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금. 비트코인을 설명하는 별명 중 하나다. 그도 그럴 것이 비트코인과 금은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다. 공급량을 조절하기 쉽지 않다는 공통점이 대표적이다. 수요가 많다고 금을 단기간에 캐낼 수 없듯, 비트코인의 채굴량도 2100만 개로 정해져 있다.
각국 중앙은행이 찍어낼 수 있는 화폐와는 애초부터 구조가 달라 지지자들은 금과 비트코인을 모두 '가치 저장 수단'이라고 여겼다. 둘 모두 주식이나 채권 같은 전통 금융 자산과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가격 면에서 연관성이 떨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비트코인은 금의 '디지털판' 대체재이자 가치 저장 수단으로 자리 잡아가는 듯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 위상에 금이 가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금이 급등하는 동안, 정작 '디지털 금'의 가치는 폭락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주식 등 위험 자산과의 상관관계도 높아지고 있다. 혹자는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로 비트코인의 디지털 금으로서의 가치가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본다.
그런데 정반대의 모습도 나타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화폐 가치가 불안정해지자 두 나라의 국민들은 비트코인을 사재기한 것. 비트코인이 가치 저장 수단으로서 활약한 셈이다. 비트코인이 디지털 금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현상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비트코인이 앞으로 디지털 금으로 활약하게 될지 여부를 떠나,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가 비트코인의 가치를 재평가할 시험의 장이 됐다는 사실에는 틀림 없는 셈이다.
디지털 금? 위험자산?
지난 2월 24일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한 날이다. 동시에 디지털 금으로서 비트코인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한 날이기도 하다. 비트코인 가격은 이날 하루 동안 약 7% 가까이 폭락했다. 러시아의 군사작전 개시 소식에 맥을 못추고 4200만원대까지 고꾸라진 것이다. 비트코인 지지자들은 금융 시장에 불안이 생기면, 투자자들이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안전 자산인 비트코인으로 향할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불안감을 느낀 투자자들은 비트코인을 팔아치웠다.
반면 '전통' 안전 자산인 금은 시장 불안에 반사이익을 얻었다. 올 초 7만원대 초반 가격을 형성하던 금 시세는 이날 7만4000원대를 넘어, 지난 2020년 9월 15일 이후 17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이번 사건뿐만 아니다. 비트코인과 금 시세를 조금 더 멀리서 바라보면 안전 자산으로서 비트코인의 정체성에 더 큰 의문이 생긴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 미국이 기준금리를 인상한다는 소식에 전 세계 금융시장은 얼어붙었다. 시장에 잠재된 공포를 측정하는 이른바 빅스(VIX) 지수는 올해 80% 이상 상승했다. 비트코인이 안전 자산이라면 '비트코인의 시간'이 돌아온 셈이다.
하지만 이 기간 비트코인은 폭락을 면치 못했다. 지난해 11월, 8000만원대 신고가를 달성했던 당시와 비교하면 지난 1월 비트코인 가격은 그의 절반으로 떨어졌다. 29일 현재는 5800만원선까지 회복한 상태지만 여전히 고점보다는 약 30% 낮다. 반면 금 시세는 '위기' 때마다 우상향했다. 지난 8일 한때는 7만9688원으로 연중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렇다 보니 최근에는 비트코인이 금이 아니라 주식 시장의 흐름을 따르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 2017년부터 2019년까지 비트코인 가격과 미국의 S&P500 지수간 상관계수는 0.01이었다. 0이면 두 변수 사이에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는 뜻이다. 반면 1은 두 변수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팬데믹 기간'이라고 불리는 2020∼2021년에는 이 수치가 0.36으로 급등했다.
이는 수많은 기관 투자자들의 가상자산 시장 진입과 무관하지 않다. 손실 회피 성향이 강한 기관 투자자들로선 시장이 불안할 때 상대적으로 위험한 투자 자산을 빨리 정리하려 하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해 기관 투자자들이 가상자산거래소인 코인베이스에서 1조1400억달러에 달하는 가상자산을 거래했다고 밝혔다. 1년 전 거래 규모(1천200억달러)보다 10배 이상 넘게 커졌다.
글로벌 투자사 오안다의 수석 시장 분석가 크레이그 얼램은 "비트코인은 최고의 위험 자산"이라며 "투자자들이 전통적인 피난처를 선호하면서 위험 회피 성향이 시장을 휩쓸었다"고 분석했다. 또 "비트코인이 안전 자산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추측도 많았지만 이번 사태로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새로운 흐름
그런데 상황이 그렇게 간단치만도 않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면밀히 들여다보면, 비트코인이 각국 화폐의 대체제인 듯한 모습도 감지되기 때문이다. 서방의 경제 제재 속에 러시아 화폐 가치가 급락하자 러시아인들이 비트코인을 대거 사들인 사례가 대표적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가시화하자 미국과 유럽연합 등 서방 국가들은 지난달 러시아 주요 은행을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 결제망에서 내쫓았다. 러시아 경제 주체들이 다른 나라와 돈을 주고받거나 금융 거래를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자 루블화 가치는 폭락했다. 지난 7일에는 달러당 151루블까지 떨어졌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루블화는 달러당 70~80루블 선이었다.
