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대보름에 소원을 빌지 못했다. 거실 창에서 초승달이 보이곤 했으니 밤이 되면 베란다로 나가 달을 보면 되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쪽저쪽 열심히 고개를 돌려보아도 달이 보이지 않았다. 밤이 깊으면 떠오르려나 싶어 조금 기다렸다 다시 나가 보았다. 두어 번 베란다를 들락거리다 여기선 안 보이는구나 체념했다. 그러고 보니 보름달은 베란다에서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소원을 빌지 않고 넘어갈 순 없었다. 늦게 퇴근한다고 연락 온 남편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대신 달님에게 소원 좀 빌어줘." 밖으로 나가 달을 보기엔 날이 너무 추웠다. 봄이 코 앞이라는 듯 푸근하다 갑자기 영하로 떨어진 날씨에 몸도 마음도 움츠러든 상태였다.
봄이 오는지 해가 야금야금 길어지고 있다. 저녁 6시면 어둑해지던 창 밖 하늘이 6시가 넘어도 푸른빛을 띠고 있다. 아침이면 7시 반까지도 어둑하던 창 밖이 7시만 넘으면 밝아온다. 봄이 온다고 잊지 않고 부지런 떠는 해를 보며 깜짝 놀란다.
자연의 시계는 어쩜 이렇게 때를 놓치지 않는지. 차곡차곡 시간만 쌓아도 계절은 간다는 게, 내가 애쓰지 않아도 때가 되면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저녁도 먹지 않았는데 창 밖이 어둑해지면 하루가 빨리 저무는 것 같아 아쉽고 쓸쓸했는데 저녁해가 길어지면서 하루가 한 뼘 늘어난 것 같아 반갑다. 그런가 하면 새벽에 일어나 7시 반까지 혼자만의 어둠을 즐기곤 했는데, 서둘러 어둠을 몰아내는 아침 해가 조금 야속한 마음도 든다.
해가 길어진 만큼 고도도 높아졌을 테다. 그런데 달이 뜨는 고도도 바뀌는 걸까. 거실 창에서 보이던 달이 안 보인다는 건 그만큼 머리 위로 높이 올라갔다는 의미. 생각난 김에 찾아보니 달이 지구 주위를 한 달 주기로 공전하기 때문에 매일 달이 뜨는 시간이 50분씩 늦어지고 고도도 바뀐다고 한다.
음력 8일경 뜨는 상현달(오른쪽 반달)은 높은 하늘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것처럼 보이는 반면 하현달(왼쪽 반달)이 뜰 때까지 매일 50분 늦게 뜨면서 고도도 낮아진다는 것이다. 거실 창에서 볼 수 있었던 달이 낮게 뜨는 초승달이나 그믐달이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다음 날 남편에게 부탁한 소원은 잊지 않고 빌었는지 물었다. "그럼!" 하는 말에 다행스러우면서도 뭔가 석연치 않았다. 그래도 달을 보고 빌어야 영검한 기운을 조금이라도 더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루 지났지만 오늘 밤에라도 꼭 나가 소원을 다시 빌어야겠다 생각했다. 그렇다. 꼭 빌고 싶은 소원이, 올해 꼭 이루고 싶은 꿈이 내겐 있다.
입춘 하고도 열흘이 지났는데 바람은 여전히 매섭다. 그런데도 한낮의 햇살에는 어김없이 봄기운이 실려 있다. 온화한 햇살을 맞으며 겨울이 드리운 응달이 옅어지고 있겠구나 생각했다. 딸아이와 공원에 나가 달리기를 하다 연 날리는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도 그랬다. 봄을 향해, 새로운 시작을 향해 날아오르는 마음이 저기 있구나. 훨- 훨- 날아올라 겨울과 작별하려는 희망찬 마음이.
정월대보름에는 한나절 연을 날리며 놀다 연줄을 끊어버리기도 한다던데. 줄이 끊겨 돌아오지 못하는 연에 액운과 욕심을 날려 보낸다고. 굳이 연줄을 끊을 필요도 없이 호방하게 하늘 높이 떠 있는 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후련하고 짜릿했다. 연을 바라보는 사이 파란 하늘을 나는 연의 기분이 된 것 같았고.
예부터 음력을 중시 여겼던 선조들은 태양만큼이나 달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래서 1월 1일을 1년이 시작되는 첫날로 의미를 두면서도 첫 보름달이 뜨는 대보름날을 더 중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달은 대지의 여신과 연결되어 풍요를 상징하기에 농경 사회에서 그 위상이 컸다고 하고. 내 마음에도 달님은 우리 뒤에서 말없이 빛을 보내주는 존재, 어둠 속에서도 길을 밝혀주는 존재로 자리 잡고 있다.
오곡밥에 나물 반찬을 지어먹지는 못했지만 달을 보며 소원만은 꼭 빌고 싶었다. 티도 안 나고, 효력을 확인할 길도 없지만 보름달 유난히 밝은 날이면 하늘을 보며 속엣말을 가만히 고백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된다. 달님에게 빌고 싶다는 간절함 속에서 어떤 힘은 이미 시작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저녁을 먹고 귀찮아하는 아이를 달래 밖으로 나갔다. 높다란 아파트에 가려 달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 손을 잡고 시야가 트인 곳을 찾아 조금 걸었다. 달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큰 소리로 외쳤다. 까만 하늘에 금빛으로 찬란한 둥그런 달이 거기 있었다.
남편 말로는 오늘 달이 어제보다 더 가깝고 커 보인다고 했다. "소원 빌어봐"라고 했더니 딸아이가 작은 소리로 자신의 소원을 속삭였다. 나도 입술을 넘을락 말락 하게 소원을 읊조리며 두 손바닥을 모아 붙여 달님께 바쳤다. 그리곤 다시 아이와 손을 맞잡고 발을 동동 굴러 힘을 모은 후 손바닥을 펼쳐 달님을 향해 날려 보냈다. 달님이 그런 우리를 가만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달이 소원을 들어줄지 그러지 않을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어떤 소원을 빌까 생각하다 꼭 이루고 싶은 것 한 가지를 선명한 문장으로 떠올렸을 때 꿈을 향한 첫 발은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니까. 달님께 띄워 보낸 소원은 나와의 약속을 다시 확인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하나의 문장을 품고 한 해를 열심히 살아갈 일만 남았다.
혹시 소원 비는 걸 깜빡했다면, 이제라도 한 번 빌어보는 건 어떨까. 달은 아직 넉넉하게 둥글고 놀랄 만큼 금빛으로 찬란하니까. 오늘도, 아마 내일까지도 꽤나 가까이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당신의 고백을 기다리느라 더디게 기울고 있을지도. 한 해의 바람을 선명하게 떠올리는 사이 영검한 기운은 당도하고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