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새 정부가 출범도 안 했는데 오죽했으면 (노동자들이) 이렇게까지 모이겠나? 다들 하루벌어 하루 먹고 살기도 빡빡한데 윤석열 당선자가 말하는 것마다 반노동 정책뿐이니 어쩔 수 없이 목소리라도 보태려고 온 거다."
부산에서 왔다는 40대 노동자 이아무개씨가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종묘광장 공원에서 진행된 '차별 없는 노동권, 질 좋은 일자리 쟁취' 민주노총 결의대회에 참석한 이유다.
이씨는 "노동자들이 수천 명 모였지만 경찰은 더 많다. 차벽 때문에 어디론가 갈 수도 없다. 오늘의 이 모습을 보면 앞으로의 5년이 솔직히 더 우울할 것 같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서울 도심 곳곳에 차벽과 경찰 배치
이날 이씨를 비롯해 약 6000여 명(주최 측 추산)에 달하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소속 노동자들은 오후 3시부터 새 정부의 노동정책 방향 전환을 촉구하는 결의대회를 진행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의 당선 이후 열린 첫 대규모 집회라 경찰은 이날 오전부터 서울 종로구 통인동 인근 인수위 주변에 차벽을 세우고 경력을 골목마다 배치했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인수위와 직선거리로 약 2km 떨어진 곳에서 집회를 진행해 별다른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앞서 서울시는 민주노총의 집회에 금지 통고를 내렸으나, 전날 법원이 경복궁 앞 고궁역사박물관 도로에서 1시간 동안 299명만 참석하는 조건으로 집회를 허가했다. 이에 경찰은 이날 이른 오전부터 광화문과 경복궁 일대에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경찰 기동대 버스를 대기시켜 언제든 차벽을 만들 준비를 했다. 또 안국역 인근에 차량 검문소와 철제 펜스를 설치해 민주노총의 기습적인 시위에 대비하는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민주노총의 집회가 종묘에서 이뤄진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경찰은 급히 오후 1시 30분께 광화문 일대에 배치해 놓은 134개 부대 경력을 종묘공원 인근으로 이동시켰다.
"노동자에 적대적인 정권과 싸울 것"
오후 3시 20분께 종묘 정문 앞에 설치된 연단에 오른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은 "더 안정적인 공간에서 더 넓은 자리에서 더 많은 조합원과 함께 오늘 자리를 가지지 못해 죄송스럽다"고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 "민주노총과 노동자에 대해서만 적대적 인식을 갖는 이 나라의 정권을 향해 맞서 싸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앞서 민주노총은 지난달 21일 서울 종로구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통합'을 당선 인사로 꺼내 든 윤석열 당선인자에게 통합의 첫걸음은 상대방에 대한 인정"이라면서 "지금이라도 대통령 당선자는 노동자의 목소리에 귀를 열고 노동정책을 구체적으로 내놓아야 한다"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윤 당선자는 같은날 전경련 허창수, 대한상공회의소 최태원, 한국경영자총협회 손경식 등 경제6단체 회장들과 오찬 회동을 갖고 "기업이 성장할 수 있도록 정부는 제도적 방해요소 제거를 최우선으로 하겠다"며 "차기 정부 출범 즉시 80여 개의 대표적인 규제를 폐지하겠다"라고 밝혔다. 경제단체장들은 주 52시간제 유연화, 중대재해처벌법 보완 입법, 최저임금제 개선, 상속세·법인세 완화 등을 요구했다.
양 위원장은 "민주노총은 투쟁하는 조직"이라면서 "윤석열 당선자과 새 정부가 노동자의 권리를 부정하고 재벌과 손을 잡는다면 2500만 노동자와 손을 맞잡고 투쟁으로 맞설 것"이라고 선언했다.
민주노총은 새 정부를 향해 ▲ 모든 노동자에게 차별 없는 노동권, 안전한 일터 보장 ▲ 모든 노동자에게 질 좋은 일자리 보장 ▲ 주 40시간(최대 52시간) 무력화시키는 선택적 근로제 등 노동시간 연장 반대 ▲ 최저임금 차등 적용 반대 및 대폭 인상, 불평등 타파 등을 요구했다.
"노동자에게만 차별 적용 말아야"
이날 집회에는 서울과 경기를 포함해 부산과 포항, 울산, 대구, 광주 등 전국 주요도시에서 최저임금 노동자로, 비정규직 노동자로, 보육교사로, 돌봄노동자로, 공장노동자로 일하는 이들이 모여 윤석열 새 정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이 가운데는 서울에서 배달노동자로 일하는 홍아무개씨도 있었다.
홍씨는 "최근 한달 사이에 배달라이더들이 계속 교통사고를 당해 죽어나가는 소식을 들었다"면서 "배민과 쿠팡이츠 등 플랫폼 기업들이 프로모션이라는 이름으로 배달비를 시간에 따라 마음대로 바꾸고 있다. 이에 대한 개선책이 없으면 배달라이더들이 거리에서 죽어나가는 사고는 계속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주문이 몰리는 점심시간대는 배달비가 달라진다. 당연히 속도경쟁에 내몰릴 수밖에 없다. 문제는 사고가 나도 플랫폼 기업들은 책임이 없다고 팔짱만 끼고 있다는 점이다. 배달노동자 한 명 한 명이 개인사업자라면서 말이다. 안전배달제 등 제도적인 측면의 보완이 이뤄져야 한다."
홍씨가 말한 안전배달제는 배달노동자의 안전을 위해 시간당 배달 건수를 제한하고 배달료를 인상해 일정 수입을 보장하는 제도를 뜻한다.
그러나 이날 집회가 급작스레 종묘 앞으로 잡혀 의외로 피해를 입은 시민들도 있었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종묘관리소 측이 '종묘공원에서 진행 중인 집회로 인해 종묘 관람을 일시적으로 중단한다'라고 발표한 후 실제로 종묘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종묘를 찾은 시민들이 닫힌 문을 보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날 오후 3시 30분께 종묘를 찾은 20대 대학생 정상훈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정씨는 <오마이뉴스>를 만나 "솔직히 말하면 짜증 나는 상황이지만 노동자들이 제대로 말할 곳이 없으니 찾고 찾다 여기까지 온 거 아니겠냐"면서 "야구장에서 수천 명이 모여 치킨 먹고 삼겹살도 구워먹는데 노동자들이 모여 목소리 좀 냈다고 방역법 위반이다 말하는 건 좀 코미디 같다. 차별적인 행태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한편 경찰은 13일 서울 도심에서 대규모 집회를 강행한 민주노총에 대한 수사를 예고했다. 서울경찰청은 이날 "종묘공원에서 불법집회를 강행한 민주노총 소속 주최자 및 주요 참가자 등에 대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및 감염병예방법 위반 혐의로 수사에 착수했다"면서 "불법행위에 책임이 있는 대상자들에게 신속히 출석을 요구하는 한편 채증자료 분석 등을 통해 엄정 수사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