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드, 딸기, 양파, 호박, 당근, 사과, 블루베리, 귀리, 오이, 오렌지, 겨자, 감자, 토마토, 키위, 커피, 이들의 공통점은 뭘까요? 벌입니다. 우리 식탁에 이런 채소와 과일이 오르려면 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겨울 끝자락이던 지난 2월부터 전국 양봉 농가 곳곳에서 벌이 집단으로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일명 군집붕괴현상(CCD, Collony Collapse Disorder)으로 불리는 벌들의 집단실종은 2006년 미국에서 처음 보고됐는데, 당시 미 환경보호국은 그 원인을 해충이나 농약 또는 새로운 병원균에 의한 복합 작용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즉 이렇다 할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다는 얘기인데요, 이후 벌집 집단실종은 미국과 유럽 여러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고 우리나라도 2010년에 이어 이번에 또 벌어진 것입니다.
한국양봉협회에 따르면 올해 3월 2일 기준 전국 227만 6600여 개 벌통 가운데 39만 개 이상이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겨울이 시작될 무렵 월동하러 들어가는 벌의 개체 수는 벌통 한 개당 약 1만 5천 마리, 그러니까 전국의 약 60억 마리의 꿀벌이 사라졌다는 게 농촌진흥청 발표입니다.
꿀벌 집단 실종사건의 원인으로는 해충, 살충제와 함께 기후 위기가 조심스럽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가을 저온현상으로 꿀벌이 제대로 발육하지 못했고, 그런 상태에서 12월 이상 고온으로 꽃이 피니 벌이 화분 채집에 나섰다가 체력이 소진되어 되돌아오지 못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해충의 창궐이 따뜻한 겨울과 관련이 아예 없다고 할 수 없고, 그런 이유로 살충제를 남용하며 벌의 생존을 위협하는 악순환이 벌어집니다.
벌이 사라졌을 때 우리 식탁에 오를 수 없는 것은 앞에서 열거한 채소와 과일로 끝나지 않습니다. '쐐기돌'은 무지개 모양의 아치를 만들 때 균형을 잡아주는 마무리 돌을 말하는데, 중력에 저항하며 버티는 돌이 아래로 쏟아지지 않도록 건축할 때 반드시 필요한 돌이지요. 생태계에도 이러한 쐐기돌 구실을 하는 생물이 있습니다. 바로 고래입니다.
고래 똥에 들어 있는 철(Fe)이나 인(P) 성분은 식물성 플랑크톤을 비롯해 바닷새와 어류의 성장을 돕습니다. 바닷새가 육지로 날아가 똥을 누고, 곰과 여우가 연어 같은 회류성 어류를 잡아먹으면 이 성분들은 다시 육지로 옮겨집니다. 인은 식물이 성장하고 열매 맺는 데 꼭 필요한 무기질이기도 합니다. 연어가 숲을 가꾸고, 더 정확히는 고래가 심산유곡의 수려한 풍광을 만드는 셈이지요.
고래가 바닷속 침잠한 물질을 끌어 올려 순환시키며 울창한 숲을 살리는 이치는 지구 생태계가 얼마나 긴밀히 연결돼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포경과 해양오염 등으로 고래 숫자가 급감하면서 고래 펌프가 제 역할을 못 하게 되자 영양 순환의 고리는 툭툭 끊어지고 있습니다.
코끼리는 큰 나무를 넘어뜨려 초원을 유지하고 나무에 있는 미네랄을 땅으로 되돌리는 역할을 합니다. 반달가슴곰과 산양은 씨앗을 멀리 퍼뜨려 숲을 울창하게 가꾸는 가드너 역할을 하지요. 이들이 사라진다면 대량으로 씨앗을 퍼뜨리는 메신저가 사라지고 숲은 황폐해질 겁니다.
올봄엔 도시에 꽃씨를 뿌리자!
벌은 앞에서 언급한 동물들과 비교할 수 없이 작은 몸집이지만 그 역할은 가히 놀랍습니다. 유엔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벌은 세계 식량의 90%를 차지하는 100대 주요 작물 가운데 70종의 꽃가루받이 역할을 합니다.
그중에서도 아몬드는 100% 벌에 수분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세계 아몬드의 60% 이상은 미국에서 생산되는데, 특히 캘리포니아 아몬드 산업은 놀라운 속도로 성장했어요. 2000년 아몬드 농장의 면적은 2000㎢였는데, 2018년에는 두 배로 늘어났습니다.
연분홍색 아몬드꽃이 필 무렵이면 캘리포니아 아몬드 농장에는 붕붕거리는 벌 소리 대신 벌통을 실은 양봉업자들의 트레일러가 줄을 잇습니다. 대규모 아몬드 농장에서 뿌리는 살충제와 제초제로 인해 벌들이 사라지자 벌통을 임대해서 인위적으로 꽃가루받이를 하는 것입니다.
2019년 4월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 발생 당시 성당 옥상에 있던 벌통 속에는 벌들이 무사한 채로 발견돼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파리 시내 곳곳의 유명하고 오래된 건축물 지붕 어딘가에는 이처럼 벌통들이 숨어 있어요. 오르세 미술관, 오페라 가르니에 극장, 그랑 팔레 박물관 등에서 양봉을 하고 있다니 정말 놀랍지 않나요?
도시는 농약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데다, 조경으로 많은 꽃이 피고 지기를 반복합니다. 벌을 불러들이기에 도시가 적절한 장소라는 사실을 인지한 사람들 사이에서 도시 양봉이 유행하고 있어요. 올봄엔 손바닥만 한 공간에라도 부지런히 꽃씨를 뿌려야 할 것 같습니다. 베란다 거치대에 꽃 화분을 두고 도시 텃밭에는 쑥갓이 꽃대를 쭉쭉 뻗어 올리도록 노란 꽃밭을 만들어야겠습니다. 우리도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덧붙이는 글 | 글. 최원형 환경생태작가. 큰유리새의 아름다운 새소리를 다음 세대도 들을 수 있는 온전한 생태 환경을 바란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착한 소비는 없다> 등 저.
이 글은 참여연대 소식지 <월간참여사회> 2022년 4월호에 실립니다. 참여연대 회원가입 02-723-4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