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의자'라는 말을 싫어한다. 비혼 주의자, 독신주의자, 채식주의자 같은 '주의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비혼, 독신, 채식, 으로도 충분할 텐데 뒤에 '주의자'가 붙으면 왠지 더 철저히 처절해 보이기 때문이다. 되고 싶어 된 건 아닌데, 비혼, 독신, 채식, 3종 트리플 세트를 다 보유하게 되었다.
비혼과 독신은 얼떨결에 흘러온 것이고 채식은 어쩔 수 없는 선택에 의해 강제적인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채식위주로 먹었을 뿐인데 어느새 채식주의자가 돼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몸 곳곳에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현재 몸에 신호가 오면 10년 전 먹었던 음식을 생각해 보라는 어느 지인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즉, 10년 전부터 잘못된 음식을 먹었다는 이야기다.
10년 전 나는 주로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쁜 음식은 별로 먹지 않았던 거 같다. 술, 담배는 원래 안 하고, 라면 인스턴트도 즐기지 않고, 심지어 커피조차도 마시지 않았으니 나름 관리한다고 했던 거 같다. 그런데도 음식으로 인한 문제가 생겼고 식단을 조절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렀다.
하루 물 2리터를 마셔야 된다기에 시간마다 알람을 설정해 따듯한 온수로 열심히 마셨다. 과일 야채 위주로 먹어야 좋다기에 과일 야채샐러드만 먹었다. 밀가루는 물론 정제된 탄수화물도 멀리했다. 외식과 배달음식은 완전히 끊었다. 하루 먹는 음식량을 계산하며 조절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매일 그렇게 했다.
그러다 보니 3개월 사이 9킬로가 빠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충격이 컸다. 뱃살이 쏙 빠지고 팔다리 목덜미가 가늘어졌다. 마른 몸이어서 다이어트가 되면 안 되는데 다이어트가 되고 말았다. 저체중이 된 것이다. 정상 체중으로 올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마른 몸에 살을 찌우기란 빼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과일 야채샐러드만 먹어서는 살이 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도 내 몸에 안위를 위해서 지금까지 그렇게 2년을 먹고 살았다. 2년을 먹었으면 몸이 익숙해질 법도 한데 그렇지가 않았다. 채식주의자가 되었으면 고기가 아예 생각도 나지 말아야 할 터인데 여전히 삼겹살이나 소고기가 먹고 싶을 때가 가끔 있었다. 그러나 건강한 아침을 위해 참았다.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인고의 노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갑자기 치킨이 너무 먹고 싶었다. 후라이드 치킨이 너무 먹고 싶어 시장을 지날 때마다 전시된 치킨 구경을 했다. 바삭하게 튀겨진 치킨집 앞에서 고민하고 망설이다 그냥 가기를 여러 번 했다. 물어보기만 하고 사지 못한 적도 있다. 그렇게 치킨을 참고 참았다. 그러나 한번 머릿속에 들어온 치킨은 사라질 줄 몰랐다. TV 광고 속, 치킨 한조각 물어뜯는 광고 모델의 입을 볼 때면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크게 클로즈업되어 '바사삭' 한입 깨어 무는 치킨 광고를 볼 때마다 '욕구'는 극에 달했다.
그래도 지금까지 잘 참아왔던 터라 마음을 다잡기 위해 또다시 걷기 운동을 나섰다. 무언가를 잊고 싶을 땐 무작정 걷는 것이 최고다. 그런데 잊으려 하면 할수록 더욱 더 그리워지는 노랫말처럼 치킨의 유혹만큼은 떨쳐낼 수가 없었다. 내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치킨은 먹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치킨에 대한 집착은 결국, 폭발하듯 금지된 욕망을 원하는 강력한 알고리즘에 이끌려 치킨집에 전화를 걸고 말았다.
"후라이드 반마리 되나요?"
"후라이드는 반마리 안됩니다. 반마리 되는 건 **입니다."
잠시 망설이다가 "네 알겠습니다" 하고 재빨리 끊었다. 내가 원하는 건 바삭한 후라이드였으니까 다시 한 번 안 먹을 기회를 잡은 것에 안심했다. 참 이율배반적인 마음이지만 타의적으로 그렇게 되면 내마음이 조금 더 편안해 지리라 생각했던 걸까.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하며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러나 정확히 걸음 3보만에 다시 전화를 걸고 말았다. 견고히 쌓았던 둑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듯 치킨은 먹어야겠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 치킨 반마리 포장 부탁합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숨 막혔던 감정이 안도감과 함께 풀렸다. 완전히 무장해제된 사람처럼 채식주의자를 놓아버렸다. 산산조각 난 채식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2년간 지켜왔던 채식의 역사는 치킨 한 조각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결국, 걷기를 포기하고 집에 돌아와 포장해온 치킨을 뜯어 미친 듯이 먹었다. 채식하기 이전에도 2조각이면 충분했는데 그 많은 치킨 반마리를 혼자서 다 먹었다. 2년간 못먹은 치킨에 보상이라도 받듯, 나조차 알 수 없는 식욕이었다. 다 먹은 뼛조각을 보면서 행복감을 느꼈다. 정말 꿈같은 하루였다. 치킨 반마리를 혼자서 다 먹어버린 역사적인 순간. 그래 이게 사람 사는 거지! 모처럼만의 포만감에 뿌듯함이 밀려왔다. 저녁을 먹지 않아도 될만큼 든든했다.
내 몸을 위해 했던 채식이었다면, 오늘 나는 내 행복을 위해 치킨을 먹었다. 어쩌면 내 DNA 속엔 채식'주의자'가 될 만한 요소가 애초부터 없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주의자'라는 말이 싫었을 것이다. 단지, 필요에 의해 채식을 하는 사람이었을 뿐이고 채식이 좋다고 학습되어서 맹목적으로 지켜온 것 같기도 하다.
치킨 한 조각에 무너진 채식'주의자'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내가 행복하면 됐다. 신념없이 시작된 '채식 주의 자'의 채식은 의미가 없음을, 왜 그렇게 고민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