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국내 2위 게임업체 넷마블게임즈에서 그래픽 담당자와 개발자가 돌연사하는 일이 있었다. 엔씨소프트에서도 개발자가 투신해 숨졌다. 당시 게임업계에서는 과도한 업무 강도가 사망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얘기가 파다했다.
'크런치모드(Crunch Mode)'라는 용어가 있다. 주로 소프트웨어 업계에서 쓰는 것인데, 데드라인(마감)을 맞추기 위해 야근과 특근을 반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크런치모드에 돌입하면 2박3일 또는 3박4일 동안 회사에 머물며 밤새도록 게임을 만들거나, 평균 9시에 출근해 새벽 1시에 퇴근하는 휴가도 없는 생활을 계속해야 했다고 노동자들은 증언했다.
구로동 사옥에 불이 꺼지지 않아 '구로의 등대' '오징어잡이 배' 등으로 불렸던 게임회사들은 노동자들이 죽고 나서야 변화를 약속했다. 야근과 주말 근무 금지와 퇴근 후 메신저 업무지시 금지 등의 내용을 담은 '일하는 문화 개선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 후 게임회사들은 달라졌을까?
그들에게 노동자는 인간이 아닌가
정작 게임회사의 일하는 문화가 조금이라도 달라진 건 2018년에 근로기준법이 개정되어 1주 최대 근로시간이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단축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크런치모드가 사라지기 시작했고 일하는 문화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아무리 사람이 망각의 동물이라지만, 주52시간이 시행된 지 채 5년도 지나지 않았다. 이제야 겨우 문화가 바뀌어가고 있는데 재계는 또다시 노동시간을 늘려야 한다는 철지난 타령을 하고 있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지난 11일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도, 신임 노동부장관을 만난 자리에서도 "정보통신산업의 급속한 변화 속에서 1일 근로를 8시간, 주당 연장근로를 12시간으로 제한하는 현행 근로시간제도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아 개선이 필요하다"고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이상하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노동자의 노동시간은 줄어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힘들거나 어려운 일은 로봇과 AI가 하고, 인간은 여가를 즐기며 편안해진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그런데 손경식 회장이 말한 대로 IT와 소프트웨어 등 정보통신산업이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는데 왜 노동자들은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하는 것인가. 그들에게 노동자는 인간이 아닌가.
노동자에게 선택권이 과연 있을까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재계는 새 정부에 노동시간 유연화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선택적 근로시간제 정산 기간 확대, 연구개발 및 고소득 전문직 근로시간 예외 인정, 연장근로 단위 확대 등이 그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시절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마음껏 쉬는 게 낫다는 발언 이후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당선된 이후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인수위에서 근로시간 제도에 대한 노사선택권 확대를 강조하며 ▲선택적 근로시간제의 정산기간 확대 ▲연장 근로시간 총량관리 ▲스타트업 및 전문직의 근로시간 규제완화 등 사용자단체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해 국정과제로 발표했다.
노조조직률이 12%에 불과한 우리나라 현실에서 노동시간에 대한 통제권은 실상 사용자에게 있다. 사용자단체가 선택적 근로시간제 확대를 주장하는 이유도 1일, 1주 노동시간 제한이 없는 이 제도의 허점을 활용해 노동자들에게 집중적인 장시간노동을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선택적 근로시간제는 일하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배분해 일·생활 균형이 가능하도록 하고, 출산과 육아 등으로 인한 경력단절과 숙련인력의 이직을 방지하기 위해 도입됐다. 애당초 이 제도는 노동시간을 늘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제도의 도입취지는 무색해지고 사용자들이 노동자들에게 장시간 노동을 강요할 수 있는 제도로 활용되고 있다.
올해 초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한 <게임산업종사자노동환경실태조사>에 따르면 유연근무제 도입 등 유연성 확대에 대해 사측은 56%가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사측은 주52시간제 도입 후 신작 출시가 늦어졌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력 충원을 하려니 개발자 몸값이 올라 비용이 많이 든다고 답했다. 기존 인력을 더 오래 더 싸게 활용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 달라는 요구가 뒤따랐다.
반면 노동자들은 유연성 확대에 대해 11%만 긍정적으로 답했다. 90%에 가까운 노동자들이 반대한 것이다. 신작 출시 지연은 신규인력 채용과 업무 프로세스 개선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답했다. 공짜노동 수단으로 악용되는 포괄임금제도 폐지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사례에서만 보아도 선택근로제 등 노동유연화 정책이 누구에게 유리한 제도인지 확실해진다. 겉으로는 노동자들에게 선택권을 주는 듯 보이지만, 노동자들을 장시간 노동으로 내몰고 노동자들의 일·생활 균형을 파괴하며, 건강을 해치는 것이 이 제도의 실상인 것이다.
70년 전 낡고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이 선진화?
앞서 언급한 토론회에서 손경식 회장은 "우리 노동법 제도는 70년 전의 낡고 경직된 체제를 유지하고 있어 이로 인해 경제발전의 혁신동력이 약화되고 일자리 창출에도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우리나라가 산업구조를 고도화하고 선진형 경제체제로 가기 위해서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고 노동법제도를 선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대의 변화에 맞게 법과 제도가 변화해야 한다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변화의 방향은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하고 불평등과 양극화를 해소하는 것이어야 한다. 변화를 얘기하면서 장시간노동 체제로의 회귀, 일생활균형이 아닌 일중독사회로 나아가자는 손 회장의 말은 변화가 아니라 후퇴다. 선진화가 아니라 명백한 후진화다.
수 백년이 흘러도 바뀌지 않은 것이 있다. 인간은 적당히 일하고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게임회사의 노동자들처럼 크런치모드로 계속 일할 수 없다. 젊은 시절 당분간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결국 건강을 해친다. 그러다 죽기도 한다. 노동계가 노동시간 유연화에 대해 반대하는 이유다. 일하다 죽지 않기 위해서!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한국노총 대변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