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자 그룹 '워킹맘의 부캐'는 일과 육아에서 한 발 떨어져 나를 돌보는 엄마들의 부캐(부캐릭터) 이야기를 다룹니다.[편집자말] |
한 달 전 어느 주말, 아이를 따라 놀이터에 나가 있을 때였다. 종종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며 인사를 나누던 이웃 주민이 말을 걸어왔다. 딸이 올해 초1이 되어 우리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방과 후 수업부터 근처 학원, 학교생활과 관련된 여러 가지를 물어왔다. 나라고 뭘 잘 아는 건 아니었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해서 우리 아이가 1학년을 보내며 알게 된 것을 공유했다.
내가 속해 있는 여러 단톡방에도 이제 막 초등학교 학부모가 된 이들의 질문이 종종 올라온다. 아이가 시행착오 없이 효율적이고 안정적으로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 가득 느껴진다. 1년 전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막막했던 나의 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많은 일하는 엄마들이 그렇듯 나는 동네에 아는 엄마 하나 없었고, 아이의 학교생활에 대해서도 막연한 걱정만 있을 뿐 아는 것도 물어볼 곳도 없었다.
코로나라는 특수 상황도 있었고 아이가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껴둔 육아휴직까지 냈지만, 막상 휴직 직전까지 야근하느라 입학 며칠 전에야 급히 책가방을 구매하는 등 정신없이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일하면서 아이의 학습은 기본이고 독서 습관 등 각종 생활 습관이며 친구 관계까지 완벽하게 챙기는 알파 맘도 있다지만 나는 그런 엄마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고 내 일에 늘 바쁘게 지내왔다.
모처럼 휴직했으니 이 기간만이라도 편안하게 뛰어놀게 해 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아이의 생활을 챙기면서도, 가끔 지인들을 만나거나 지인의 소개로 가입한 교육 커뮤니티의 단톡방에 쏟아지는 학습 정보들을 볼 때면 내가 너무 현실을 외면하고 아이를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중에 후회하게 될까 봐 걱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만의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아이
놀이터에서 해 지는 줄도 모르고 몇 시간이고 함께 뛰어놀던 아이들도 2학기가 되자 너도나도 영어학원에 등록했고, 2학년이 되면서 하나둘씩 모습을 감췄다. 언론 보도나 지인들의 입에서 듣던 '놀이터에 친구가 없어서 학원에 간다'라는 말이 실감 났다. 학원 상담도 받아보고 또래를 키우는 지인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물어도 보았지만, 아이가 2학년이 되고 나도 복직한 지금도 아이 공부는 학교 복습 위주로 직접 봐주고 놀이터 시간을 가능한 한 보장해주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아이의 교육에 관심 없는 엄마가 어디 있을까? 학원이나 학습지 같은 사교육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는 건 아니다. 언젠가 필요하면 적당히 활용할 생각도 있다. 나름의 소신으로 아이들을 키우는 모든 부모의 가치관을 존중한다.
공부량과 독서량이 많아서 아는 것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똑똑한 아이들이나 자신만의 특출한 재주를 가진 아이들을 보면 부럽다. 나도 모르게 비교의 마음으로 아이에게 불안을 투사하는 실수를 한 적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아이와 지난 1년간 부대껴가며 평범하고 다소 느린 아이의 특성에 맞는 우리만의 방식을 찾았고 이제 1학년이 된 아이를 두고 막막해하는 분들에게도 그 경험을 솔직하게 들려주고 있다.
아이는 매사 빠른 편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학원이나 학습지보다 아이에게 맞는 속도와 양을 찾기 위해 직접 챙기는 방식을 선택했다. 비록 학원에서 배우는 것보다는 엄청나게 적은 양이지만 꾸준히 배운 것을 복습하는 정도로 공부 습관을 유지하고 나머지 시간을 자유롭게 열어둔 결과, 아이는 학교생활에 두루 잘 적응하고 있다. 놀이터에서 열심히 놀더니 사교성도 좋아져 아이를 찾는 친구도 생겼다. 주말이면 내 전화로 아이를 찾는 연락이 수시로 온다.
