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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동무, 살구 좀 팔라우!" 마당에서 뛰어놀던 임용기(1936년생)는 낯선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고개를 돌리니 군청색 군복에 노랑과 빨강 견장을 찬 인민군 간부들이 서 있었다. 인민군들은 바짝 긴장한 임용기에게 다시 한번 "동무, 살구 좀 팔라우. 돈 줄게"라고 했다. "직접 따가세요" "안 된다우. 동무래 직접 따서 팔기요."

임용기는 할 수 없이 살구나무에 올라가 가지를 흔들었고 인민군들은 살구를 줍기 시작했다. 잠시 후 포대 네 자루에 살구가 가득했다. "동무래, 살구 값이야!"하며 인민군은 빨강색 지폐를 건넸다. 소년은 그 돈을 아버지에게 갖다 드렸다.

다음날 인민군이 또 왔다. 전날과는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들도 살구를 사갔다. 며칠 후에 또 와서, 총 3회에 걸쳐 임용기는 인민군에게 살구를 팔았다. 유난히도 더웠던 1950년 7월 중순의 일이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한달이 채 되지 않은 때였다. 

중산리는 잣고개 전투의 후방 취사장

"여성 동무, 밥 날래 푸라우!" "예." 여기저기서 밥을 푸고, 반찬과 국을 나무통에 담았다. 가마솥을 걸어 밥을 하는데, '쉭'하고 김빠지는 소리가 연방 났다. 마당 여기저기에는 도축한 소들이 널려 있었다. 마을에서 징발한 소를 잡아 국을 끓이고 있었다. 1950년 7월 중순 충북 진천군 이월면 중산리 모습이었다.

중산리의 중복마을은 잣고개에서 전투하는 인민군의 후방 취사장이었다. 밥과 반찬을 만드는 야전식당으로 운영되는 집만 세 가구였는데 여기에는 마을 사람들이 동원됐다. 솥뚜껑을 열자 하얀 김이 올라왔다. 주걱으로 밥을 듬뿍 퍼 둥구먹(멱둥구미의 충북 방언)에 담았다. '멱둥구미'는 짚을 엮어서 속이 깊고 둥글게 만든 곡식을 담는 그릇이다. 개인 도시락은 언감생심이었다. 밥을 담은 멱둥구미와 국과 반찬을 담은 커다란 나무통은 소구루마에 실렸다. "날래 갖다 주라우." 인민군 장교의 명령에 따라 인민군들은 소와 말을 몰아 그날의 점심을 잣고개(진천 봉화산과 문안산 일대에 걸쳐 있는 고개) 지역으로 날랐다.

'쾅쾅쾅' '피융' '따쿵 따쿵' 사방에서 대포 터지는 소리와 소총 소리가 들렸다. 잣고개를 중심으로 국군은 봉화산에, 인민군은 송두리 거먹바위재에 주둔했다. 양측은 잣고개를 놓고 1950년 7월 6일부터 10일까지 전투를 벌였다. 국군 수도사단과 북한군 2사단의 양보할 수 없는 대혈투였다. 송두리 거먹바위재까지 밥을 실어나른 말과 소가 풀을 뜯어 먹는 동안 인민군 병사들은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며칠간 이어진 혈투에 병사들 얼굴이 휑해졌다. 빈 반찬통을 실은 수레에 짐이 늘어났다. 사망자와 부상자 들이었다.

"푸푸"하고 구루마를 끄는 소와 말들이 힘겨워했다. 구루마는 중산리 중복마을에 잠시 들러 빈 그릇을 내려놓고 이월국민학교로 갔다. 부상자는 이월국민학교에 설치된 야전병원에서 치료 받았고, 사망자는 다시 인근 야산으로 옮겨졌다. 지금은 이월면사무소가 위치한 뒷산에 시신이 가매장됐다. 

