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 산다. 지근거리에는 마포중앙도서관이 있는데 이따금 그곳에 가서 필요한 책을 빌리기도 하고, 적막한 열람실의 한 공간을 빌려서 시를 쓰기도 한다.
어쩌다 그 적막함에 숨이 막힐 때는 약간의 소란이 몽실거리는 도서관 건물 내의 한 카페에 드는데, 언젠간 그곳에서 발견한 어떤 물건 앞에서 나도 모르게 "와" 소리를 내며 반가워한 적이 있다. 그건 나무로 된 유아의자였다. 아주 오랫동안 마주치지 못했던 물건이었다. 주위를 다시금 둘러보았다. 그제야 카페의 소란을 야무지게 메우고 있는 것들 중에는 여기저기에 자리잡은 아이들의 목소리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의식하지 않으면 누구의 것인지 의식되지 않고 부러 의식할 필요도 없는 정도의 목소리였다. 다들 편안하고 여유 있어 보였고, 나도 그 분위기에 스르르 기댔다. 순간, 이게 자유고 평화고 평등이다 싶었다.
딸들 어릴 때가 생각났다. 10여년 전쯤. 외식을 하러 가거나 간식을 사 먹으러 갈 때, 혹은 기분전환을 하기 위한 공간을 찾으며 이동할 때, 딸들과 내가 갈 수 있는 장소와 갈 수 없는 장소를 따져본 기억은 없다. 아이들이 있기에 더 편안한 장소, 혹은 더 끌리는 장소를 물색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카페에 있는 어린이들과 그 가족의 경우는 어떨까. 어린이가 문전박대 당하지 않을 곳을 찾고 또 찾아서 온 곳이 이곳 아니었을까. '노키즈존'이 대세가 되고, 세련되고 힙한 공간이 되며, 어른의 고요와 자유와 평화를 상징하는 코드가 되어가는 세상에서, 어린이들은 자신들에게 예스를 보내는 몇 안 되는 좁은 장소를 찾아 숨어들듯 종종걸음을 해야만 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니까.
전쟁을 경험한 세대뿐 아니라 대부분의 기성세대는 문명의 발전과 생활의 편의와 사상의 자유와 매체의 진보를 들며 세상이 좋아졌다고들 입을 모아 말한다. 그런데 어째서 어린이들을 위한 문명은 이렇게도 무참히 퇴보해버렸을까. 어째서 이들의 머릿속에서는 어린이들의 삶과 또 그들을 돌보는 양육자의 삶이 상상 바깥의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을까. 어린이가 이 나라의 미래라 치켜세우고 마이너스 '출산율'(출생률) 운운하며 여자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을 국가의 중차대한 위기상황으로 꼽으면서, 그와 동시에 어린이들이 머물 장소를 제한하고 어린이들을 잠재적 문제 존재로 치부하는 이 황당하기 그지없는 모순적 태도를 차별이 아닌 다른 어떤 단어로 불러야 할지 알 수 없다.
차별하는 다수자에게 태도는 단지 태도일 뿐이지만 차별받는 소수자에게 그 태도는 삶에 대한 제한이자 억압이 된다. 어린이와 양육자의 삶의 동선은 어린이와 양육자라는 이유만으로 위축되고 제한받는다. 타자의 삶에 대한 예의를 갖추지 못한 그런 비문명적인 태도를 가진 이들의 숫자가 많고 이들의 목소리가 큰 사회라서다.
이런 사회, 너무 부끄럽지 않은가. 늦지 않게 사회가 나서서 이 부끄러움을 고백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그 고백을 도울 것이라 믿는다. 그리하여 먹고 마시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라면 어디나 유아의자가 갖춰져 있게 되는 날이, 모두의 삶이 존중받는 그런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