔다고 알려야만 했다.
형무소 바닥에서 생사를 달리한 언니
아버지는 비록 허술한 집이지만 집이 다 지어지고 가족들이 비와 눈을 피할 수 있는 안정적인 거처가 마련되자 언니의 소식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지금 떠올려보면 아버지는 언니만은 반드시 지켜내고 싶었을 것이다. 당시 열 살이었던 나는 가까운 이들의 비현실적인 죽음을 두리뭉실하게 덮어버리거나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나의 괴로움만 컸지 어머니와 아버지의 마음까지 헤아릴 수 없었다. 나이가 들고 부모가 되고 나서 나는 당시 어머니와 아버지가 겪었을 그 고통의 모양과 무게에 대해 흐릿하게나마 짐작해 본다.
제주4 3사건으로 인해 일반재판과 군법회의를 거쳐 징역 금고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은 전국 각 지역 형무소에 분산 수감되었다. 일반재판 수형인들은 주로 목포 광주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군법회의 대상자들은 곧바로 서대문 마포 대전 대구 목포 인천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같은 책 p. 468)
아버지는 형무소로 끌려간 딸의 행방을 알아보기 위해 눈에 핏발이 서도록 사방팔방으로 언니 소식을 알아보고 다녔고, 간신히 언니가 어느 형무소로 이송되었다는 구체적인 정보를 얻어냈다. 하지만 군사재판으로 범죄자가 된 언니의 운명을 평범한 아버지가 어떻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이어져 들려온 소식은 아버지를 더욱 큰 절망에 빠트렸다. 언니가 결국 형무소에서 생사를 달리했다는 소식이었다. 스물이 되던 해 언니는 차가운 형무소 바닥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은 것이다. 하지만 언니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것이 병이었는지 고문이었는지 총살이었는지 누구도 정확한 내막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우리 가족은 언니의 죽음이라는 결과만 전해듣게 되었다.
4 3사건 관련 재판을 받았던 상당수의 사람들은 벌금형 구류 집행유예 등을 언도받았지만, 금고 징역 등의 실형을 언도 받은 사람들은 제주도에 형무소가 없었기 때문에 전국 각지 형무소에 분산 수감되었다. 이들 형무소 재소자들은 형기를 채우고 출소하기도 하였지만, 열악한 형무소 수감 환경 때문에 옥사하기도 하였고, 상당수가 1950년 6 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불순분자를 처분하라는 상부 명령에 따라 총살당하였다. (같은 책 p. 442)
아버지는 언니의 시신이라도 거두겠다며 육지로 나갈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급하게 가지고 있던 밭을 내놓았다. 급하게 돈을 마련하려다 보니 아버지가 내놓은 밭은 제 값을 받지 못하고 팔렸고 여비를 마련한 아버지는 육지로 나갈 채비를 마쳤다. 하지만 아버지의 그러한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6.25로 인해 육지로 나갈 길이 막혀 버린 것이다. 결국 아버지는 언니의 시신을 거두지 못했다.
2003년 4.3 평화공원이 만들어지면서 시신 없는 언니의 묘도 세워졌다. 언니의 묘비에는 '김순정, 제주읍 이호리 1558번지, 1931년 5월1일 출생, 1950년 6월 하순경 호남지역에서 행불'이라고 새겨졌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언니처럼 수형인으로 육지로 끌려간 이웃마을 약혼자 역시 끝내 행불인이 되었다고 한다. 전쟁이 다 끝나고 우리 가족과 언니 약혼자 가족은 비록 혼인을 약속한 두 사람이 세상에 없지만 혼인식을 치른 것으로 하였다. 그 이후 언니의 제사는 그 집에서 지내고 있으며 4.3 희생자 등록도 그 집안에서 맡아서 하고 있다. 저 세상에서라도 언니와 형부가 만나 이승에서 못다 이룬 가정을 이뤘기를 바란다.
전쟁 발발 당시 전국 형무소 재소자는 37,335명이었고, 이 중에 평택 이남의 형무소 재소자는 20,229명이었다. 제주에서 이송된 4 3사건 관련 재소자는 일반 재판 수형인 200여 명과, 두 차례 군법회의 대상자 중에 만기출소한 사람205)을 제외한 2,350여 명이 한국전쟁 직후에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이들 2,500여 명 대부분은 제주로 돌아오지 못하고 행방불명되었다. (같은 책 p. 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