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들에서 난 봄나물로 차려낸 식탁에서 계절의 내음이 물씬 풍긴다. 천년고찰을 찾은 이들의 오감을 즐겁게 하는 충남 예산군 '수덕사 산채정식'이다. 다양한 나물이 가진 고유의 향과 식감은 없던 입맛도 살아나게 한다.
큰 대접에 밥을 넣고 고추장 한 숟갈, 참기름 한 방울 넣어 비벼도 좋다. 된장찌개를 한 술 떠먹으면 세상 그 무엇도 부러울 게 없는 맛이다. 돌솥에 한 밥을 퍼낸 뒤 뜨거운 물을 부은 숭늉까지, 더할 나위 없는 건강밥상이다.
산나물은 채식을 하는 사찰에서 주로 사용하는 식재료다. 부처님 오신 날에는 절을 방문한 불자들에게 나물을 넣은 비빔밥을 대접한다. 수덕사 사하촌 주차장 근처와 일주문으로 향하는 길목 양쪽에는 음식점 30여 개가 모여 있다. 원래는 5~6곳이 수덕여관 아래쪽에서 영업을 하다 지난 1999년 이전한 뒤 산채식당들이 늘어났다.
수덕사는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전 연간 100만 명 안팎이 찾던 곳이다. 지금도 사시사철 뭇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8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중앙식당은 고 최영분 여사의 맏며느리인 정금순(75) 대표가 뒤를 잇고 있다. "1971년 처음 시집을 왔을 때는 어머님이 초가집에 나무걸상을 놓고 된장찌개 백반과 국수, 막걸리같은 걸 팔고 계셨어요. 덕숭산 일대에서 난 산나물을 반찬으로 내놓다가 1999년 이쪽으로 오면서 규모가 커졌죠. 메뉴에 '산채정식'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체계화됐어요"라고 회상했다.
46년 전통의 한일식당을 운영하는 현영희(73) 대표는 "27살 때부터 장사를 시작했는데 한 15년 동안은 계절을 타 여름·겨울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어요. 지금은 사계절 항상 찾아요. 위쪽에서 영업할 당시는 다들 경제사정이 어려우니 고기를 많이 먹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비빔밥과 산채백반을 한 거죠"라고 설명했다.
이어 "소득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지며 육류와 생선, 젓갈 종류를 추가했고, 건강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추세에 따라 더덕구이를 주 요리로 구성했어요. 공기밥을 주던 것도 돌솥밥으로 바꿨고요"라며 변천사를 짚었다.
수덕사 산채정식은 반찬가짓수가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계절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보통 25~30가지로, 네 명이 앉는 식탁에 다 놓기 어려울 정도다. 나물뿐만 아니라 조기구이와 불고기, 야채와 함께 버무린 도토리묵, 버섯구이, 목이버섯, 홍어찜, 우렁무침 등 다양하다.
절반 이상은 나물반찬이다. 고사리부터 취나물, 뽕잎, 고들빼기, 민들레, 달래, 두릅, 냉이, 방풍나물, 줄기상추나물, 오가피, 벙구나무순, 오이꽃나물... 이름을 하나하나 익히며 먹는 것도 재미를 준다.
가장 큰 특징은 '싱싱함'이다. 대부분 인근 주민들이 직접 캐다 팔기 때문에 봄에는 새벽에 딴 나물을 바로 상에 올릴 수 있다. 여름~겨울엔 금방 채집한 것을 끓는 물에 살짝 데쳐 영하 20도에서 얼려 보관한 것을 사용한다. 시간이 지나도 맛이 잘 변하지 않는단다.
한일식당 직원 구명숙(63)씨는 "도시에서 계속 살다 덕산으로 이사 온 지 10년이 넘었어요. 여기는 비법이 다른 게 없어요. 그날 딴 걸 무쳐서 내니까 맛있을 수밖에 없죠. 서울 가락시장을 거쳐 오면 최소 3일 이상 걸려요. 그만큼 신선도가 떨어지는 거에요. 특히 이 지역에서는 쌉싸름한 맛이 일품인 오가피나물이 유명해요. 다른 데선 맛보기 힘들어요"라고 설명했다.
매일 아침마다 요리하는 나물은 종류에 따라 조리법이 조금씩 다르다. 생나물은 푸른색을 유지하기 위해 불 위에 있는 시간을 짧게 하고, 말린 것은 물에 불렸다 간을 한 뒤 약불에 10분 이상 볶는다. 양념은 소금 또는 조선간장, 참·들기름, 다진마늘로 한다.
"간을 할 때 나물이 부드러워질 정도로 잘 주물러줘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어디는 짜고, 어디는 싱겁게 될 수 있어요. 어떤 음식이든지 양념이 잘 배야 맛있어요. 취나물과 고사리 등은 마늘과 식용유를 넣고 잘 무친 다음 프라이팬에서 오래 저어야 해요. 줄기상추는 30분 동안 물에 담갔다 5분 안팎으로 볶아야 아삭한 식감과 색을 유지할 수 있어요."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현 대표의 비법이다.
쌉싸래하면서도 매콤달콤한 더덕구이는 사람 손을 네 번 거친다. 먼저 겉을 박박 문질러 깨끗하게 씻은 뒤, 껍질을 벗기고 방망이로 두드려 편 다음 손으로 찢는다. 질긴 식감을 가진 더덕을 먹기 좋은 상태로 연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고추장과 물엿, 식용유 등으로 양념해 철판에 익히면 완성이다. 따뜻한 밥에 올려먹으면 꿀떡꿀떡 넘어간다.
산채정식은 맛뿐만 아니라 건강까지 챙길 수 있다. 산나물은 섬유질을 함유하고 있어 장 운동에 도움을 주는 식품이다. 고사리는 부기를 빼주고, 칼륨이 들어 있는 취나물은 우리 몸에 불필요한 염분을 배출시킨다고 한다. 더덕이 함유한 사포닌은 해독작용을 하는 성분이다.
잠들어있던 생명이 깨어나는 봄이 다가오고 있다. 2주 정도 지나 메마른 낙엽 사이로 초록빛 새싹이 어김없이 제 몸을 드러내면 산과 들을 찾는 사람들의 손길도 분주해질 것이다. 수덕사에서 만날 수 있는 향긋한 잔치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남 예산군에서 발행되는 <무한정보>에서 취재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