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후 2시에 침산국민학교에서 합동연설회가 있을 예정입니다. 시민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를 바랍니다."
확성기를 매단 지프차가 대구시 침산동 마을 어귀에 진입하자 조무래기들이 반겼다. 합동연설회 안내방송과 더불어 대구시 갑선거구에 민국당으로 출마한 최윤동 후보 지지 요청 방송이 이어졌다. 1950년 5월 말 햇볕은 따가웠다. 1948년 5월 10일 치러진 제헌의회 선거에서 대구갑에 한민당으로 당선된 최윤동이 재선을 위해 출마한 것이다.
민국당 후보 선거운동원이 되어
대구 침산동에 소재한 태양방적 임원으로 있던 김수경(1920년생)이 최윤동 선거운동에 열을 올린 데는 이유가 있었다. 김수경이 1948년 남대구경찰서에 구금되었을 때, 부친 김성근이 지역구 국회의원 최윤동에게 하소연했다. "의원님. 내 자식 좀 살려 주이소." 최윤동은 흔쾌히 김성근을 앞세워 대구경찰서로 갔다. 현직 국회의원의 위세 덕분인지 김수경은 그날로 석방됐다.
이런 전력 덕분에 김수경은 1950년 초 대구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 보도연맹은 '대한민국에 충성을 서약한 반공단체'였다. 그 후 몇 달 만에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고 김수경은 2년 전 일에 보답하기 위해 최윤동 선거운동에 소매를 걷어부쳤다.
지주와 자본가 중심으로 1945년 9월 16일 창당한 한민당은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29석을 얻어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이어 제1야당의 위치를 점했다. 하지만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의 갈등이 심화되어 위상은 갈수록 하락했다. 이에 한민당은 지청천의 대한국민당과 신익희의 한독당과 합당해 1949년 2월 10일 '민주국민당(민국당)'으로 새롭게 출범했다.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24석으로 대한국민당과 공동 1위를 했으나, 무소속이 126석을 얻어 소수정당으로 전락했다. 최윤동은 이 선거에서 패배의 쓴맛을 보게 되었다. 두 달 후 선거운동원 김수경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겪었다.
화병으로 죽은 아내
"영호 야는 와 이리 이쁘노!" 돌도 되기 전 죽은 딸 때문인지 김수경은 아들 영호를 무척이나 귀여워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보도연맹원들을 예비검속한다는 소문이 나돌자 그는 우선 몸을 피했다. 며칠 피해 있는 사이에도 그는 아들 영호가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뭔 일이야 있겠나' 싶어 집에 들른 그는 아들의 방긋거리는 얼굴을 보자 입이 귀에 걸렸다. 아내 정애순 역시 웃음꽃이 피었다.
하지만 몇 차례 허탕을 쳤던 대구경찰서 경찰은 방안에서의 웃음소리에 쾌재를 올렸다. 경찰은 김수경을 뒷결박을 지어 끌고 갔다. 김수경과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된 보도연맹원들은 1950년 7월 31일부터 8월 초까지 경북 달성군 가창골 등지로 끌려가 학살당했다.
시신 수습은 언감생심이었다. 남편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뒤부터 정애순은 말을 잃었다. 눈동자에 초점도 잃었다. 시난고난 앓던 그녀는 아들이 11살 되던 1959년에 세상을 떴다. 4.19혁명이 일어나 제4대 국회가 한국전쟁 당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이들의 실태조사를 벌이기 1년 전의 일이다. 아들과 며느리를 먼저 앞세운 김수경의 어머니 안정순은 경북도청 사회과에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신고했다.
"담배 한 갑 사다 주소"
한 살짜리 자식을 놓고 죽음의 계곡으로 끌려간 이는 또 있었다. 경북 청도군 청도읍에 살던 한농수(1921년생)도 그랬다.
6.25가 나자 보도연맹원들을 예비검속하라는 상부의 지시에 청도읍 유천지서 경찰은 한농수 집을 두 번이나 찾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한농수는 집에 없었다. 세 번째 만에야 한농수를 잡은 경찰은 그를 유천지서로 연행했다. 아내 황필순(1921년생)은 그날부터 삼시세끼 밥을 해 지서 옆 창고로 날랐다.
