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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기사 "너도나도 부르짖는 '의용봉공', 그 뜻을 아십니까"에서 이어집니다. http://omn.kr/1ysva)

다음으로 '봉공(奉公)'이라는 개념을 살펴보자. '봉공'은 한자문화권에서 예부터 '나랏일을 하다 (공무수행)', '공직에 종사하다'라는 평범한 뜻으로 쓰여왔는데 이때의 '공(公)'은 '나라' 또는 '나라 사람들(공공)'을 뜻했다. 조선왕조실록에만도 3만 6천여 번, 명나라 실록에도 1만 6천여 회의 사용례가 있을 정도로 오랫동안 널리 쓰인 표현이었다.

이러한 쓰임새는 일본도 마찬가지였으나 전국시대(16세기)에 기독교가 전파되며 '하느님을 섬기다'라는 뜻을 새로 품더니 에도막부 시대에는 성리학 이념과 결합하여 하인(봉공인)이 주인을 섬기고, 사무라이가 주군을 섬기는 '개인에 대한 충성행위'로 바뀌는데 이때의 '공(公)'은 남성인 상대방을 높이는 말로써 '주인' 또는 '군주'를 의미했다.

에도시대 말기(19세기 중반)에는 앞서 말한 사무라이의 '의용' 이념을 강조하기 위해 '봉공'과 한데 묶어 그 이전의 한자문화권에서는 쓴 적이 없던 '의용으로써 봉공한다(의용봉공)'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는 사무라이의 주군에 대한 절대적 충성행위를 나타낸 말로 쉽게 말해 '주군에게 목숨을 바친다'라는 뜻이었다.

이러한 근세 무사의 '의용봉공' 사상은 사무라이 계급이 사라진 메이지 유신(1868년) 뒤에도 국민과 천황과의 관계로 바뀌어 살아남는데 1890년에 공포된 '교육에 관한 칙어(교육칙어)'에 천황에 대한 신민의 의무로 명문화되며 제국의 신민지도(臣民之道)이자 군인본분(軍人本分)으로 자리잡는다.

천황의 어명 형식으로 된 이 교육칙어는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반세기 넘게 제국 신민의 기본 교육 이념이었는데 그 내용은 국법의 준수, 부모에 대한 효도, 박애의 실천 등 보편적 도덕이 대부분이었으나 전반적으로 천황 주권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특히 '그대들 신민은 유사시 의용으로 봉공하여 천양무궁(天壌無窮)한 황운(皇運)을 지키라'는 전체주의적 발상이 문제였다. 여기서 '의용으로 봉공하라'는 말은 뒤에 일본의 여러 제국주의 (침략) 전쟁에서 증명되었듯이 '죽음으로 천황과 국가를 지키라'라는 말과 다름없어서 전통적 사무라이 정신의 근대적 계승을 선언한 문구였다.

아래의 <자료 5>가 일본 황실 문어체로 되어 있는 교육칙어 원본인데 붉은색 네모 안이 '의용봉공'을 뜻한다(※ 교육칙어는 나중에 대한제국의 '교육입국조서(1895년)'와 대한민국의 '국민교육헌장'(1968년)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자료5 - ‘교육에 관한 칙어’
자료5 - ‘교육에 관한 칙어’ ⓒ 동경대학교
   
이후 '의용봉공'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부터 1945년 패망 직전까지 진충보국, 멸사봉공 등과 함께 천황과 국가를 위한 자기희생의 결의적 구호이자 군사적 팽창을 위한 독전 이념으로 활용된다. <자료 6>은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출간된 '출사군가(出師軍歌)'라는 일본군 군가 모음 책으로 표지의 맨 윗부분(붉은색 네모)에 '의용봉공'이 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자료6 - ‘출사군가(出師軍歌)’ 표지
자료6 - ‘출사군가(出師軍歌)’ 표지 ⓒ 高田文賞堂
   
<자료 7>은 태평양전쟁 시기의 일본군의 출정 깃발로 맨 위에 '의용봉공'이 쓰여 있다 (오른쪽 글은 '무운장구'이다).
   
 자료7 - 태평양 전쟁 시기의 일본군 출정 깃발
자료7 - 태평양 전쟁 시기의 일본군 출정 깃발 ⓒ AUCRU.COM
   
<자료 8>은 '의용봉공'이 새겨진 일본제국 메달이다.
   
