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학(1950년생)씨는 속초에서 전파사를 운영하며 진공스피커를 제작해 판매하고 있다. 그는 1985년 이근안으로부터 고문을 받고도 결국 무죄를 받은 피해자로 알려져 있다.
김씨의 부친은 북청군 속후면 출생으로 한국전쟁 당시 속초로 월남하여 소위 '아바이마을'에 정착했다. 김성학씨는 그런 아버지가 선장으로 일하던 승해호에 함께 승선했다가 납북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섭을 따던 중 무언가에 쏘인 뒤 피부병에 걸려 몇 년간 자리에 몸져누웠다.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가 무서운 전염병에 걸렸다며 집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 무렵 어머니는 넷째를 출산하였는데 모유가 잘 나오지 않아 젖먹이 동생이 굶어죽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할 수 없이 어린 김성학씨는 조개를 캐다 팔아 우유를 구해와 젖먹이 동생을 먹여 키웠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버지에, 출산으로 일을 할 수 없던 어머니와 젖먹이 동생... 그렇게 김씨의 집은 가난했고 힘들었다.
김성학씨는 겨우 중학교까지는 졸업했지만 더 이상 진학은 생각할 수 없었다. '기술이라도 배우자'는 마음으로 서울에 있는 한국TV기술학원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학원비를 모으기 위해 7개월 동안 울릉도에서 미역 채취하는 일을 했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한국TV기술학원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때 배운 전자기술로 김씨는 속초 중앙시장 근처에서 작은 전파사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엔 인근에 작은 사무실을 하나 더 얻어 진공관 스피커도 제작한다. 주문제작 되어 판매될 만큼 인기가 좋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스피커를 통해 아름다운 소리를 내지만, 정작 자신의 고통과 억울함은 소리 낼 수는 없었다.
운명의 오징어배
어린 시절 전기 관련 기술을 배우고 싶어 했던 김성학씨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서울에 올라와 서교동에 작은 방을 얻은 뒤, 종로에 있는 전기 관련 학원에 입학했다. 한 푼이라도 아낄 생각에 전차비도 아까워 늘 학원까지 걸어 다녔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와 학원비를 충당해야 했던 그는 신촌로터리 고개에 있던 국수집에서 일했다. 관을 만드는 곳의 옆집이라 모두가 일을 꺼려했지만 그는 일을 가려 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밤에는 국수집에서 국수 뽑는 일을 하고, 낮에는 학원을 다녔다. 국수집에서 고추장 국물에 자투리 면발을 넣어 끓여 먹으며 어렵게 학원공부를 마쳤다. 졸업 후엔 학원장이 학원에 남아 조교로 일해 달라고 해, 강습 조교로 일을 했다.
학원에서 1년쯤 일하던 어느 날, 속초의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파사를 운영하던 지인이 매각할 사람을 찾고 있으니, 내려와 일을 해보라는 거였다. 서울에 머물며 청계천에서 작은 가게라도 열고 싶었지만 아버지 말씀을 거역할 수 없었다. 속초로 내려와 중앙시장에 있는 '신광전파사'라는 가게를 이어받아 운영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전파사를 인수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자금을 모으기 위해 오징어 배를 타기로 했다. 그 배가 바로 부친이 선장으로 고용되어 일하고 있던 승해호였다. 당시 승해호에서 일하던 선원 대부분은 안면있던 사람들이었다.
"처음 승선할 때 내 나이가 19살이었어요. 빠르지 않은 배로 장비도 별로 없는 목선이었거든요. 배에 해도도 없었어요.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지만 당시 선장 중에 해도를 볼 줄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나중에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승해호가 귀항할 때 강릉 방향으로 들어와서 해안으로 붙어 속초로 올라왔다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월선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죠."
