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 정말 이해를 하려 해도 할 수가 없다. 백내장 수술을 받은 지 불과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엄마는 기어코 한 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시골에 있는 밭에 가 나물을 뜯어 오셨단다. 나의 단전 깊은 곳에서 화딱지가 올라온다.
"아니, 수술해서 조심해야 되는데 거길 왜 가!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나름 조심하신다고 분홍색 리본이 묶여 있는 챙 넓은 모자와 선글라스를 끼고 다녀와서 괜찮다는 엄마의 말은 나의 화를 더 돋우고 있다. 꽃놀이 갈 때나 입을 듯한 사랑스러운 핑크색 모자에 선글라스를 끼고 시골 밭에 쭈그리고 앉아 나물을 캐는 모습을 상상해 보니 기가 막힌다. 동네 사람들이 봤다면 비웃음을 사고도 남을 옷차림이다.
밭일과 건강을 맞바꾼 엄마
엄마가 젊었을 때까지만 해도(이때도 엄마는 이미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였다) 시골에 있는 작은 밭에 옥수수며 콩이며 깨 등등 온갖 밭작물을 심어 하루가 멀다 하고 밭으로 출근 도장을 찍었다. 밭일에는 당최 취미가 없어 집에서 쉬고 싶어 하는 아빠를 앞세워 억지로 끌고 가는 일이 다반사였고 '아빠는 애기 장난하듯 일을 한다'며 핀잔을 주었던 엄마는 결국, 건강한 무릎과 밭에서 나오는 농작물을 맞바꾸고 말았다.
지금은 엄마도 아빠도 일흔을 훌쩍 넘겨 아빠는 차를 팔아 운전을 하지 않으시고, 엄마는 무릎 수술을 받고 허리도 아프셔서 밭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밭은 다른 사람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대여를 주고, 자투리 밭만 우리 걸로 남아 있는 상태였다. 왕복으로 두 시간이 넘게 버스로 오가는 길도, 시작하면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일해야 하는 밭일도, 수확한 농작물을 이고 지고 가지고 오는 것도 엄마와 아빠에게는 이제 무리가 되어 버렸다.
가끔 오빠가 부모님을 뵈러 오면 오빠를 대동하여, 정확히 말하면 오빠 차를 대동하여, 밭이 잘 있는지 확인하러 가끔씩 가곤 했다. 차가 없는 나는, 엄마가 밭에 꼭 가야 하는 일이 생기면 '엄마의 텃밭 스케줄'을 오빠나 언니에게 알려주는 소식통 역할을 했다.
그런데 말도 없이 버스를 타고 밭을 다녀왔다는 거다. 찻길 쪽에 있는 밭의 끝자락에는 두릅나무가 몇 그루 있다. 나는 흔하게 보는 다른 나무들과의 차이점을 전혀 알아채지 못해 저게 두릅인지 뭔지 모르겠던데, 두릅이 자라 먹을 때가 되면 차를 타고 길을 가던 사람들이 귀신 같이 알아보고 두릅을 훔쳐가는 일이 종종 있다. 날이 따뜻해지면서 두릅이 이제 웬만큼 자랐을 거라는 지레짐작을 한 엄마는 '내 두릅은 내가 지킨다'며 기어코 두릅을 따러 밭행을 강행한 거다.
안타깝게도 두릅은 이제 빼꼼 나오기 시작해서 따올 만한 게 없었고, 언젠가 심어놓았다는(이것도 심어놨다는 거 보니 언제 몰래 가서 씨를 뿌리고 오신 모양이었다) 달래가 자라서 달래를 캐오셨단다. 달랑 달래란다. 아... 왔다 갔다 차비가 더 들었겠다.
당신이 지금 이렇게 아픈 건 8할이 밭 때문이었다며 '그때 밭에 다니지 말았어야 했다'를 입에 달고 사는 엄마는 그렇게 또 밭을 다녀오셨다. 이해하려 해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그깟 두릅, 그깟 달래 때문이라니.
백내장 수술이 잘 아물긴 했다지만 아직은 자외선을 조심해야 하고, 일하다 눈에 흙이라도 들어가면 어쩌려고 저런 무모한 모험을 강행한 걸까. 집으로 돌아와 달래를 정리하고 있다는 엄마의 목소리에는 피곤이 가득하다. 아, 또 단전에서 화딱지가 올라온다. 괜히 무리해서 일하고 몸살이나 나지 않아야 하는데 걱정이다.
딸이 시어머니 같다는 엄마
한국에서 나고 자란 딸들에게는 '걱정'이 '화딱지'로 생리적 변화를 일으키는 유전자가 있는 모양이다. 걱정이 되는데 머리에서 열이 올라온다.
"아니 그러니까 거길 왜 가!!"
한바탕 잔소리를 쏟아내고 나서야 나의 화딱지는 조금 누그러들었다. 엄마는 '시어머니 같은 잔소리' 그만하라신다. 난 아직 며느리도 안 돼 봤는데, 시어머니 같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니까 다음에는 같이 가자고!'를 끝으로 나의 잔소리는 마무리되었다.
다시 생각해도 엄마의 행동은 이해되지 않지만, 건강에 좋은 두릅을 따서 아빠도 챙기고 쟁여두었다가 자식들 주려는 엄마의 마음이 고생스럽고 비이성적 모험을 강행하게 만들었을 거다. 아마도 이게 엄마 사랑의 방식이겠지. 하긴 엄마라고 맨날 집에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화가 잦아드니 엄마의 마음에 조금씩 공감이 된다.
다음에 가족들이 모이면 같이 밭에 가서 두릅을 따와야겠다. 달랑 몇 그루의 두릅나무를 지키기 위한 엄마의 '두릅 사수기'에 다 함께 동참해야겠다. 엄마의 사랑이 듬뿍 담긴 두릅으로 우리 가족의 건강을 지켜낼 거다. 갓 따온 두릅을 살짝 데쳐 초고추장에 찍어 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