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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후보들에게 이동휘 선생과 같은 국가관이 필요하다."

설 연휴 첫 날인 1월 31일 오후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서 만난 (사)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이승택 부회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동휘 선생은 정의감이 넘치고 청렴결백하며 국가관이 뚜렷한 분이었다"며 "지금 대통령이 되려는 이들에게 그런 국가관이 있긴 하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지도자들이 먼저 책을 읽고 역사 공부를 제대로 하길 바란다"라고 역설했다.

이날은 독립운동가 성재 이동휘 선생 서거 87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이 부회장을 비롯한 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회원들은 무후선열제단을 찾아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유해를 찾지 못해 묘소가 없는 이동휘 선생은 무후선열제단에 위패로 모셔져 있다.

 
 이동휘 선생 위패를 가리키는 이승택 (사)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부회장
이동휘 선생 위패를 가리키는 이승택 (사)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부회장 ⓒ 김경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성재 이동휘

1873년 6월 20일 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어난 선생은 단천군수의 심부름을 도맡는 통인(通引)으로 있을 당시 기생을 추행하는 군수를 보고 화로를 끼얹었을 정도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이후 대한제국 군대에 투신한 선생은 고종의 신임을 얻었을 정도로 강직하고 충성심이 남달랐다. 1903년 5월 강화도 진위대 대장으로 부임한 선생은 진위대장직을 사임한 후에도 강화도에 머물면서 기독교 선교활동과 교육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경술국치 후 해외로 망명한 선생은 북간도 각지를 순회하며 교육운동·선교운동에 종사하다 다시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고 북간도 왕청현 나자구에 사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전쟁을 추진했다.

1917년 선생은 사상의 전환을 가져오게 된 일대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바로 러시아 혁명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의 거대한 물결을 목도한 선생은 러시아 볼셰비키와의 연대를 통한 항일투쟁을 추진하기로 했다. 그리고 1918년 하바롭스크에서 김알렉산드라·유동열·김립·오성묵·오와실리·이인섭 등과 함께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했다.

1919년 9월 11일 서울의 한성정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통합하여 상해에서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하자 선생은 통합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로 취임했다. 그러나 외교독립론을 고수하며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위임통치 청원서'를 제출한 임시대통령 이승만과 갈등을 빚은 끝에 1921년 임시정부를 탈퇴했다.

 
 1920년 12월 28일 상해 교민단 주최로 열린 이승만 대통령 환영회 사진. 왼쪽부터 손정도,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
1920년 12월 28일 상해 교민단 주최로 열린 이승만 대통령 환영회 사진. 왼쪽부터 손정도,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 ⓒ 위키피디아
 

임시정부 탈퇴 후에도 선생은 사회주의 혁명노선에 입각하여 민족해방을 위해 헌신했다. 고려공산당 지도자로 러시아에 가서 레닌을 면담하는 등 한국 독립을 후원받기 위해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의 조선공산당 활동을 간접적으로 후원한 것이다.

이후 혁명가와 가족들을 후원하기 위한 모플(국제혁명가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말년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하던 선생은 눈보라로 인해 걸린 독감으로 1935년 1월 31일 끝내 조국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이국 땅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 62세였다.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 위치한 이동휘 선생의 위패.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 위치한 이동휘 선생의 위패. ⓒ 김경준
 

<성재 이동휘 일대기> 저자인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이동휘는 러시아식 공산주의를 답습하고 이를 한국혁명에 그대로 적용하려는 이른바 정통 공산주의자 범주로부터는 먼 거리에 있었다"며 "그는 조국의 광복과 근로대중의 해방을 위한 것이라면 어디든지 어떤 것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앞장서 달려간 인물이었다"라고 평가했다.

