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은 소소한 탐식을 통해 일상의 고단함과 노곤함을 이겨냅니다. 고독한 방구석 연주자인 임승수 작가는 피아노 연주를 통해 얻는 소소한 깨달음과 지적 유희를 유쾌한 필치로 전달합니다.[편집자말] |
꽤 오래 전 셸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읽었다. 소년과 나무가 관계 맺는 방식이 터무니없이 일방적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소년에 대한 나무의 헌신적 태도에 숭고함과 경건함마저 느꼈다. 사람들은 이 동화에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읽어내기도 하고, 아가페적 사랑으로 해석하며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비주류 해석이기는 하지만 아이에게 가스라이팅 당한 나무의 어리석음을 개탄하는 의견도 있다.
이렇듯 작가의 손끝에서 탄생한 동화 한 편은 시공간을 초월해 다양한 독자를 만나 갖가지 방식으로 읽히고 해석된다. 그 과정에서 번데기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듯 제각각의 빛깔로 독자의 뇌리에 둥지를 튼다. 이 나비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설렘과 감격으로 인해, 책을 읽은 당사자는 세상을 보는 시선과 태도에 일정 부분 변화를 겪는다.
나에게도 동화 속 나무처럼 삶의 순간순간 홀연히 등장해 '아낌없이 주는' 곡이 있는데, 바로 로베르트 슈만의 <어린이를 위한 앨범(Album für die Jugend)> Op.68 No.13이다. <어린이를 위한 앨범>은 전체 43곡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No.13의 제목은 'Mai, lieber Mai, bald bist Du wieder da!'다. 한글로 번역하자면 '5월이여, 이제 곧 오는구나!'쯤 되는 것 같다. 다음에 나오는 악보가 곡의 도입부인데, 주제 선율에서 빨갛게 표기한 네 음을 일단 기억해두자.
<어린이를 위한 앨범> No.13과의 첫 만남
내가 이 곡을 처음 접한 것은 중학교 때였다. 당시 사춘기의 열정과 치기에 사로잡혀 예술고등학교 진학(작곡 전공)을 목표로 작곡을 배웠는데, 그때 나를 가르쳐주시던 선생님이 작품 분석 용도로 슈만의 <어린이를 위한 앨범>을 추천했다. 거기 나오는 43곡 중에서도 유독 귀에 꽂힌 곡이 바로 13번째로 나오는 이 곡이었다.
연주 시간 2분 남짓 되는 소품이지만 슈만이라는 걸출한 작곡가의 재기 넘치는 아이디어와 기획이 곳곳에서 보석처럼 빛났다. 곡을 분석하다 보면 시공을 초월해 작곡가와 대화를 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작가가 된 지금에서 보면, 작곡이라는 행위가 재료만 다를 뿐 본질에 있어서 글쓰기와 꽤 공통점이 많다고 느낀다.
도입부 주제 선율에서 따로 표시해놓은 네 음 기억할 것이다. 다음 악보를 보면, 그 네 음만 떼어내서 세 차례 반복하며 3도 하행하는 부분이 나온다. 아래에는 화성분석을 적어놨는데 큰 줄기로 보면 Ⅰ→Ⅵ→Ⅳ→ⅱ의 순서로 3도 하행하면서도, ◯ 안에 표기된 대로 사이사이에 부속화음이 등장해 화성적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화성법 지식이 있다면 두 번째 및 세 번째 동그라미 안의 부속화음이 위종지(僞終止) 방식으로 모호하게 해결됨을 인지했을 것이다. 이게 참으로 절묘한데, 해당 부분을 실제로 들어보면 짝사랑하는 이에게 마음을 전하려다가 망설이기를 반복하는 풋풋한 청년의 모습을 떠오르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나만의 그럴싸한 헛소리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런 이론적 형식적 접근은 대개 사후적 분석의 성격이 강하다. 아무리 이론적으로 형식적으로 탄탄한 곡이라 하더라도, 그 곡으로 인해 생성되는 공기의 울림이 청자의 감정선을 건드리지 못한다면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곡은 사춘기 중학생이었던 나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다.
하지만 5월이 지나면 6월, 7월이 오기 마련. 사춘기 철부지의 열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여드름 만발한 중학생 주제에 직업적 음악가로 산다는 현실의 무게감을 지레 고민하다가 결국 예술고등학교 입시 준비를 접고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자연스럽게 음악과 멀어져 피아노를 치는 일도 줄어들었고, 슈만의 곡을 연주할 일도 없었다.
<어린이를 위한 앨범>은 아내와 딸을 위한 곡이 되고
그렇게 잊혀질 것만 같았던 이 곡이 다시 등장한 순간은 2009년 5월 아내와의 결혼식이었다. 이벤트 좋아하는 아내가 결혼식에서 자신은 노래를 부를 테니 나에게는 피아노곡을 하나 연주하라는 지침을 하달했다. 마침 제목에 5월이 들어가는 이 곡이 떠올랐다.
