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팜탄은 베트남전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됐다. 항공기에서 네이팜탄을 투하하면 폭발해 파편 상태가 된 후 모든 표면에 달라붙어 900~1300℃에서 장시간 계속 타오른다. 소화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베트남에서도 많은 마을과 삼림을 불태웠다. 인체에 붙은 네이팜탄은 제거가 어려우며 광범위한 화상을 초래한다. 모낭에서 땀샘, 지각신경의 말단까지 침투하여 피부를 철저히 태워버린다. 직경 60m의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네이팜탄은 1945년 미국의 도쿄대공습 때 최초로 사용됐다.
월미도에 떨어진 폭탄, 쫓겨난 사람들
이 무시무시한 폭탄이 1950년 9월 10일 600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인천 월미도에 투하되었다. 95발의 네이팜탄과 기총소사로 약 100명의 원주민이 희생되었다. 이날 '불의 지옥도' 월미도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전천봉(1934년생)은 월미도다리를 어떻게 건넜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그저 죽기 살기로 뜀박질만 했다. 월미도다리를 건너는 동안에도 그의 귀에는 '쉭쉭쉭'하는 기총소사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그렇게 월미도를 탈출한 전천봉 가족은 월미도다리 앞 얼음창고에 자리를 잡았다. 그날부터 등을 누인 곳은 월미도 다리 앞의 얼음창고였다. 다른 주민들은 얼음창고 주변 판잣집에 짐을 풀었다. 사람들은 미군의 사격만 그치면, 한국전쟁이 끝나면 다시 고향 월미도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7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월미도 고향 땅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 이두성을 따라 가게에 간 이범기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게에 진열된 공예품 대부분은 일본에서 제작되어 수입되어 온 물건이었다. 목기나 쟁반이야 그렇다 쳐도 유리로 된 제품은 놀랍기만 했다. 주먹만한 유리 안에 물고기나 모래사장, 섬, 돛단배 등의 미니어처가 들어있는 것들이 특히 그랬다.
이두성의 공예품 가게는 인천부(仁川府, 현재의 인천광역시) 월미도 내 일본인 회사인 '유원회사'에서 운영했다. 유원회사는 이외에도 호텔, 풀장, 해수욕장, 조탕(목욕탕), 용궁각(고급 요릿집)을 경영했다. 특히 용궁각은 월미도의 명물이었다. 월미도 북쪽 끄트머리 바다에 기둥을 박고 그 위에 세운 일본식 건물로 술과 음식을 팔고 사방으로 난 창문을 통해 낚시도 겸할 수 있었다. 바다 위에 세웠기 때문에 만조 때 바닷물이 차오르면 마치 건물이 물 위에 뜬 것처럼 보였다. 중일전쟁이 벌어진 1937년에 만들어진 용궁각은 해방될 때까지 전쟁과 관계없이 향락을 즐기는 일본인과 조선인들로 붐볐다.
덕분에 월미도는 일제강점기에 조선 최고의 유원지로 이름을 날렸다. 당시 전국적으로 유명한 휴양지는 인천 월미도, 부산 해운대, 원산 송도원 세 곳이었는데 그중 단연 으뜸은 월미도였다. 봄에는 벚꽃놀이, 여름에는 해수욕을 즐기러 오는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특히 조탕은 월미도를 대표하는 시설로 인기가 최고였다.(강변구, 『그 섬이 들려준 평화 이야기』, 2017).
돌아갈 수 없는 고향, 월미도
월미도 폭격은 인천상륙작전의 전주곡이었다. 월미도를 점령하지 않고는 인천상륙작전은 불가능했고 나아가 서울도 수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자 한강 이남으로 피난갔던 서울시민들이 돌아왔다. 물론 '도강파'니 '잔류파'니 하며 피난하지 못한 이들을 '빨갱이' 취급하긴 했지만 말이다. 또 전쟁 당시 군·경이 인민군 패잔병과 빨치산을 토벌한다며 산악지대 주변 주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렸지만, 1953년 휴전협정 후에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갔다. 즉, 전투지역이라 하더라도 전쟁이 종결되면 원주민들은 복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월미도는 그렇지 않았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서울을 수복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월미도 주민들은 고향에 돌아가려 월미도다리 입구에 줄지어섰다. 그런데 '탕' 소리가 나 주민들이 혼비백산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월미도 주민 전천봉의 등 뒤에서 미군이 "겟 아웃(꺼져!)"라고 고함쳤다. 영문을 모르는 주민들에게 다리 입구 초소의 미군들은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이후 주민들이 월미도다리 앞에 나타날 때마다 미군들은 총부리를 들이댔다. 그제서야 주민들은 자신들이 전장의 한복판인 월미도에서 탈출한 게 아니라 쫓겨났음을 알게 됐다.
