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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궁정동 총격사건과 관련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그의 부하들이 군사법정에 섰다.
▲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궁정동 총격사건과 관련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그의 부하들이 군사법정에 섰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궁정동 총격사건과 관련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그의 부하들이 군사법정에 섰다.
ⓒ 보도사진연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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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세웅은 10.26 거사로 독재자가 사망한 후에도 50여 일이 지난 12월 8일 출소했다.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면서 석방된 것이다. 한강성당 신자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시국은 혼미상태로 흘러가고 있었다. 독재자가 사라진 자리에 그의 충직한 하나회 출신 정치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전두환 중심의 12.12 군부반란으로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서울의 봄'을 바라는 국민의 염원과는 달리 또 다른 폭압통치를 예비하고 있었다.

그는 정의구현사제단과 민주회복국민회의 활동 그리고 투옥과 재수감의 과정에서 절대권력자 박정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가 자신이 활동하는 민주화의 최종 대척점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1974년 1월과 4월의 긴급조치의 발동을 보고 비로소 유신헌법이라는 것이 얼마나 가공할 발상과 허위에 기초한 것이며 그 체제의 폭력성이 얼마만큼 반인간적인 것인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주석 6)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채택한 이래 줄곧 유지되어 온 민주공화제의 헌법가치가 유신헌법에서 송두리째 사라지고 1인 독재의 신정국가 체제로 변질되었다. 이에 저항하여 수많은 학생ㆍ민주인사들이 암살ㆍ투옥ㆍ퇴학ㆍ퇴직 등 고초를 겪고 '전국토의 감옥화', '전 국민의 수인화(囚人化)'라는 속어가 유행될만큼 폭정이 자행되었다.

절대독재자의 숨통을 끊고 유신체제의 심장을 멈추게 한 데는 학생ㆍ민주인사들의 저항에 힘받은 바 적지 않았지만, 그 결행자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었다. 함세웅은 이 부문에 역사적인 포인트를 맞췄다. 

당시 박정희는 심리적으로 대단히 불안정한 상태였다. 부마항쟁을 보고받고 "이제부터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쏘라고 발포멍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말기에는 최인규와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했으니까 총살됐지, 대통령인 내가 발포명령을 하는데 누가 날 총살하겠느냐."라 하고,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이나 희생시켰는데, 우리는 100만, 200만 명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가 문제냐."라고 토설하였다. 10.26이 아니었으면 부산이나 또 다른 지역에서 항쟁이 일어났을 경우 어떤 사태가 전개되었을 지는 상상하고도 남는다. 

함세웅은 석방되면서 '김재규'라는, 아무도 지려고 하지 않은 또 하나의 무거운 역사의 짐을 짊어지고 나왔다. 

김재규는 1979년 10월 당시 중앙정보부장 신분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집권에 쐐기를 박은 당사자이다. 함 신부는 감옥에 있다가 10.26이 나면서 석방되고 이돈명 변호사의 요청을 받고 김재규 구명운동에 가세했다. 이 변호사와 황인철ㆍ강신옥 등 변호인을 통해 김재규의 거사 동기, 장준하와 김재규의 인연, 지학순 주교 납치 때 박정희 대통령과 김수환 추기경의 회동을 주선한 것도 당시 중정 차장이던 김재규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함 신부는 지금도 10.26이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이뤄진 '기적'이라고 고백하면서, 유신의 핵 박정희를 제거한 김재규 행위의 순수성을 확신하고 있다. (주석 7)

과도기에 명실상부하게 권력의 '실세'로 등장한 전두환세력은 보안사 정보처 내에 언론조종반을 설치하고 "단결된 군부의 기반을 주축으로 지속적인 국력신장을 위한 안정세력을 구축함에 있다"는 명분을 내걸고 이른바 'K-공작계획'을 추진했다. 이 계획은 바로 정권을 탈취하려는 치밀한 음모로서 5.17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한 것이다. 

12.12의 핵심인 전두환은 박정희 암살사건을 수사한다는 명분으로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을 군통수권자의 허락없이 체포하여 하극상의 반란을 주도했고, 또 다른 핵심인 노태우는 전방부대를 군통수권자의 재가도 없이 수도로 빼돌려 하극상에 동원하는 반란행동을 주도했다. 한국사회는 다시 나락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주석
6> <정의구현운동의 시대적 배경」,『암흑 속의 횃불(1)>, 6쪽.
7> 이인우, 앞의 글.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정의의 구도자 함세웅 신부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함세웅, #함세웅신부, #정의의구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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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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