 자료8 - ‘의용봉공’이 새겨진 일본 제국 훈장
자료8 - ‘의용봉공’이 새겨진 일본 제국 훈장 ⓒ AUCRU.COM
   
천황과 국가를 위해 희생한 군인들의 넋을 기리는 '의용봉공 비'도 일본 곳곳에 세워졌는데 <자료 9>는 청일전쟁(1894년) 전몰자를 위령하기 위해 1896년에 세워진 효고현 가코가와시(加古川町)의 '의용봉공지비'이다.
 
 자료9 - 효고현 가코가와시(加古川町) ‘의용봉공지비’
자료9 - 효고현 가코가와시(加古川町) ‘의용봉공지비’ ⓒ 加古川町
   
<자료 10>은 러일전쟁 당시 대한해협에서 전사한 일본군을 기리기 위해 1912년 대마도의 모기하마 해변에 세운 '의용봉공비'(사진 속 오른쪽 부분)이다. (※ 모기하마 해변은 러일전쟁 때 침몰한 군함에서 탈출한 러시아 수병들이 상륙한 곳이기도 한데 사진의 왼쪽은 러일전쟁 당시 발트 함대 소속으로 세간에 금괴를 수송 중이었다고 알려진 장갑함 나히모프호로부터 1980년 인양한 대포이다.)
 
 자료10 - 대마도의 ‘의용봉공’ 비
자료10 - 대마도의 ‘의용봉공’ 비 ⓒ YAHOO JAPAN
 
근대 이전의 우리 역사에는 '의용봉공'이라는 표현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데 이것이 일본에서 수입된 관념인 것은 1905년 주한일본공사관의 학부참여관으로 근무했던 시데하라 히로시(幣原坦)가 본국에 보고한 '한국교육개량안'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이 글에서 '고래로 반도의 경영에 가장 심혈을 기울인 명국(명나라)은 유교를 펴서 인심을 바로 잡았었는바 갑자기 이를 멸절시키고 이에 대신하여 충군애국 의용봉공의 일본적 도덕으로 한다면 재래의 기운에 일치하지 않고 따라서 장래의 국교(國交)를 위태롭게 할 우려가 있다'라고 하여 의용봉공이 일본적 도덕관념임을 밝히고 있다. (그는 본시 교육가로서 한국인을 점진적으로 일본에 동화시킬 목적으로 한국 교육 개량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한국을 상대적으로 고려한 태도여서 이후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해고된다.)

일본의 교육칙어에 명문화된 '의용봉공'은 이후 조선(대한제국)으로도 수입된다. 1909년 대한흥학보(※ 재일 한인 유학생 단체 회보) 제5회를 보면 '일조(ㅡ朝)에 급사(急事)가 유(有)하면 의용봉공(義勇奉公)하야 천양무궁(天壤無窮)한 국운(國運)을 부익(扶翼)하고 지성(至誠)을 치(致)하며'라고 하여 일본 교육칙어의 '황운'을 '국운'으로 바꾼 표현이 등장하며 1911년 계연수가 엮었다고 알려진 환단고기에도 '평양의 을밀대를 세운 을밀선인이 나라에 의용봉공하여 조의(皂衣, 고구려의 관직)가 되었다'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렇게 '의용봉공'과 같은 근대적 표현이 나온다는 이유로 일부 사학자들은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낮추어 보기도 하지만 이를 편저자의 단순 가필로 보는 의견도 많다.)

