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는 마음이 편협한 정치가로 권력에 중독되어 자신의 의지와 가치관을 모든 국민들에게 강요하며 이를 수용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제거한다. 권력의 획득과 유지는 그의 유일한 존재 목적이 되어버린다." - (비비안 그린, <권력과 광기>)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한다. 동서가 다르지 않고 한국의 경우는 특히 그랬다. 어렵게 싹이 튼 민주주의가 독재자들의 사나운 칼날에 잘리고 국민은 그때마다 피를 흘려 이를 지키고자 했다. 4ㆍ19혁명이 그랬고 반유신, 반5공투쟁이 그랬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이 극심해지면서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국민의 저항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 선두에는 언제나 학생들이었다. 연세대생 이한열 군은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학생운동의 선두에 섰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졌다. 그리고 민주주의 수호신이 되었다.
그대 가는가 / 어딜 가는가 / 그대 등 뒤에 내리깔린 쇠사슬을 / 마저 손에 들고 어딜 가는가 / 이끌려 먼저 간 그대 뒤를 따라 / 사천만 형제가 함께 가야 하는가 / 아니다 / 억압의 사슬을 두 손으로 뿌리치고 / 짐승의 철퇴는 두 발로 차버리자 / 그대 끌려간 그 자리 위에 / 민중의 웃음을 드리우자 / 그대 왜 갔는가 / 어딜 갔는가 / 그대 손목위에 드리워진 은빛 사슬을 / 마저 팔찌 끼고 어딜 갔는가.
87년 6월 9일 교내시위 도중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에 맞고 쓰러진 연세대 이한열(20살, 경영학과 2학년) 군은 사고 전 자신의 운명을 예견이라도 한 듯 참담한 현실에 대한 자기성찰과 다짐을 담은 위의 습작시를 남겼다.
이한열 군은 6월 9일 오후 5시 5분 경 교내시위 도중 정문 부근에서 전경이 30m 전방에서 쏜 직격 최루탄을 뒷머리에 맞고 그 자리에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최루탄을 피해 달아나던 학생들은 이군이 나뒹구는 모습을 보고 발길을 다시 돌려 3, 4명이 부축해 병원으로 옮겼다.
중환자실에 입원한 이군은 호흡장애를 일으키고 혈압이 급속히 떨어지면서 온몸의 신경이 마비된 상태에서 기나긴 혼수상태가 시작되었다. 20살의 짧은 생애를 '행동하는 양심자'로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이군은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에 맞아 27일 간의 의식불명 상태 끝에 7월 5일 새벽 2시 5분경 끝내 숨짐으로써 6월민주항쟁에 꽃다운 젊음을 바친 희생자로 기록되었다. (주석 1)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진 '군화 신은 광인들'(비비안 그린)의 발악으로 시민들은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마침내 6월항쟁을 가져왔다. 광인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여차하면 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민주화를 짓밟고 사태를 역전시키고자 하였다.
정의구현사제단은 10월 26일 긴급 모임에서 11, 12월을 '군부독재 종식을 위한 민주화 대행진' 기간으로 설정하고 이 내용을 전국교구 사제들에게 발송했다. 민주쟁취국민운동 천주교공동위원회 등과도 논의한 일정이었다.
사제단의 주간별 강론 지향은 다음과 같다.
11월 1일 ~ 7일 민주시민의식 고취주간(나라의 민주화를 위하여)
11월 8일 ~ 14일 부정부패 추방주간(정직한 사회를 위하여)
11월 15일 ~ 21일 민주영령 추모주간
(민주주의를 위하여 쓰러져간 사람들을 위하여)
11월 22일 ~ 28일 민중생존권 수호주간
(가난한 사람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11월 29일 ~ 12월 5일 광주사태 추모주간(공권력의 회개를 위하여)
12월 6일 ~ 12월 12일 공명선거 캠페인 및 부정선거 감시운동주간
(깨끗한 선거를 위하여)
사제단은 위의 캠페인과 동시에 전국 규모의 기도회 일정도 발표. 11월 16일 오후 6시 명동성당의 추모미사와 11월 30일 오후 7시 광주교구 남동성당의 '지역감정 해소 및 민족의 하나됨을 위한 기도회'에 적극 동참을 호소. (주석 2)
현대사 연구가들이 '87년 체제'라 부르는 1987년의 정국은 긴박하게 진행되었다. 노태우의 6.29 선언으로 10월 12일 국회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지만, 당초 약속이 대부분 사장되고 정치상황은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였다. 해서 사제단은 대통령선거까지 무사히 치를 수 있도록 '군부독재 종식'을 위해 11~12월을 '민주화 대행진' 기간으로 선포한 것이다.
사제단은 11월 1일부터 7일까지 첫 주를 '민주 시민의식 고취주간'으로 설정하고〈강론〉에서 "국민의 위대한 잠재력을 응집하여 억압과 불평등, 불의와 증오가 사라진 사회, 민족통일을 향한 전진을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론〉 중 몇 대목을 뽑았다.
노태우 8개항 중 실현된 것은 단 하나 '대통령 직선제' 뿐이었습니다. 그것도 국민들의 정치참여와 기본권ㆍ생존권을 보장할 핵심적인 내용은 대통령 선거법 등 하위법 협상으로 유보시킨 채였습니다. 구속자의 전원 석방과 사면복권은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제스추어에 불과했던 것이 6.29 이후 2천여 명이 추가로 구속되면서 드러났습니다. 이한열군에 이어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씨가 또 다시 최루탄의 희생자가 되었으며, 인간답게 살아보고자 몸부림친 노동자들의 민주노조 건설운동은 정권과 재벌의 야합에 의해 쓰라린 배신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부당 해고된 노동자, 교사, 기자들은 아직까지 단 한 사람도 복직되지 않았습니다. 국민들에게서 분노와 비통의 눈물을 짜내던 최루탄은 그동안 신형으로 개량되어 던져지고 있으며, 경찰 공무원의 억압적, 권위주의적 자세는 여전합니다. 영세민들을 거리로 내쫓는 강제 철거는 다시 재개되고 있으며, 이에 눈물로 저항하는 부녀자와 성직자에게도 최루탄과 각목이 던져지고 있습니다. 반민주적 악법들, 국가보안법, 집시법, 노동관계법, 언론기본법은 폐지되지 않고 있으며 안기부, 보안사, 치안본부에 의한 좌경용공조작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독재권력의 약속은 위기만 모면하면 된다는 사탕발림이지, 항상 깨어있지 않으면 속고 만다는 사실과, 진정한 민주주의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싸워서 얻어야 하며, 확실하게 굳혀야 한다는 점입니다. 주인으로 대접받기 위해서는 주인 된 도리를 다해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주인이라는 말과 함께 국민이 주인 되게(주체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에 있어 주인된 도리를 다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군부독재를 종식하는 일에 조직적으로 참가하는 것입니다. (주석 3)
주석
1> 김삼웅, 앞의 책, 421~422쪽.
2> <암흑 속의 횃불(8)>, 98쪽.
3> 앞의 책, 274~275쪽, 발췌.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연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