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라디오에서 한 가수가 육아의 기쁨을 말하는데, 나는 의심부터 했다. 에너지 넘치는 세 살 아이 발에 차이고, 집이 엉망이 되어도 그 모든 것이 예쁘기만 하다고. 정말? 기쁘기만 하다고? 독박육아는 아닌가 보네.
낮에 라디오 게스트로 출연했고 매일 저녁 라디오 디제이도 한다는 걸 보니 커리어도 이어가고 있구나. 아무리 그래도 행복하기만 하다고? 진짜? 가수는 시누이가 아이를 돌봐줘서 일도 할 수 있다며 고마움을 전했지만 나는 삐딱해지고 만다. 삐뚤어질 테다.
흔히 듣는 말에 과민 반응한 이유는 출산 후 아이를 돌보는 내내 가장 궁금했던 게 이거였기 때문이다.
"왜 아무도 나한테 말 안 해 준 거야?"
남들은 괜찮은 거 같은데, 나는 왜 이래
아이를 낳기 전에는 생명을 책임지고 돌보는 일의 무게를 감히 가늠하지 못했다. 아이는 알아서 큰다는 말을 믿었다. 남들 다 하니까 나도 당연히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심지어 잘할 거라 자신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꽉 찬 미소의 엄마+똑 부러지게 맡은 일 해내는 커리어 우먼+우아하고 사랑스러운 아내 = 미래의 나 (feat. 육아서 따라 잘도 크는 아이). 이 공식은 출산 한 달만에 진작 찢어버렸어야 할 판타지임을 알게 됐지만 흉내라도 내고 싶었다. 아니, 그렇게 보이고 싶었다.
육아 경력 7년 차로 접어든 지금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아이는 절대 그냥 크지 않는다. 먹는 것, 자는 것, 싸는 것, 입는 것, 덮는 것 하나하나 세심한 돌봄이 필요하다. '애 by 애'는 진리다. 달걀 섞인 음식은 모두 토한다는 걸 잊지 않아야 하고, 집 먼지 진드기에 예민하니까 병원에서 알려준 대로 매주 뜨거운 물로 이불 세탁은 필수다.
걷고 말하기 시작하면서는 하나하나 다 가르쳐야 한다. 똥 닦는 법은 물론이고 사람을 때리면 안 된다는 것, 지금 너의 감정을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까지 모두 다. 부담이기도 행복이기도 했다. 그 모든 게 '고립'과 '단절' 상태에서 이루어진다는 건 숨 막혔다.
새로 이사 온 동네라 아는 사람 없고, 지하철 없는 동네라 유아차 끌고 집 주위만 뱅글뱅글 돌던 그때. 누구나 다 겪는 일이고 다 그렇게 산다는 말이 기막혔다. 남들은 다 괜찮은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래?
바깥세상 소식은 휴대전화로만 접했는데, SNS에는 신명 나고 귀엽고 재미난 육아로 가득했다. 곧 괴로워질 순간도 -아이가 밥을 머리에 뒤집어썼거나 화장실 변기 안에 들어가 있거나- 발랄하게 표현돼 웃음 짓게 만들었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씻기고 제발 좀 자라 소리 지르는 모습은 드물고, '우리 아가, 미안해' 사과하는 모습은 흔했다.
SNS를 주로 밤에 하는데, 천사가 따로 없는 아이의 자는 얼굴을 보면 절로 다짐하게 되니까 그럴 것이다. 내일은 화내지 않으리. 나도 육아 초창기에는 아이 아빠와 아이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너네는 잘하고 있으니 나만 잘하면 되겠네, 자기 비하를 살짝 가미한 자랑질을 올리곤 했다. 거짓은 아니다. 일부의 진실이다.
내 안에는 원망, 억울함, 외로움 같은 감정들도 있었는데, 얘네한테는 좀처럼 바깥 구경을 시켜주지 않았다. 내가 아이를 싫어한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맨날 좌절하고 우울해하는 줄 알면 어쩌지? 남들이 말 안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 어쩌다 힘든 감정을 내비쳐도 마지막에는 '그럼에도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이'로 마무리했다. 그래야 찜찜함이 사라졌다.