2학년이 되자 받아쓰기와 수학, 국어 단원평가, 일기와 독서록 같은 학교 숙제와 시험이 추가되었다. 마냥 더디고 서투르게만 보였던 아이였지만 예상보다 선방하고 있다. 예전에는 딴짓, 멍하게 있느라 시간이 걸렸다면 요즘은 문제를 보며 생각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일기도 마지못해 한 줄 쓸 때도 있지만 마음이 동한 날에는 개성 있는 그림과 함께 부쩍 정확해진 띄어쓰기와 글솜씨를 보여준다. 모두가 아이가 지난 1년간 스스로 조금씩 쌓아 올린 결과다.
그리 빠르다고는 할 수 없는, 아니 다소 느린 편이지만 시간을 충분히 주고 기다리면 아이는 늘 자신만의 속도로 포기하지 않고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당장 눈에 띄지 않았을 뿐, 어느 정도 시간과 거리를 두고 지켜보다 보면 아이는 분명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이의 꾸준한 모습이 만든 성장을 목격하고 그동안 조바심을 냈던 내 모습을 돌아보며 한 권의 그림책이 생각났다. 이자벨 미뇨스 마르틴스가 쓰고 야라 코누가 그린 <씨앗 100개가 어디로 갔을까>이다.
기약 없는 막막함, 결과를 보장할 수 없는 과정에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며 과연 지금 성장하고 있는지, 이것이 과연 씨앗을 틔우고 나무로 자라나게 될지 아이를 보며 불안하고 막막하고 모든 부모에게 읽어주고 싶은 책이다.
가망 없어 보이던 씨앗들의 반전
커다란 침엽수 한 그루가 세상에 씨앗을 퍼트리기 딱 좋은 날, 적당한 날을 기다린다. 나무는 그날을 위해 매서운 추위를 조용히 견디고, 비가 내리고 확신이 들지 않는 날을 보내고, 타는 듯한 더위가 물러가기를 기다린다.
마침내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오는 완벽한 순간, 씨앗 100개가 세상으로 날아간다. 그 씨앗들은 멋지게 땅에 내려앉았다. 이제 나무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 또다시 중요한 순간을 기다리는 일을 시작한다.
애석하게도 씨앗 100개가 모두 멋지게 싹을 틔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는 도로 위에 떨어지고, 또 다른 씨앗들은 강물에 빠진다. 바위에 떨어진 것과 새들의 먹이가 되는 것들도 있다. 어렵게 세 개가 싹을 틔웠지만 살아남은 건 겨우 하나. 그것조차 토끼에게 먹혀 버린다.
작가조차 여기서 '눈물 좀 닦고 갈게요'라고 말할 정도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이어서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며 가망 없어 보이던 씨앗들의 반전이 하나하나 펼쳐진다. 기다림은 그렇게 마법이 된다.
즉각적인 반응만을 기대했던 내게 지난 1년은 알려주었다. 아이를 믿고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때를 기다리면 결국 어떤 마법이 일어날 수 있는지. 도무지 희망이 없을 것 같은 때라도 적절한 때를 기다리며 씨앗을 뿌려두고 마음을 다해 기다리면 그 씨앗은 스스로 힘을 내고 상황의 도움을 얻어 귀한 싹을 틔울 수 있다는 것을.
아이의 노력이 작은 싹으로 모습을 드러내 기쁘면서도 나무로 자랄 때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또한 나무가 가장 잘하는 일이다. 매서운 추위, 타는 듯한 더위, 도무지 싹으로 자라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도 큰 나무가 될 가능성을 품은 씨앗은 때를 기다리며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려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고 싶다. 조바심과 흔들림 대신 믿음과 응원의 마음을 가득 품고 아이의 조용한 성장을 기다린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저의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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