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출산 해 1년 동안의 육아휴직을 마치고 곧 복직을 앞둔 아는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언니 육아만 하는 것도 이렇게나 힘든데 어떻게 일하면서 아이도 봐? 언니는 어떻게 해? 몸무게와 체력은 돌아오지 않았는데 일만 돌아왔어. 나는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 막막하고 두려워. 8년 경력이 1년 휴직 앞에 다 무너진 것 같아."
워킹맘 선배인 나는 동생의 걱정 앞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몇 분의 통화와 한 끼의 몸보신과 몇 마디 응원의 말로는 다 안 될 것 같아서 긴 편지를 적어보기로 했다. 다 쓰고 보니 받는 사람의 이름에 아는 동생의 이름과 함께 세상 모든 워킹맘이 될 엄마들의 이름을 적고 싶어졌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의 이름으로 이 편지를 부쳐본다.
워킹맘이 된, 워킹맘이 될 너에게
어린 아이를 두고 복직할 생각에 걱정이 많지? 맞아. 이제 너는 엄마가 되어 생활도 삶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됐는데, 회사는 예전처럼 돌아와 일하라고 하잖아. 아이는 너무 어리고 그렇다고 일을 안 할 수도 없고, 반가우면서도 불안할 거야. 너의 성장과 아이의 성장 중에 뭘 우선시 해야 할지. 네 몸은 하나인데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랄 일과 육아를 병행해야 하는 삶이 낯설고 어려울 거야.
자, 우선 옷장 속 슬랙스와 재킷을 꺼내 걸쳐보자. 들어가는지, 단추만 옮겨 달면 될지, 아니면 아예 새로 사야 하는지 생각해 보자. 설령 어딘가 끼어서 안 들어간다 해도 슬퍼하지 말고 절대 버리지 마. 몇 달이 지나면 다시 입게 될 거야. 단기 속성 다이어트의 끝판왕은 퇴근 없는 삶이거든.
네가 회사에 출근한 이후부터는 일도 끝냈고 분명 퇴근도 했는데 또 출근한 것 같은 느낌이 자꾸만 들 거야. 워킹맘들의 진정한 퇴근은 '육퇴'인데 이게 야근에 특근까지 언제 끝날지 모르거든. 한다 해도 퇴근하자마자 또 출근해야 하는, 눕자마자 알람이 울리는 경험을 반복해야 하거든. 회사와 집. 출근해야 할 곳이 두 곳이니까. 회사에서 일하고 집에서도 일하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닌 종일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잠만 자보는 게 될 거야.
미안. 시작부터 용기와 격려를 해주지 못해서. 하지만 큰 기대를 하지 않으면 큰 실망도 없을 거야. 난 너에게 '잘할 거야' 대신, '못할 테니 다 하려고 하지 말라'고 더 많이 얘기해 줄 거야. 네가 낙심하지 않고 결심하길 바라. 예전과 다를 거라는 결심. 그걸 받아들일 결심. 그 결심이 너와 고된 삶 사이의 완충이 될 거야.
아이를 낳고 찾아온 내 우울의 원인은 산후통과 세상과의 단절 때문이었어. 출산 후 망가져 버린 몸으로 돌봄을 받아야 하는데 돌봄을 하기만 해야 했지. 아이를 낳고 엄마가 아니라 할머니가 된 것 같았어. 너무 아파서 아파하기만 했어. 하루라도 빨리 건강해질 방법을 찾는 시도와 생각조차 못 했지. 그게 제일 후회돼.
너는 무조건 너의 체력을 위해 돈을 아끼지 말고 투자해야 해. 각종 영양제와 건강기능식품을 넉넉히 주문해. 아이 비타민 젤리 주문하면서 네 종합비타민도 같이. 홍삼 주문하면서 1+1으로. 각종 밀키트와 맥주도 비상식량처럼 구비해 놓고. 시간을 쪼개서 운동도 꼭 하고. 왜냐면 넌 이제 생애 엄청난 노동을 해내야 하거든.