수줍으면서도 정겨운 선율이 결혼식과 제법 잘 어울리기도 하고, 이미 손에 익은 곡이라 연습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필요도 없었다. 판에 박힌 곡도 아니라서, 하객들에게 신선한 느낌을 줄 수 있고 말이다. 삶의 중요한 순간에 등장한 슈만의 소품은 마치 이날을 위해 준비했다는 듯 알맞은 존재감으로 결혼식을 빛내주었다.
그러고 보니 정작 이 곡의 작곡가인 슈만은 무척 힘겨운 과정 끝에 결혼했구나. 피아노 스승의 딸인 클라라 비크와 결혼하는 과정에서 야반도주에 법정 다툼까지 벌이는 우여곡절을 겪었으니 말이다.
당시 클라라 비크는 신동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지만, 로베르트 슈만은 백수건달이나 다름없는 가난뱅이 무명 음악가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미래가 불투명한 제자와 결혼한다는 게 너무나 못마땅했던 프리드리히 비크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둘 사이를 훼방 놓았지만, 뜨거운 사랑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혼 당시 미래가 불투명하기로는 슈만보다 내가 더했지 싶다. 아내는 사회과학 책 쓰는 작가인 나와 결혼하면서 단칸방 생활도 각오한다고 했다. 그 한 마디가 그렇게나 고마워서 여유가 되면 호강시켜주겠다는 생각을 십여 년째 하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애로사항이 많아 일단 정신적 호강으로 어떻게 퉁치고 있다.
결혼 이듬해인 2010년 7월 첫째 딸이 태어났다. 절반이 내 유전자로 구성된 존재에 대한 벅찬 감격에 젖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갓난아이를 키우는 일은 갓 부모가 된 자들에게 여태껏 겪어보지 못한 수준의 집중력과 체력을 요구한다. 특히 당시 전세로 살던, 욕조도 없는 산꼭대기 빌라에서 아내가 고생이 많았다. 하루라도 아내에게 편안함을 선사하고 싶어 욕조가 있는 호텔 객실을 예약했다.
호텔 전체를 통틀어 당일 투숙객은 우리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호텔 전세 낸 셈이니, 운빨 하나는 역대급이다. 별장을 방문한 포브스 선정 세계 100대 부호처럼 텅 빈 호텔 구석구석을 누비다가 마침 로비에 놓인 흰색 영창 그랜드피아노를 발견했다. 그야말로 내 전용 피아노 아닌가!
직원들의 양해를 구하고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돌도 안 된 딸아이에게 아빠의 나이스함과 엘레강스함을 보여주기 위해, 마침 5월이기도 해서 슈만의 그 곡을 연주했다. 아빠의 멋있음에 홀렸는지, 아이가 꺄르르 하며 네 발로 기어 피아노로 돌진했다. 마침 그 상황을 아내가 영상으로 남겨놨는데, 얼마 전 컴퓨터로 작업을 하다가 해당 파일을 다 날려 먹어서 지금은 없다.
오랜만에 다시 쳐보니 다른 느낌
그로부터 제법 시간이 흘러 어느덧 2022년이 되었다. 갈수록 말 안 듣는 아이 둘을 키우고 있으며, 욕조 있는 보금자리로 이사한 지도 꽤 되었다. 삶의 부스러기 한 조각마저도 글로 바꿔 먹고살아야 하는 서푼짜리 작가로서, 하다 하다 이제는 피아노 에세이까지 쓰게 되었다.
나름 의욕을 갖고 시작했으나 몇 편 쓰니 이내 밑천 거덜나고 소재가 고갈되었다. 에반게리온 초호기의 조종간을 붙잡고 "우고케(움직여)!"를 연발하며 절규하는 이카리 신지처럼 '뭘 써야 하지? 뭘 써야 하지? 뭘 써야 하지?'를 되뇌는 중이었다.
그때 구세주처럼 '아낌없이 주는' 곡이 떠올랐다. 글감 발견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찬찬히 관련 기억을 곱씹다 보니, 이 곡이 유독 삶의 인상적인 순간들과 함께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음악에 홀려 걷잡을 수 없었던 사춘기 시절의 열정, 아내와 행복한 가정을 꾸릴 것을 약속하는 순간, 아도니스 호텔 로비에서 아빠에게 돌진하던 첫째 딸의 사랑스러움 같은 것들 말이다.
흐뭇한 미소를 머금으며 글을 쓰다가 간만에 이 곡을 연주해보았다. 악보를 펴놓고 한 음 한 음 정성 들여 살피다가 예전에 놓쳤던 부분을 발견했다. 아래에 표시했듯이 상성부에 등장한 선율(①)이 바로 다음에 내성부(②)에서 반복되는 부분 말이다. 이 중요한 걸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그동안 얼렁뚱땅 건반만 눌렀구나.
단어 선택 하나에도 머리를 쥐어뜯으며 글을 짓는 입장이 되다 보니, 음표를 재료로 곡을 만드는 작곡가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중학교 시절과는 음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그나저나 이 곡이 이런 느낌이었나? 예전에는 몰랐던 비릿한 쓸쓸함도 스며 있네. 아무래도 이 음악을 듣는 나 자신이 예전과는 꽤 다른 사람이 되었나 보다. 문득 지금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읽는다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