심지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1921년 대한광복군 참리부 규정 제1조에서 "적의 통치행위를 파괴코져 의용봉공(義勇奉公)하는 광복군의 행동을 주비(籌備)하기 위하야 군무부 직할하에 광복군 참리부를 치(置)함"이라고 하여 광복군의 '의용봉공' 정신을 명시해 놓았는데 임시정부는 이때까지 이 말의 유래와 군국주의적 속성을 미처 꿰뚫어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일제는 이 '의용봉공'을 식민 통치 수단으로 조선사람들에게도 강요하였는데 일찍이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는 자신의 임기 마지막 날이자 한일병탄조약 공포일(경술국치일)인 1910년 8월 29일에 나라를 잃고 슬퍼하는 조선 인민에게 포고문 형식으로 타이르며 말하길 '미납 지세와 사창곡의 환납을 면제하니 조선 민중은 이 은혜를 기억하고 천황에 대한 봉공(奉公)의 마음을 잃지 말라'고 강조한 바가 있으며 조선의 마지막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도 패전을 1년 앞둔 1944년 8월 임시 도지사 회의에서 '이 중대 시국의 시련하에 있어서 2천6백만의 반도 동포가 일본인과 함께 황국의 도(道)를 걸고 의용봉공의 관념 하에 근로 능력의 최대를 기울여 1억 동포가 서로 승리의 광영과 대동아지도의 지위를 같이하게 될 것을 확신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일본 식민지배자뿐만 아니라 조선의 친일 부역 지식인들도 이 '의용봉공' 정신을 부르짖는데 뒤지지 않았다. 대중잡지 삼천리는 1941년 12월호의 편집후기에서 '내외정세는 더욱 긴박해가며, 태평양의 풍운(風雲)이 점차 험악해 가는 이때 우리 2천 4백만 조선 민중은 피를 바치어 나라에 의용봉공 함으로써 미증유의 국난을 돌파하여야 할 결전체제 확립의 시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때에 반도 청년층에서 25만이라는 지원병을 내게 되었다는 것은 실로 경하할 일이다'라고 하였으며, 조선금융조합연합회의 기관지인 '반도지광'도 1942년 6월호에서 '임전병사들 모두는 출정 시 야스쿠니신사에서 다시 만나자는 각오로 의용봉공하여 천양무궁의 황운에 부익하고 자신의 신명을 황실과 국가를 위해 바치자'고 역설하였다. 이밖에도 일제 강점기에 발행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보면 모두 78차례의 '의용봉공' 관련 기사가 나오는데 물론 그 대부분은 천황과 일본제국을 위해 식민지 백성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군사적 부문은 아니지만 '義勇奉公 一すぢに 盟へる 大邱消防の 凛々こき姿譬へなば(의용봉공 오직 하나로 맺어진 대구 소방의 늠름한 모습은)'로 시작하는 1909년 대구소방조(大邱消防組)의 '대구소방가(歌)'를 보면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도 '의용봉공'을 소방의 대표 정신으로 내세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의용봉공'은 이른바 '대동아공영'을 위한 일부 친일 단체의 이름으로도 쓰였는데 괴뢰 만주국의 협화회(協和會) 산하 의용봉공대(1938년)가 대표적이며 조선에서는 정학회(正學會) 산하의 의용봉공단(1941년)이 후방정신대를 조직하는 등의 친일 활동을 벌였다.

아래의 <자료 11>은 1942년 3월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하여 수도 신경의 대동광장에서 열린 국민동원대회에 국무총리 장징후이(張景惠)가 수도협화회(주민조직) 소속 의용봉공대(義勇奉公隊)의 학생구대(学生区隊)를 무장 사열하는 모습이다. [※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만주국은 사회 통합이 큰 과제였는데 이를 위해 관련 단체를 만들고 '5족 협화'(만주족, 한족, 몽골족, 조선족, 일본족) 운동을 벌였다.]    
 
 자료11 - 만주국 의용봉공대 학생구대 무장 사열 장면
자료11 - 만주국 의용봉공대 학생구대 무장 사열 장면 ⓒ 每日頭條

 <자료 12>는 같은 행사에서 의용봉공대가 시가 행진하는 모습이다.     
 
 자료12 - 만주국 수도 신경에서의 의용봉공대 행진 모습
자료12 - 만주국 수도 신경에서의 의용봉공대 행진 모습 ⓒ 每日頭條

이렇게 군국주의 이념으로 강요된 '의용봉공'도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패하면서 결국 갈 곳을 잃고만다. 전후 연합군최고사령부(GHQ)가 '교육에 관한 칙어'의 내용을 문제 삼자 1946년 문부성이 이의 신성시를 금지하였고 1947년에는 헌법과 교육기본법이 제정되고 1948년에는 의회에서 교육칙어의 폐지를 결의함으로써 근대 일본의 국가주의와 천황주의를 떠받친 핵심 윤리였던 '의용봉공'은 현대 일본에서는 일부 극우단체를 제외하면 금기어 수준으로 사멸하게 된다.

