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공사 현장에서 산재 사망한 청년 고 김태규씨의 유족, 방송사 갑질과 노동 착취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고 이한빛 PD의 아버지, 열악한 처우 개선을 위해 30년 넘게 투쟁한 독립 PD, 전주KBS를 상대로 부당해고 사건에서 이긴 방송작가, 그리고 '우리도 노동자'라며 노조를 만든 대구MBC 프리랜서까지 방송 비정규직과 산재 피해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2년 전 숨진 CJB청주방송 고 이재학 PD를 추모하기 위해서다.
2년 전 2월 4일 이재학 PD는 청주방송에서 부당해고된 억울함에 괴로워하다 유서를 남기고 숨졌다. 전국 방송사 프리랜서를 위한 판례를 남기겠다며 소송에 나섰던 그의 죽음은 방송 비정규직 문제 실태를 드러내면서 방송 비정규직 철폐 운동으로도 이어졌다.
4일 오후 2시 충북 청주시의 청주방송 7층 대강당에서 고 이재학 PD의 2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청주방송 임직원 30여명을 비롯해 유족, 사건 당시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요구하며 싸웠던 시민사회단체 구성원 등 70여명이 참석했다. 신규식 청주방송 대표이사와 사건 당시 대표이자 대주주였던 이두영 회장은 추모제에 불참했다.
곳곳에서 눈시울... "청주방송 재발방지 21개 과제 중 9개 '미흡'"
재발방지를 위해 청주방송에 21개 이행 과제를 제시했던 이재학PD 사건 진상조사위원회는 추모제에서 이행 결과를 보고했다. 진상조사위원이었던 윤지영 변호사는 최종 9개 과제가 미흡했다고 밝혔다. ▲책임자 징계 ▲상시·지속 업무 직접고용 전환 ▲비정규직 복리후생 개선 ▲노동자성 인정된 작가 정규직화 등이다.
윤 변호사는 "노사협의회 노동자위원에 비정규직 대표를 참여케하고 노·사 대표, 비정규직 노동자가 함께 분기별로 상생협의회를 개최하고, 성평등위원회·고충처리위·직장내 괴롭힘 고충상담원에 비정규직 대표가 추천하는 외부위원 참여를 보장하는 과제도 전혀 이행되지 않았다"며 "이는 단순 권고 사항이 아니라 회사가 협의한 법적 의무 사항이다. 지역사회와 시민단체들이 회사가 과제를 끝까지 이행하도록, 자율적으로 아름답게 문제를 해결하도록 끝까지 잘 지켜봐달라"고 당부했다.
이에 황현구 전무가 대표이사 대신 단상에 올라 "후회 막급인 줄 알면서도 되돌릴 수 있다면 2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며 "그때 '재피(재학피디)' 손을 더 따뜻하게 잡았더라면,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면 그리 하늘나라에 가지 않았을 것란 서글픔과 안타까움이 남고, 자신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을 재피가 떠난 후 알게 된 게 부끄럽고 창피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이어 황 전무는 "따스한 봄을 꿈꿨던 재피의 고귀하고 숭고한 뜻을 청주방송은 오래오래 기억하겠다"며 "좋은 직장 만들기에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 재피와의 약속을 지켜나가겠다"고 밝혔다.
"그럼 합의 이행 해주세요" "이재학 피디 위한다면서요. 이행한다고 지금 확답을 하세요."
발언을 마친 황 전무가 허리 숙여 인사할 때 강당 첫 줄에 있던 김도현씨가 소리쳤다. 김씨는 2019년 4월 수원의 한 건설현장에서 추락사한 26세 고 김태규씨의 누나다. 태안화력발전소의 고 김용균씨 유족,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 황유미씨 유족, LG유플러스 하청업체 현장실습생 유족 등이 함께 하는 산업재해피해가족네트워크 '다시는'의 구성원이다.
김씨는 행사 도중 소리친 이유로 "다시는 우리 같은 가족이 생기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발언했다"며 "대표이사는 어떤 자리인지 알면서도 오지 않았다. 말만 하지 말라는, 우리 유족과 이재학 PD 가족들이 회사를 지켜보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황 전무는 "진상조사위에서 보고한 결과 내용 하나하나 다 이행해나가겠다. 지켜봐달라"고 답했다.
이어 추모사를 한 윤창현 언론노조 위원장은 "(방송계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언론노조의 부족한 부분을 알고 있고, 비판을 달게 받아들이고 아프게 생각한다"면서 "올해 강고한 의지를 모아 비정규직 조직화 사업 첫 삽을 뜨겠다. 미디어 비정규직 공제회를 2022년 내 출범시킬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한 "사상 최악의 소득 양극화는 바로 비정규직 체제 때문에 만들어졌다. 미디어 현장에도 심각한 중간착취가 고착화됐다"며 "언론노조는 이 중간 착취 문제 해결을 위한 제도적 개선책을 모색하겠다"고도 약속했다.
"카메라 뒤에 사람이 있다"
선지현 비정규직 없는 충북 만들기 집행위원은 "언제나 승자독식, 경쟁에서 이겨야만, 1등이 돼야만 주목받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방송 생태계가 모든 노동하는 사람들의 참된 가치를 보장하는 곳이 되길 바란다"며 "지역에도, 지역 방송사에도 여러 비정규직이 있다. 이들이 일터 안팎에서 자기 얘기를 나누고 외치는 2022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끝으로 유족 대표로 나선 이 PD의 동생 이대로씨는 "청주방송 뿐만 아니라 전국 방송계 노동자의 처우가 조금씩 바뀌고 있고, 스스로 목소리 내는 모습 볼 때마다 형과 같은 일을 겪지 않았음 하는 마음에 계속 (이분들의) 손을 잡게 된다"며 청주방송에 "형이 만들던 프로그램은 '아름다운 충북' 하나만 남았다. 이걸 볼 때마다 형을 기억해주고, 카메라 뒤에 다른 스탭들, 동료들이 있다는 걸 기억해달라. 그리고 이 동료들은 스스로 권리를 찾고자 목소리를 내달라"고 당부했다.
지난 2년 동안 '청주방송 고 이재학 PD 대책위원회'에 함께 한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와 대구MBC다온분회,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한국독립PD협회 등도 추모제에 함께 했다. 눈시울을 붉히며 행사를 지켜본 김한별 방송작가지부장은 "피디님 돌아가시고 난 이후 현장은 그만큼 바뀌고 있나 다시 생각해보았다. 많이 아쉬웠다. 혼자 아파하는 작가, 스태프가 없도록 늘 동료 곁에서 힘껏 싸우는 것이 남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인 것 같다"고 말했다.
행사는 참가자들이 이재학 PD 추모 현수막에 추모 글귀를 적어 붙이면서 마무리됐다. 참가자들은 "진상조사 결과 언제 이행? CJB 정신차려라" "카메라 뒤에 사람이 있다" "재학아 더는 아프지 말고 천국에서 잘 지내거라" "방송현장 무늬만 프리랜서 이제 그만" 등의 글귀를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