이 노동은 네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해온 각종 아르바이트와 직장 생활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야. 각오해야 해. 여기서 각오는 아까 말했듯이 '다 잘 해내야지'가 절대 아니라 '다 잘하려고 하지 말아야지'라는 각오야. 세상 거의 모든 워킹맘은 가사와 육아, 일까지 그 어느 때보다 가장 많은 일을 해내고 있는데, 항상 아이에게 미안하고 매번 직장에서도 죄송하거든.
중요한 건 총합으로 보는 마인드야. 아이를 낳기 전엔 네 일만 잘하면 됐어. 아이를 낳은 후엔 네 일만 할 수 없지. 출근 준비 전에 등원 준비, 퇴근 후엔 육아 출근. 그러니 너의 힘을 나누고 분산시킬 수밖에 없어. 그전엔 일하는데 10을 썼다면, 이젠 일에 5 육아에 5 이렇게 나눗셈해야 하는 거야. 그러니 각자의 기준으로 보면 일도 5가 모자라고 육아도 5가 모자란 게 돼. 둘을 덧셈해서 10. 총합으로 생각해야 해.
설령 일4 육아3 가사1을 해서 2가 부족한 것 같아도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 넌 이미 그 전에 12를 했던 거야. 과거를 존중하고 현재를 받아들여. 나도 그걸 못해서 과거를 그리워하고 현재를 부정하기만 했어. 엄마가 된 내가 제일 힘들었던 건 엄마가 된 나를 받아들이는 일이었어.
우리, 슈퍼우먼이 되지 말자
내 이야기를 더 자세히 해줄게. 나는 일이 중요하고, 일을 안 하면 못 살고, 주부와 엄마로만 살길 원하지 않아서 독박육아를 할 때 우울증이 왔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다시 일을 시작하면 바로 괜찮아질 줄 알았지. 그래서 아이가 10개월 때 취업 준비를 했고 감사하게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됐지. 그런데 최종 합격 전화를 받았을 때 내가 기뻐했던 순간은 5초에 불과했어.
회사에서는 당장 그다음 주부터 바로 출근하길 원했거든. 당장 아이를 어디에 맡겨야 하나, 어린이집에 자리가 있을까, 합격이라는 기쁨 대신 엄마라는 슬픔이 몰려왔지. 날 대견해 하고 축배를 들어야 할 시간에 집 근처 어린이집에 전화를 돌리고 남편과 상의를 해야 했어. 물론 아이가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거였지만, 눈물이 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거였지.
출근 후엔 매일 매일이 '멘붕'의 연속이었어. 아이 어린이집 등원 전쟁 치르고, 출근 전 장보고, 아이 반찬 만들어 놓고, 저녁에 먹을 국 끓여놓고, 빨래와 청소 집안일을 하고, 시간에 쫓겨 내 일 준비는 제대로 못 하고, 옷만 바꿔 입고 운전대를 잡았지.
퇴근 후엔 아이를 꼭 껴안아 주고, 저녁을 먹고, 잠깐 놀아준 후 목욕시키고, 재우고, 밤 10시 '육퇴'를 하고 나면 해야 할 일들이 또 남아 있었어. 뜨거운 물 샤워를 하고 머리카락에 물이 똑똑 떨어지는 채로 깜깜한 식탁에 앉아 챙기고 주문하고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을 적어가며 깜빡깜빡 졸았지.
온종일 정신없고 피곤하고 졸리고. 시계를 얼마나 자주 들여다봐야 하는지. 가만히 앉아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도 책장을 넘기며 글을 읽는 것도 사치더라. 시간도 없고 체력도 없는데 시간과 체력이 제일 많이 드는 때였지. 출산 전 일만 했었고, 아이를 낳은 후 육아만 하다가, 이제 그 둘을 똑같이 갑자기 한꺼번에 다 잘 하려고 하니 붕괴되는 건 멘탈만이 아니었어.
