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약자'라고 칭하는 거, 그거 네 자격지심 아냐?"
지인과 기분 좋게 술을 한 잔 기울이던 중, 이런 말을 들었다. 나도 모르는 새 높아진 목소리로 여성이 겪는 문제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중이었다. 말을 듣고는 어쩐지 맥이 쭉 빠져 입이 저절로 다물어졌다. 나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처한 현실과 구조적 차별, 갈수록 늘어가는 여성 대상 범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고, 대화의 상대는 우연히도 남성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을 사회적 약자라고 칭하는 것이 나의 자격지심의 발로였을까? 지인의 반응에 대응할 말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다만,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그에겐 내가 하는 말이 우리 사회 속 뿌리 깊은 성차별과 구시대적 가부장 문화에 대한 타당한 지적이 아닌, 여성의 열등감에서 비롯한 '징징거림' 수준의 하소연으로 들린다는 사실에 심히 허탈했을 뿐이다.
지금 와서 답하자면, 나 스스로를 약자로 규정하거나 선언한 것이 아니다. 약자가 되고 싶은 것도, 약자로 머무르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OECD 회원국 중 독보적인 성별 임금 격차를 보이며 상장사의 여성 임원 비율이 5% 불과한 나라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사회의 주류 세력으로 정당한 권리를 보장받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이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사회적 약자냐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하겠다. 여전히 여성이기 때문에 사회∙경제 활동에서 불이익을 경험하고, 일상 속 자유보다 불안을 느끼며, 시도보다 걱정이 앞서는 부분을 삶 속에서 속속 발견하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편견, 차별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강화된다. 청소년 시절엔 미처 느끼지 못했던 불평등은 청년이 되어 사회로 진입하는 순간 비로소 몸 속 깊숙이 전달된다.
조용한 학살의 시작
지난 2020년 3월, 20대 여성 12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는 통계가 나왔다. 그 다음으로 40대, 50대, 30대 순으로 일자리를 잃어, 2020년 고용 통계 중 전체 취업자 감소의 61.5%가 여성으로 나타났다(출처: 슬랩 <
'조용한 학살'이 다시 시작됐다> 유튜브 영상). 사회경제적 위기 상황에는 언제나 그 사회의 약자부터 피해를 입는다. 사회적 보호망이 가장 허술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코로나가 촉발한 이번 위기 상황에서는 여성이 가장 먼저 그 직격탄을 맞았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의 고용 위기와 실업은 전혀 공론화되지 못했고, 20대 여성의 자살 사망률은 전년 대비 43%가 증가했다. 사회의 한 단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조용한 학살'인 셈이다. 임윤옥 한국여성노동자회 자문위원은 여성의 실업은 사회구조적 문제가 아닌, 개인의 능력 문제이자 사소한 일로 치부된다는 점에서 사회의 위기 대응 방식이 매우 가부장적이라고 보았다. 주로 보조, 잉여 인력으로 활용되던 여성의 노동력은 사회 위기 상황에서 가장 먼저 배제됐고, 이는 여성들을 극단적인 선택의 상황으로 내몰았다.
문제는 이것이 일시적인 상황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장숙랑 중앙대 적십자간호대 교수는 현재 90년대생, 20대 여성의 자살 사망률과 증가폭이 일본 전후 세대의 자살 사망률과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고 경고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패망한 국가를 견뎌야 했던 일본의 청년들은 계속해서 우울증에 시달렸고 나이가 들어서도 변하지 않는 높은 자살 사망률을 보였다.
즉 현재 여성 청년 세대의 높은 자살률이 청년 시기에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그 세대만의 고질적인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코로나19 이후 더욱 극대화된 사회적 불안정, 실업, 고용 불안, 임금차별, 여성 대상 범죄, 여성 혐오 정서 등은 지금 여성 청년들을 어디까지 몰고 있는가. 우리가 진지하게 들여다봐야 할 시점이다.
여성가족부 폐지의 대안은 무엇인가
이 시점에 여성 청년은 대선 후보의 정책에서도 천천히 지워지고 있다. 앞서 말했듯 코로나19 이후 여성 청년의 높은 실업률은 전혀 공론화되지 못했고, 곧 시행될 대선에 나올 후보들은 너나없이 여성가족부 폐지론에 탑승했다. 대선 후보 4인은 모두 '여성'이란 글자를 '성평등' 혹은 '가족'이란 이름으로 대체했다.
2001년 김대중 정부와 함께 출범한 뒤 턱없이 부족한 인력과 예산에 시달리며 호주제 폐지, 성폭력∙성매매 방지법 제정, 남녀고용평등법 개정∙보완 등 굵직한 업적을 남긴 여성가족부는 20년 후, 존폐의 위기에 놓였다.
2021년 여가부 예산은 전체 정부 예산의 0.2%(1조2325억원)에 불과하다. 그리고 예산의 약 60%는 한부모 가족과 1인 가구 지원, 아이돌봄 서비스 등 가족 돌봄 정책에 쓰였고, 그 다음 20%는 청소년 보호 사업에 돌아갔다. 나머지 20% 중 여성 관련 사업을 위한 예산은 7.9%에 불과하며, 이 중 상당 부분이 경력단절여성을 지원하는 데 사용됐다.
사실상 남성을 향한 역차별적 요소라며 폐지의 이유로 언급되는 '엄마가 아닌 여성, 결혼하지 않은 여성, 여성 청년'만을 위한 지원 제도는 없는 수준에 가깝다. '여성'가족부라는 이름을 달고도 국민의 반만 관련된 부처라는 인식으로, 실제로는 시간이 갈수록 여성 관련 사업보다는 가족과 청소년 지원 사업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여성'이라는 글자마저 지우고 그 기능을 축소한다면 해결되지 못한 여성 문제는 도대체 어느 부처에서 책임지게 될까?
정혜주 고려대 보건정책관리학부 교수는 유럽의 청년 자살률을 분석하며, 여성의 노동 시장 참여를 위해 투자되어야 할 재원이 가족과 관련된 부분으로 들어가면서 여성 청년의 자살률이 오히려 높아지는 경향을 보였다고 말했다. 여가부를 폐지하고 강화하려 하는 가족 정책은 여성의 노동 시장 참여 지원에도, 성폭력∙성차별, 저출생 현상 등 우리가 직면한 문제에도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
여성가족부는 다른 정부 부처와 성격이 판연히 다르다. 여가부는 결국 없어져도 될 그날을 위해 존재하는 부처다. 여성, 아동, 청소년 등이 이 땅에서 더는 사회적 약자로 머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하는 곳이다.
지금이 과연 그 시기인가? 지금은 여성가족부가 폐지되고 축소될 시점이 아니라 더 많은 예산으로 더 다양한 지원 사업을 수행해야 할 시점이다. 가족 돌봄과 청소년 보호 이외에도 가려진 사각지대에 있는 약자를 발견하고 이들을 위한 사업을 펼칠 때다.
폐지를 주장하려면 단순히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주장만 호소할 것이 아니라 폐지에 대응하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보여주어야 한다. 대선까지 아직 한 달 가량 남았다. 온라인상 편향된 의견과 정서에 편승해 일부 타깃층의 표심만 공략할 것이 아니라 정말 국민을 위한 정책을 보여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