언니, 왜 나한테 말 안 해줬어요?
육아로 코로나로 미루고 미루다 오랜만에 만난 선배에게 물었다. 아이와 사는 게 이렇게 힘들다는 거 왜 말해주지 않았냐고. 내가 결혼도 하기 전에 영유아기 육아를 경험한 까마득한 선배는 말했다. 아기 시절에는 그 상황을 말하고 기록하거나 해석할 정신도 시간도 없었다고. 숨 돌릴 여유가 생기니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하긴 육아인이 되기 전의 내게 무슨 말을 한들 들렸을까. 사실, 엄마로 사는 감정을 말하려면 하나의 상황이나 단어로는 설명도 안 되고 이해도 안 된다. 프랑스 그래픽 노블 <익명의 엄마들>에서, 동명의 모임에 나온 한 엄마는 엉엉 운다. 아이가 밥숟가락을 집어던지며 '엄마는 똥이야' 하고 깔깔거리길래 아이에게 또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고 말하면서. 예전의 나라면 이런 장면을 보고도 '이게 울 일인가, 이게 소리 지를 일인가, 녀석 꽤 개구쟁이네' 하고 말았을 거다.
지금의 나는 눈물이 핑 돈다. 그 이면의 노동, 고립, 단절, 존재의 상실이 상상돼서. 그러니까 이전의 내가 '그게 울 일인가' 했던 건 배경지식과 상상력이 부족해서였다. 문화적 관념 안에서 허용되는 정보만 제공되는 세상이라서. 엄마의 부정적 감정 표현이 암묵적으로 금지된 -또는 순화된- 세상에 살고 있어서.
사람들은 각자의 상황이나 기분, 필요에 따라 온갖 감정 중 그 순간 가장 강한 것만 겉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그런데 육아만큼은 마냥 좋다고 하는 것은 허용되어도 마냥 싫다고 했다가는 위험 인물로 간주된다. 말하는 사람도 왠지 모를 죄책감에 시달린다.
'엄마됨을 후회함' 책 표지를 엎어놓은 이유
엄마들의 다양한 감정을 이야기하는 책을 찾아다니다 <엄마됨을 후회함>이란 책을 골라서 잠자리에서 뒤적였다. 그렇지 후회할 수 있지. 후회의 표현이 사회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있지. 추임새를 넣어 읽다가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놓는데, 제목이 보이지 않게 엎어두는 나를 보고 어이가 없었다.
생각과 행동의 모순. 배우자가 보고 내가 엄마 된 것을 후회한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하지? 찰나에 그런 마음이 들었던 거다.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나 <게으름 예찬>을 읽으면서 저 여자 축구 시작하는 거 아냐? 무작정 게을러지려는 거 아니야? 이런 걱정을 할까 봐 신경 쓰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사회가 정해놓은 올바른 엄마의 내면화는 이렇게 강하다.
얼마 전 둘째를 낳은 연예인 유튜버가 "둘 키운다는 게 이렇게 힘들다는 거 왜 아무도 나한테 얘기 안 해줬냐"며 울먹였다. 첫째도 자신도 너무 힘들다고. 이런 이야기를 응원하는 건 다양한 감정이 공유되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아이 낳고 행복한 이야기만 하는 사람에게 내가 속 좁게 눈 흘기는 게 싫다. 의심 대신 열심히 고개 끄덕이며, 수많은 이야기 중 하나로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다.
부정적 감정들도 반가움이 아닌, 공감으로 함께 아파하며 응원하고 싶다. 그래서 아무도 나한테 그런 말 안 해줘서 내가 한다는 엄마들의 경험담이 잔뜩 필요하다. 이렇게 말해도 될까 머뭇거리는 나를 포함한 엄마들에게는 당신의 말이 진실이라고 말하고 싶다.
"기꺼이 논쟁에 휘말리는 여성과 엄마들은 언젠가, 어떻게든, 무언가를 바꾸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그럴만하다." (<엄마됨을 후회함>, 오나 도나스, 반니, p.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