피난 간 곳이 하필 '전쟁터'

"아버지 어머니, 잘 다녀오겠습니다. 충성!" 임용기의 큰형 임철기(1929년생)는 늠름하게 인사를 하고 고샅길을 나섰다. 그는 1948년 초 국군 7연대에 입대, 빨치산 진압을 위해 제주도와 지리산에 파견되었다가, 청주 부대에 귀환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가 귀대하자마자 6.25가 발발해, 임철기는 안성전투에 투입되었다. 평소에 군복을 입은 형을 자랑스러워한 임용기는 형 때문에 가족들이 고초를 겪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얼마 후 1950년 7월 5일 이월지서의 경찰들은 후퇴하면서 중복마을 주민들에게 "모두 피난 가라"고 했다. 특히 임용기 집안은 가족에 군인이 있어 피난을 서둘렀다. 그래서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제방에 굴을 뚫고 2가구 11명이 은신했다. 그런데 잠시 후 밤이 되자 난리가 났다. 낮에는 조용하던 제방이 밤 9시가 되자 "쾅, 피융, 따쿵" 소리가 났다. 이월면 중산리 야산에 주둔하던 인민군 부대와 봉화산에 주둔하던 국군과의 교전이 벌어진 것이다. 임용기 가족이 피난한 곳이 하필 전쟁터 한가운데였다.

결국 임용기 식구들은 이틀 만에 집으로 돌아왔고 이후에도 불안에 떨어야 했다. 장남 임철기가 현역 군인이기 때문이었다. 임용기의 부모는 골방에 일주일 숨어 있었다. 소년 임용기는 마을 파수꾼 역할을 했다. 아직 어렸던 터라 인민군이 그를 의심하지 않았고 임용기는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임용기는 인민군 야전 본부로 쓰인 이진순(가명) 집에 불쑥 들어갔다. "동무들 수고가 많습니다." "어. 소년 동무구만." 인민군들은 회의를 계속했다. "오늘 저녁부터 전투 장소가 바뀝네다." 이 말을 엿들은 임용기는 그날 저녁 마을 주민들에게 알렸고 사람들은 전투의 정반대 방향으로 피난을 갈 수 있었다. 

쇠스랑과 몽둥이 들고 지서 공격

한국전쟁 발발 몇 해 전인 1947년 7월 중순의 진천군 이월면. "난리가 났다"며 쇠스랑과 몽둥이를 든 청장년 수십 명이 이월지서로 몰려갔다. 하지만 그들은 곧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총과 곤봉을 든 경찰과 청년단원들이 '토끼몰이'를 했다. 그렇게 붙잡힌 이들 일부는 마을 공회당에 구금되었는데 우익청년단원들에게 숱한 뭇매를 당했다. 그 중에는 중복마을 정지복도 있었다.   당시 이월초등학교 4학년이던 임용기는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가다 면소재지에서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이월지서 옆 숙직실 지하에서 신음 소리가 나기에 고양이 걸음으로 다가갔다. 숙직실 지하 기둥에 사람들이 묶여있었는데 매를 맞았는지 바닥에 피가 흥건했다. 

화들짝 놀란 임용기는 숙직실 옆에 있는 우물을 보고 또 기겁했다. 우물 옆 가마니 사이에 사람 발이 '삐죽'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시체인가라고 생각했는데, 잠시 후에 발이 꼼지락거렸다. 그러자 우익패가 가마니를 벗기더니 초주검이 된 사람을 숙직실 지하실로 끌고 갔다.

너무 놀란 임용기는 신작로로 나와 시장통을 지나갔는데 거기에도 무서운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전거포와 기름틀 집을 지나 우체국 옆 빈집 들마루에서 우익패가 사람을 고문하고 있었다. 우익패는 이월지서 습격에 참가한 이의 무릎 사이에 홍두깨를 넣고 발로 밟았다. 지나가는 사람이 모두 보게 공개적인 고문을 한 것이다. 