"사회주의는 독립운동을 위한 수단이었을 뿐"

통합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를 역임하며 한평생 조국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해 헌신했던 선생. 그러나 조국은 그에게 가혹했다. 사회주의 노선을 택했다는 이유만으로 오랜 시간 홀대받았던 것이다. 독립유공자 서훈도 1995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뒤에야 비로소 이뤄졌다(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그러나 서훈된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선생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2019년 10월 김진태 당시 자유한국당 의원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당시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국가보훈처에서 선정한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김좌진 장군은 빠지고 이동휘가 들어갔다"며 "이동휘는 고려공산당을 창당한 우리나라 공산주의의 시조같은 사람"이라고 폄훼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2019년 10월 10일 김진태 당시 자유한국당 의원이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린 글
2019년 10월 10일 김진태 당시 자유한국당 의원이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린 글 ⓒ 김진태 페이스북
 

김진태 의원의 발언에 격분하여 항의 전화를 걸기도 했다는 이승택 부회장은 "이동휘 선생의 사회주의는 독립운동을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라며 "선생만큼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가 없는데 이념 문제로 대우가 소홀했다"고 씁쓸해했다.

실제로 선생을 기념하는 기념관 하나 없는 게 현실이다. 이 부회장은 "기념관을 건립하려고 많이 노력해왔다"면서도 "기념관을 짓는데 한두 푼 드는 게 아니지 않느냐"며 현실적인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는 "정부 지원이라곤 달랑 대통령 조화 하나 보내는 게 전부고 국고 지원은 1원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단 몇 푼이라도 좋으니 기념사업회 운영 및 이동휘 선생 선양을 위한 실질적인 국고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동휘 기념관' 건립이 꿈

다행히 올해 초 강화도에 문을 여는 '강화기독교역사기념관'에 이동휘 선생을 기념하는 전시실이 만들어질 예정이다.

강화도는 이동휘 선생이 기독교 선교운동을 하던 곳으로, 강화도 주민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데 있어 선생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기념관 한 편에 선생의 전시실이 마련되는 것. 전시실에는 선생이 남긴 유품(도시락·도자기·태극기 등)과 함께 흉상이 설치된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이 부회장은 "당장은 기념관 한 편에 마련된 전시실에 불과하지만 장차 단독 기념관 건립도 계획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그는 1905년 이동휘 선생이 강화도에 세운 보창학교(普昌學校)의 후신인 강화 양도초등학교에 '이동휘 기념관'을 세우는 게 꿈이라고 했다.

"기념관이 크고 화려할 필요는 전혀 없다. 이동휘 선생이 세우고 초대 교장을 지냈던 양도초등학교 한 편에 선생을 기념하는 공간 하나 세우는 게 목표다."
     
 성재 이동휘 선생 위패에 참배하는 (사)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회원들
성재 이동휘 선생 위패에 참배하는 (사)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회원들 ⓒ 김경준
     
한편 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는 올해 봄 개관 예정인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에도 이동휘 선생 전시실을 만들기 위해 지속적으로 접촉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보창학교 터·중앙교회·진위대 터 등 강화도 내 이동휘 선생 유적지에 '표지석' 설치를 추진하고 있다. 정치·국방·문화·교육 등의 분야에서 우수한 성과를 거둔 인재에게 주는 '이동휘상'을 제정하기 위해 강화군청과도 협의를 이어나갈 계획이다.

여전히 이념의 잣대에서 자유롭지 않은 우리 사회의 현실에 비춰볼 때 이러한 계획을 실현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터. 하지만 이 부회장은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 믿고 있었다.

"기념관이 만들어지고 우리가 계속 선생의 업적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다보면 빠르면 20년, 늦어도 30년 내에 선생이 독립운동가로서의 명예를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인터뷰를 마치고 모두가 떠난 뒤에도 기자는 남아서 홀로 현장을 지켰다. 그러나 행사 전후로 사람들의 발걸음은 이어지지 않았다. 선생의 위패 앞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조화 하나만이 쓸쓸하게 놓여있을 뿐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조화
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조화 ⓒ 김경준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반병률, <성재 이동휘 일대기>, 범우사, 1998.


#이동휘#성재이동휘#독립운동가#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강화기독교역사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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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전공 박사과정 대학원생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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