"담배 한 갑 사다 주소"라는 남편의 부탁에 그날 저녁 황필순은 담배를 내밀었다. 한농수는 담배를 피기는커녕 한숨을 토해냈다. "와 그러십니꺼?"라는 아내의 물음에도 답이 없던 그가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내 아무래도 여서(여기서) 못 나갈 것 같다."
얼마 후 황필순이 아침밥을 해 나르느라 유천지서 옆에 살고 있는 남편의 누나 집에서 밤을 보내는데, 새벽녘에 트럭이 지나가는 소리가 연신 났다. '뭔 트럭이 아침부터 다니노?'라는 생각은 기가 막힌 현실이 되었다. 그 트럭 적재함에 남편 한농수가 있었던 것이다. 1950년 7월 한농수는 경북 청도군 청도읍 승학골에서 불법학살당했다.
보도연맹원들이 승학골에서 죽었다는 소문을 들은 가족이 현장을 찾았다. "아이고, 경화 아버지요"라고 비명을 지른 황필순은 남편의 가슴에 자그마한 구멍을 발견했다. 상체를 안으니 핏물이 주르륵 흘렀고 등짝에는 사람 머리통만한 구멍이 나 있었다. 남편을 마지막 면회할 때 건넨 담배는 뜯지도 않은 채로 피로 얼룩져 있었다. 딸 한경화(1949년생)가 세상에 태어난 지 7개월 만의 일이었다.
보도연맹원은 사망신고가 안 돼?
보도연맹사건으로 아버지를 잃고, 화병으로 사망한 어머니 때문에 김영호는 11세에 천애고아가 되었다. 소년 김영호는 친척 집에 양자로 갔지만, 눈총 때문에 1년 만에 그 집을 나왔다.
김영호는 2019년 대구광역시의 한 구청을 방문했다. 국가폭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아버지 김수경의 사망신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구청직원은 "사망신고를 하시려면 2명의 인우보증인이 있어야 합니다"라고 했고 그는 서류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아버지의 사망 이유와 시기를 정확히 알고, 이를 보증하려면 같은 가족이거나 절친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인우보증 양식에는 인감증명서와 인감도장의 날인도 들어갔기에 더욱 그랬다. 김영호는 고모와 고모부에게 부탁해 인우보증서를 구청에 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직원이 "사건 당시 만 19세 이상의 성인만이 인우보증서 대상자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김영호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했다. 그 낯빛을 보고 구청 직원은 "그러면 우선 아버님 실종신고부터 하시죠"라고 말했다. 참고 참던 김영호의 화가 폭발했다. "6.25 때 국가가 우리 아버지를 죽였는데, 실종신고라니. 이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머쓱해진 구청 직원은 대구지방법원에 문의했다. 법원 직원의 말은 더 기가 막혔다. "보도연맹원으로 죽은 이들은 사망신고가 안 돼요"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 말의 진의가 진실화해위원회로부터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이만이 호적정정을 할 수 있다는 뜻인지, 빨갱이로 죽은 국민보도연맹원은 아직 사망신고를 할 수 없다는 뜻인지는 불분명하다.
김수경의 사망신고 시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김영호의 어머니 안정순이 1960년 제4대 국회에서 접수한 <양민학살 신고서>를 제출한 것이 첫 번째였다. 그리고 1975년 경 김수경·정애순의 혼인신고, 김영호의 출생신고, 정애순의 사망신고 등 7개 서류를 대구시 동구청에 제출했다. 나머지 서류 6개는 처리되었으나 김수경의 사망신고서만이 처리되지 않았다. 담당 직원은 "이것은 지금 안 됩니다"라며 반려시켰다. 1980년대에도 다시 한번 시도했지만 통과되지 않았다. 2018년의 시도가 무려 네 번째였다. 김수경의 사망신고서가 처리되어 망자의 원혼이 편안히 쉴 수 있는 때는 언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