양잿물 먹고 죽어
 
 이월지서 발포와 우익패들의 좌익테러에 관한 <민보> 1947년 5월 29일자 기사
이월지서 발포와 우익패들의 좌익테러에 관한 <민보> 1947년 5월 29일자 기사 ⓒ 박만순
 

그렇다면 좌익들과 농민들은 왜 1947년 7월에 이월지서를 습격했을까? 이에 관한 직접적인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그해 5월 말 신문기사에서 당시 상황을 유추할 수 있다.
 
지난 12일부터 3일간 충북도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의 약칭) 조사단의 진천군 내 테로(러) 사건보고는 다음과 같다. 즉 5월 1일(메이데이. 노동절)을 계기로 모 우익청년단원들의 동군 내 〇〇〇점 토석, 상신, 가산, (진천)읍 내 각 부락의 가옥과 가구 등을 파괴하고 납치 테로~(중략) 한편 (5월) 7일에는 다수군중이 경찰의 발포를 받아 그중 농민 2명은 중상을 입고 방금 입원 가료중이라 한다.(<민보> 1947년 5월 29일자)
 
1947년 5월 경찰의 발포와 우익청년단에 의한 좌익의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그해 7월에 좌익들이 이월지서를 습격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8월 28일~30일 발생한 좌익들의 이월지서 습격과 보복 테러 역시 마찬가지다.

이 사건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에 대한 좌우익의 찬·반탁 투쟁의 연장선에서 발생했다. 진천과 이월은 일제강점기부터 농민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이 왕성했다. 1946년 9월 27일 진천군 이월면 소재 이월초등학교에서는 근로자대회가 열렸다. 근로인민당계열인 홍가륵, 박용출 등이 농민을 조직해 '신탁통치 근로자 지지대회'를 개최했고 경찰과 싸움을 벌였다.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충북대책위원회, 『기억여행』)

당시 진천군과 이월면에서 우익은 좌익에 비해 열세였다. 때문에 우익은 충주와 음성, 청주에서 국민회, 서북청년회의 지원을 받아 좌익을 공격했다. 특히 충주의 김기철을 중심으로 한 국민회와 대동청년단은 제천 기관구 테러를 감행했다. 그들은 1947년 8월 30일, 진천 이월사건에서 대원 박명섭, 김장렬을 잃기도 했다. 이월에서 좌·우익 간의 투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임용기의 아래의 증언에서도 알 수 있다.

"(이월면) 노원리 신당부락 강해룡이 우익패에게 맞아 견딜 수 없어 양잿물 먹고 죽었어. 그는 수시로 우익패에게 연행되어 구타와 고문을 당했는데,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했지."

1953년경 이월면 야산에서는 유해 발굴이 한창이었다. 군복을 입은 이들이 국군과 교전하다 사망한 북한군의 유해를 발굴했다. 곡괭이 휘두르는 소리와 삽질하는 소리가 연신 났다. 두개골, 갈비뼈, 팔다리뼈 들이 신작로로 내던져졌다. 마치 짐승 뼈를 다루듯 했다. 주민들은 포로 교환을 앞두고 유해를 북한으로 보내는가 보다 했다. 임용기(87세, 진천군 이월면 중산리)는 당시 발굴된 유해가 북한으로 갔을 거라고 했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다.

휴전협정 전후로 대한민국 땅에서 북한군 전사자 유해 발굴은 없었다. 아마도 다른 목적으로 유해를 도둑질하려 한 이들의 행위로 보인다. 진천군과 이월면에서는 해방과 한국전쟁기에 좌·우익, 국군과 인민군 간의 투쟁과 교전이 극심했다. 이월과 진천의 상황을 반면교사로 삼아 한반도가 평화의 땅으로 거듭나길 기대한다.
 
 이월지서 앞에 선 증언자 임용기
이월지서 앞에 선 증언자 임용기 ⓒ 박만순

#잣고개 전투#인민군 취사장#이월지서#이월초등학교#유해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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