루블화가 휴짓조각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더해지자, '루블화 탈출 러시'가 이어졌고 그 돈은 비트코인으로 향했다. 비트코인은 탈중앙화된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각국의 제재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가상자산 데이터 플랫폼 체이널리시스는 지난 2월 28일 하루, 루블화로 구매된 가상자산 거래액이 이전보다 두 배 많은 6000만달러(약 720억원)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지난 3월 1일 비트코인 가격은 하루 만에 14% 넘게 폭등했다.
우크라이나에서도 가상자산 거래가 크게 늘었다. 우크라이나 중앙은행이 개인의 현금 인출 한도를 제한하는 등 제재를 가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전쟁이 시작된 직후 우크라이나 가상자산거래소 거래량은 이전보다 3배 이상 늘었고 비트코인에도 7%의 프리미엄이 붙어 비싸게 거래됐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자국 화폐보다 비트코인을 '안전 자산'으로 여겼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비트코인의 활용도는 점차 커지고 있다. 실제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에 대응하기 위해 가상자산으로 모금 활동을 벌였다. 미카일로 페도로프 우크라이나 부총리는 지난달 26일 자신의 트위터에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지갑 주소를 올렸다. 그렇게 전 세계 각국에서 모인 기부금은 지난 23일 기준 6000만달러(약 720억원)가 넘는다.
가상자산거래소 비트피넥스의 한 관계자는 지난 3일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와의 인터뷰에서 "비트코인은 위험하고 불확실한 시기에도 무너지지 않고 있다"며 "(우크라이나 사태는) 가상자산 시대에 처음으로 맞닥뜨리게 된 큰 충돌이다. (안전자산으로서) 기능하는 비트코인을 볼 시험의 장"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정부 모두 비트코인 활용에 적극적
이처럼 우크라이나 사태로 위험 자산이자 동시에 안전 자산으로서의 모습을 동시에 드러낸 비트코인은 다가올 미래 어떤 길을 걷게 될까. 각기 다른 분석만큼이나 전문가들의 미래 전망 또한 각양각색이다.
먼저 여전히 큰 가격 변동성으로 앞으로도 비트코인이 '디지털 금' 역할을 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당장은 화폐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비트코인을 투자했다 하더라도 전쟁이 끝나면 투자자들이 비트코인을 법정통화로 바꾸려 하리라는 것. 줄리오 코피 노르웨이 난민평의회의 글로벌 디지털 전문가는 "이번 전쟁 전후로 가상자산이 일부 사람들에게는 도움을 줄 수 있겠지만, 추후에 비트코인을 현금으로 전환할 때가 문제"라며 "(러시아·우크라이나) 투자자들이 비트코인에서 빠져나올 때, 그 가치가 너무 많이 평가 절하돼 있지 않길 바란다"고 밝혔다.
가상자산이 불법 행위에 악용될 수 있다는 점 또한 비트코인이 안전 자산으로 변신하는 데 제동을 거는 요인이다. 현재는 비트코인이 우크라이나 정부의 군자금 모금 수단 등 '선한 역할'로 주목받고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실제 지난 1월, 우크라이나 정부의 컴퓨터는 컴퓨터 바이러스의 일종인 랜섬웨어의 표적이 됐다. 비트코인을 주지 않으면 컴퓨터 안에 담긴 데이터를 모두 지우겠다고 협박하는 사이버 공격의 일종이다. 당시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가 그 배후에 있을 것으로 추측했다.
반면 이번 사태로 비트코인이 전 세계적 투자 자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도 나온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비트코인을 적극 활용해 전쟁을 벌이면서 비트코인의 중요성도 그만큼 커졌다는 분석이다.
실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지난 17일 우크라이나에서 가상자산을 합법화 하기로 결정했다. 앞으로 우크라이나에서 가상자산은 다른 투자 자산과 같은 보호를 받게 된다. 러시아 역시 비트코인 활용에 적극적이다. 파벨 자발니 러시아 하원 에너지위원회 위원장은 지난 24일 러시아 '우호국'으로부터 원유와 천연가스 수출 대금을 비트코인으로 받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가상자산 플랫폼 루노의 아야르는 "비트코인은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 한정적으로 공급되는 통화라는 지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가치저장수단으로서 비트코인이 금과 더 효과적인 경쟁을 벌이기 위해선 앞으로 더 많은 소매·기관·국가들이 비트코인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