"현재 석탄고의 위치는 석탄을 부리고 싣기에도 무척 편합니다. 지금 조선과 확실한 조약을 맺어 우리 것으로 해놓고 석탄고 주변 땅까지 빌려 둔다면 나중에 우리 해군을 위해 굉장히 도움이 되고, 한편으로는 외국이 그 땅에 석탄고를 짓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1888년 2월 22일 인천항의 일본 영사가 본국 외무차관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 일부다. 일본 영사가 석탄고를 지으려던 곳은 바로 월미도다. 일본은 1876년 조선과 강화로 조약을 맺고 조선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고자 했다. 그러려면 운수 주요수단(배)의 연료인 석탄공급기지가 필요했다.
이런 생각을 일본만 한 건 아니었다. 청나라와 러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월미도는 제물포항(현재의 인천항) 바로 앞에 있었기에 경제적 침략의 중요 지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전략 요충지였다. 그렇기에 일·청·러시아는 월미도에 석탄창고를 놓고 경쟁했다. 나아가 이들은 조선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조선 땅에서 전쟁을 벌였다. 청일전쟁(1894~1985)과 러·일전쟁(1904~1905)이 그것이며, 그 전쟁의 승자는 일본이었다.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에 합병조치를 취함으로써 한국(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체제를 완전히 구축했다. 이후 일본이 조선의 전 국토에 도로·철도 등을 개설한 것도 조선의 쌀, 목재 등을 수탈하기 위해서였다. 월미도가 개발되고 조선 최고의 유원지로 각광 받은 것 역시 마찬가지다.
책임 떠넘기는 국방부와 인천시
"미군이 나가면 들어가 살게 해 주겠습니다." 1952년까지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월미도 원주민들이 인천시에 진정을 냈지만 돌아온 답변은 허무했다. 1953년 7월 27일, 만 3년의 전쟁이 끝난 후에도 미군은 월미도에서 나가지 않았다. 참다못한 월미도 원주민들이 1963년에 인천시에 또 진정서를 냈다. '한국전쟁 때 군사작전으로 쫓겨난 자신들을 원래의 삶터인 월미도로 돌아가 살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답변은 1952년과 마찬가지였다.
8년의 시간이 흘러 1971년 드디어 미군이 월미도에서 철수했다. 주민들은 희망에 부풀었다. 하지만 해군 제2함대 사령부가 1971년 7월 20일 월미도에 둥지를 틀었다. 엄혹한 박정희 정권 시대라 주민들은 항의조차 할 수 없었다.
미군은 월미도에서 철수하면서 기지 전체를 한국 국방부에 인계한다. 당시 국방부는 월미도에 소유지가 불분명한 땅이 있음을 파악했다. 그 땅은 월미도 주민들의 마을이 있던 자리였다. 그러나 국방부는 땅주인을 찾지도 않고 해군에게 국유재단으로 등록해 놓으라고 통보한다.
시간이 흘러 1997년 월미도 주민들은 자신의 땅을 되찾기 위해 '월미도귀향대책위원회(김경운 위원장)'를 조직한다. 인천시, 인천시 중구청, 국방부, 청와대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그들은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에 바빴다. 그러다 2001년 드디어 한국 해군마저 월미도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국방부가 인천시에 월미도를 팔아버렸다. 주민들의 땅도 포함됐다.
지금 월미도에는 월미공원이 만들어졌다. 한때 조선의 최고 유원지로 각광받았던 월미도가 인천 시민들의 쉼터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런데 월미도 주민들은 실향민 아닌 실향민 신세가 되었다. 그들은 전쟁 전 북한 주민들도 아니었고, 외국인도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국민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당연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이들 말이다. "월미도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꿈"이라는 한인덕 귀향대책위원회 위원장의 꿈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