일할 때는 어땠냐면 10년 넘게 아나운서로 일하면서 뉴스 진행은 내가 제일 잘 하는 일이었는데 자꾸만 오독을 하는 거야. 스튜디오에 앉아 녹화를 하고 있으면 손가락이 점점 붓고 어깨와 허리 통증이 심해지더라고. 내 경력과 실력으로 뽑힌 자리인데 실수를 반복하니 능력이 부족해 보이고 회사에는 면목도 없고, 자책하게 되고. 집에 와서도 너무 힘들고 피곤하니까 아이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고 말이야.
의지로 되는 건 체력과 여건이 받쳐줄 때 가능하더라. 그러니까 너는 힘과 환경을 꼭 만들어야 해. 복직을 앞두고 엄마가 해야 할 우선순위의 준비지. 그런데 처음엔 일도 잘하고 싶고 아이도 잘 보고 싶은 의욕에 슈퍼우먼이 되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거든. 혹시 너도 그런 마음이 올라오거든 이 문장을 읽어봐 내가 한 칼럼에서 보고 밑줄 친 문장이야.
'슈퍼우먼이 돼보려고 돈도 벌고 애도 보다가 평범한 인간임을 깨닫고 결국 사표를 낸다.'
우린 그만두지 말자. 슈퍼우먼 되지 말자. 아이도 일도 나도 소중하니까. 이제 우린 무한한 발전과 성장보다 유지와 지탱이 더 중요한 생의 시기가 됐잖아.
사실 엄마가 평범한 인간이라 사표를 낸다기보다 여성이 돌봄과 일 모두를 떠안아야 하는 구조와 워킹맘에게 더 유연하지 못한 근무환경과 인식, 더 넓은 보육 지원 등 많은 원인이 있지.
우리가 당장 바꿀 수는 없지만 경험한 우리가 말할 수는 있잖아. 엄마의 말은 귀해. 수다부터 토론까지 많이 말하자. 나도 없는 체력을 끌어모아 말하고 쓸 거야. 내가 아끼는 동생이, 직장 후배가, 수많은 워킹맘들이 더 수월하게 일하고 아이 키울 수 있길 진심으로 바라거든.
나의 멘붕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던 건 운동을 시작하고, 아이 반찬은 사 먹이고, 피곤하거나 해야 할 일이 많은 날에는 배달 음식 시켜 먹고, 주말에 남편에게 아이 맡기고 혼자 카페에 가서 두세 시간 커피 마시면서 책 보고 글 쓰면서였어. 포기가 괜찮아지게 하더라고.
무질서 뒤엔 질서가, 혼돈 뒤엔 안정이 오더라. 노력과 견딤과 시간이 만들어 낸 거지. 그 과정에서 아주 힘들었지만, 다시 일을 시작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야 합격의 축배를 제대로 들 수 있을 것 같아. 대단하고 자랑스러운 건 슈퍼우먼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라고 생각해. 너와 나, 세상 모든 엄마들이라고 생각해.
멘붕이 올 때마다 네 주변의 선배 워킹맘들에게 전화해. 누구보다 너의 고생과 힘겨움을 이해해주고 짜증과 한탄을 받아 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야. 같은 경험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폭을 넓혀줘. 그것이 육아라면 더 하지. 진짜 지치는 날엔 아이를 누군가와 어딘가에 맡기고 주말에 호캉스를 하자. 거기서 잠만 자는 거야. 격하게 쉬는 거야.
출산 후 우리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의 양은 예전과 달라졌어. 이제는 일 하면 일을 안 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해. 일보다 쉼의 양이 조금 더 많아야 유지가 돼. 쉽지 않겠지만 노력하자.
기억해! 적당한 엄마, 유연한 직장인, 나를 소모하지 않는 내가, 일도 잘 하고 아이도 잘 볼 수 있는 진짜 슈퍼우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