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바다, 서핑, 백사장, 중앙시장, 아바이마을, 오징어순대, 갯배, 닭강정, 카페, 설악산 케이블카...
위의 단어들은 당신이 떠올릴 수 있는 속초다. 요즘 속초는 제주도 못지않은 관광지가 되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많은 이들이 강원도 속초나 고성의 아름다운 바다를 찾고, 그곳의 음식과 문화를 즐긴다. 또 그곳에 사는 지역 사람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일상으로 돌아온다.
속초의 또 다른 모습
그런데 이런 즐거움만이 속초의 모습일까. 우리가 아는 속초에 또 다른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잘 알려지지 않은 속초의 또 다른 모습을 보기로 했다. 그 첫 발이 바로 지난 1월 속초 수협에서 열린 납북 귀환 어부 피해자들의 모임이었다, 이날 속초 수협 강당에는 한국전쟁 이후 북한에 납북됐다가 귀환한 어부들이 모여 국가로부터 받은 고문과 가혹 행위의 진실을 규명하자고 결의했다.
이날 모임에는 속초뿐만 아니라 고성, 주문진 등 동해안에 거주하는 어부 출신 피해자들과 그 유족들이 모였다. 심지어 전남 보성에서 올라온 팔순의 어부도 있었다. 이들은 속초 갯배 선착장에서, 콘도에서, 온천장에서, 케이블카에서, 중앙시장에서, 바닷가 식당에서, 전파상에서, 택시기사로, 기관장으로, 선장으로, 부동산중개사로 일하고 있다. 여전히 속초에서 숨 쉬고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늘 푸르고 평온한 바다를 꿈꾼다. 실제 동해안 바다는 넓은 백사장과 푸른 바다로 모두에게 평온한 바다로 남아 있다. 그러나 정작 평온한 바다는 바다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야 하는 뱃사람들에게는 평온하지 않은 곳이었다. 생존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고 뛰어드는 뱃사람에게 바다는 늘 예상치 못한 시련을 안긴다. 급격하게 변하는 날씨는 뱃사람의 생존을 위협한다. 우리나라에서 바다의 또 다른 어려움을 꼽으라면 바로 '분단'일 것이다.
바다에서는 군사분계선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엄연히 군사분계선이 존재한다. 육지의 철조망과 같이 눈에 보이는 군사분계선은 없지만 엄연히 육지에서 이어진 군사분계선은 실정법상 존재한다. 특히 동해의 경우 38도 36분 45초라는 군사분계선이 바다에 이어진다.
그러나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다. 부표도, 깃발도, 철조망도 없는 바다에 군사분계선 표식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다에서의 생활은 육지 생활보다 더 위험하다.
납치됐다 돌아온 어부 3600여 명
분단 이후 해상에서 벌어진 어선 납치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심각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은 해군의 경비선과 함대를 이용해 남한의 어선을 수시로 납치해 갔다. 해상의 군사분계선이 모호한 바다에서 그물을 건져 올리던 남한의 어선들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납치되어 갔다. 무장한 경비선이 총과 포로 위협하며 어선을 납치해 갔으나 이 과정에서 한국의 해경이나 해군이 대응했다는 기록은 제대로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전쟁 이후 1987년까지 북한에 납치되었다가 돌아온 선박과 선원은 대략 460여 척, 3600여 명이다. 철책이 있는 육상과 달리 경계선이 보이지 않는 바다에서 조업하는 어민들은 대부분 영세한 선박과 장비로 고기를 잡았기 때문에 당시 최신예 장비로 무장한 북한 경비정의 출몰 앞에 속수무책으로 납치되었다. 적게는 한두 척에서, 많게는 하루에 수십 척의 선박이 납치되어 가는 경우도 있었다.
문제는 한국 해경과 해군의 대응이다. 요즘 같으면 한 척이라도 북한에 선박이 납치된다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될 것이다. 안보의 문제, 치안의 문제가 제기될 것이고, 정부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지 못했다는 호된 비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전쟁 후부터 1980년대까지 460여 척이 북한에 납치되었다. 특히 1961년부터 1970년까지 10년 사이에 314척의 선박이 납치되었다.
오히려 어부를 처벌한 정부
납북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자 정부는 이를 시민의 책임으로 돌리려 했다. 목숨을 걸고 바다에 나가 조업하는 어민들을 보호하는 조치가 아니라 '철통 같은 안보'와 '물 샐 틈 없는 경계'로 어업 활동을 제한하는 조치를 시행하고 이를 어기는 시민을 처벌하는 방식이었다. 강도를 막지 못한 경찰이 오히려 피해자에게 왜 강도질을 당했느냐고 따지는 격과 다르지 않았다.
1968년 12월 24일 자 <중앙일보>에 따르면 당시 열린 국무회의에서 '어로저지선을 5마일 남하하기로 결정하고 앞으로는 (월선한) 어부들에게 간첩죄, 이적행위죄 등을 물을 것'이라는 방침을 세웠다, 이와 함께 대검찰청은 같은 해 11월 24일 '어로저지선 부근에서 납북되었다가 귀환 된 후 재 납북된 어부'에 대해서는 최고형인 사형을 구형하라고 일선 검찰에 지시했다.
실제 1968년 이후 납북되었다가 돌아온 많은 선박에 대해 일괄적으로 군사분계선을 월선한 것으로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고, 선원들은 대부분 국가보안법, 반공법, 수산업법 위반 등으로 실형과 집행유예 등을 선고 받고 몇 개월에서 몇 년간 수형생활을 했다.
이들은 북한에서 장기간 억류 기간 온갖 회유와 협박을 받았지만 그 모든 유혹과 협박을 이겨내고 기어이 한국을 택해 내려왔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들을 따뜻하게 환영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중범죄자로 취급해 몇 날 며칠을 불법으로 가두고 고문하며 기어코 '범죄인',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집이 가난해 가정 형편에 도움을 주고자 배에 올랐던 10대 중반의 어린 청소년들이 인생 초반에 일찌감치 국가보안법 위반 전과자가 되어 세상을 등져야 했다.
그들이 이제 50년 세월이 훌쩍 지나 그 억울함을 풀어보려 속초 수협에 모인 것이다. 먼 나라, 먼 과거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도 당신이 속초, 고성, 주문진, 강릉에 가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마주한 누군가가 바로 그 피해자이자 가족일 수 있다. 혹여 택시라도 탔다면 택시기사가 수십 일간 경찰에게 고문받고 살아 나온 사람일 수도 있다,
이제부터 당신이 만날 수도, 만났을지도 모를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