그런데 이 글의 처음에서 밝힌 대로 최근에 이 '의용봉공'이라는 표현이 엉뚱하게도 본고장 일본이 아닌 우리나라에서 자주 들리고 있다. '의용봉공' 정신이 소중히 계승해야 할 의용소방대의 기본이념이라는 것이다. '의용봉공'의 부활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나라가 예부터 전통적으로 써왔던 '의용'과 '봉공' 두 단어는 각각 역사적 뜻이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이 둘을 함께 붙여 쓰면 그 기원이 일본의 근세(에도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어 '의용봉공'을 표방하는 대한민국의 의용소방대는 일본의 '무사도(사무라이 문화)'에 정신적 뿌리를 두는 어이없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의용봉공'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에 강요된 전체주의, 군국주의의 어두운 그림자와 제국주의 망령이 짙게 배어 있는 말이다.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 정책을 상징하는 사상이 '대동아공영'이었고 시각적 상징이 욱일기였다면 규범적 상징은 '의용봉공'이라고 할 수 있다. 전후 일본에서도 금기시하고 있는 이 표현을 이제 와 우리가 스스로 되살려 쓰는 것은 과거를 망각한 무지의 탓이 크다. (알면서도 쓴다면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것이리라.)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이 구호 아래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고 죽어갔을지를 생각하면 이 표현은 함부로 써서는 안 되는 말이다. 과거 자신들의 식민지에서 '의용봉공'의 부활을 보는 일본의 지식인들과 우익 인사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역사의 해석에는 깨달음에 가까운 슬기로움이 필요하다. 개인의 삶도 그렇지만 나라의 역사(과거)도 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좌우된다. 의용소방대가 자신들의 기본정신을 일본 무사도에 뿌리를 둔 전체주의(군국주의) 이념인 '의용봉공'에서 찾는다면 의용 소방으로부터 출발한 대한민국 소방의 미래도 과거 일본이 쳐 놓은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의용소방대의 정신적 뿌리는 근세 일본의 무사도 정신인 '의용봉공'이 아니라 공동체가 어려움에 부닥칠 때마다 일어나 자신을 버린 의병 조상님들의 '의용지기(義勇之氣)'에서 찾는 것이 좋겠다. 비록 분야는 달랐지만, 재난(국난) 상황에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공익을 위해 헌신한 그 정신만큼은 의용 소방, 더 나아가 희생 봉사, 살신성인하는 소방 정신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바야흐로 '한일 역전'의 시대다. 빛을 되찾은 지 76년이 지나 반일과 극일을 넘어 초일(超日)까지 바라보는 요즈음에도 아직 일본으로부터 정신적 독립을 하지 못한 듯한 모습들을 가끔 보게 된다. 그때마다 일제가 우리에게 남긴 정신적, 문화적 유습의 끈질긴 생명력을 새삼 느끼게 되는데 그 모든 걸 다 제거할 필요도 다 제거할 수도 없겠지마는 적어도 부정적 잔재만은 떨어버리고 가야겠다.

인터넷 번역기로 영어 'voluntary service(volunteer work)'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자원봉사'라는 결과가 나온다. 일본어로 번역하면 'ボランティア活動'(보란티아 활동)이고 중국어로 번역하면 '志愿服务'(지원복무) 쯤 된다. 일본 사무라이 문화의 그림자가 어른대는 '의용'이란 이름은 이제 역사로 남겨두고 의용소방대의 명칭을 서구를 포함한 현시대의 보편적 관념과 감성에 맞게 '자원소방대(voluntary fire service)'나 '예비소방대(retained fire brigade)' 등으로 바꾸는 것을 고려해 볼 때가 되었다.

오늘도 전국 곳곳에서 국민의 안전을 위해 묵묵히 땀 흘리고 있는 의용소방대원들에게 감사와 존경의 말씀을 드린다.

덧붙이는 글 | ※ 참고 사이트 및 문서
-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 <동경대 사료편찬소> https://wwwap.hi.u-tokyo.ac.jp/ships/shipscontroller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naver.com
- <일본 인터넷 포털 '야후'> www.yahoo.co.jp
- <조선선비와 일본 사무라이> 호사카 유지 지음
- <사무라이의 역사> 다카하시 마사아키 지음(박영철 번역) 등


#의용봉공#의용소방대#의용#봉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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