당시는 오징어가 한창일 때라 울릉도 근해에만 나가도 3일정도 조업하면 만선이 되었다고 한다. 납북되던 그날도 오징어를 가득 담아 속초항으로 들어오고 있던 중이었다. 안개가 끼었다 걷혔다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등대 불빛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날씨가 안 좋았다고 한다. 통상 동해안 등대는 각 지역 등대마다 불빛의 깜박임이 달라 그 불빛으로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으나, 납북되던 날은 등대신호가 보일 때까지 정선한 상태에서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개 속에 들려온 북한말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안개 속에서 갑자기 큰 함대 한 척이 나타나 승해호에 바짝 붙었다. 그리고 "어디 배요?"하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부친이 "속초 배입니다"라고 했더니 "따라오세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승해호 선원들은 대한민국 해군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런 의심 없이 따라갔다고 한다. 그렇게 1시간정도 따라갔을까. 승해호보다 두 배가량 큰 배가 나타나더니 서치라이트를 환하게 켜면서 캐러바50 같은 총을 '드르륵' 쏴 댔다고 한다. 고요하던 바다에 요란한 총소리가 나자, 승해호 선원들은 기겁하며 갑판으로 뛰어 나왔다.
함대에서 누군가 줄을 던지며 "앞코에 걸라우"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성학씨는 그 말을 들은 부친이 크게 탄식하는 걸 보았다. '앞코'라는 말이 북한에서 쓰는 용어였기 때문이다.(한국에서는 '모야줄(선박용 로프를 일컫는 말)'이라는 말을 썼다고 한다) 선원들은 모두 일어나 '북한 배에 걸렸다'며 불안해했고, 몇 명 어린 선원들은 물풍줄이라도 띄워서 뛰어내리자고 했지만 선장과 어른들이 만류해 그대로 북한으로 끌려갔다. 김성학씨와 선장 김종인씨는 둘 중 하나는 볼모로 잡힐 수 있으니 부자관계를 숨기기로 했다고 한다.
금강산 휴게소로 끌려가 신분조사를 받을 때 아버지가 말한 대로 자신의 이름을 '김상희'라는 친구 이름으로 둘러 댔다고 한다. 그런데 별생각 없이 어머니 이름은 본명으로 진술했고, 공교롭게 부친도 조사받을 당시 아내 이름을 본명으로 진술해 부자지간임이 들통 나고 말았다. 부친은 한국전쟁 때 남한으로 도망간 전력에 허위진술까지 더해져 조사과정에서 엄청 두들겨 맞았다고 한다. 그렇게 석 달 간 금강산에서 머물다 기차를 타고 이동하여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에서의 하루하루는 똑같은 일과의 반복이었어요. 매일 있는 교육은 전부 사회주의 국가가 잘 산다는 식의 선전용 교육이었어요. 우리는 언제 돌아갈 수 있나 하는 불안한 마음에 미칠 것 같았죠. 선원 중에 누군가 생일이 되면 맥주를 주기도 했는데, 하루는 내가 마시지도 못하는 맥주를 마시고 취해 집에 보내달라고 난동을 부렸다가 다음날부터 진이 다 빠질 때까지 반성문을 쓰고 또 썼어요. 차라리 몇 대 맞는 게 낫지 그 자아비판이라는 것이 사람 혼을 완전히 빼놓더라고요.
그래도 나는 나대로 남한의 노래를 부르고 기타 연주도 하고, 선원들에게 사교춤도 가르쳐 주고 하면서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지냈어요. 나중에 북한 사람이 그런 나더러 '동무(김성학)는 부르주아 사상이 굉장히 농후한 인간'이라는 말까지 하더라고요. 아버지가 제발 조용히 지내라며 달랬지만, 그럴수록 서울에서 속초로 오라고 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만 더 커지더라고요. 철부지 어린 나이였으니까요."
1년 즈음 지난 어느 날 견학을 간다며 선원들을 원산으로 이동시켰다. 원산에 있는 자연사 박물관으로 견학 갔다가 그곳에서 하루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북한사람들로부터 귀환시킨다는 말을 들었다. 원산항에 나가보니 이미 많은 환영인파가 나와 있었고, 각종 오징어, 빵, 내복 등이 승해호에 실려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승해호 선원들은 남한으로 돌아왔다.
북에선 부르주아, 남에선 빨갱이 취급
귀환한다는 사실을 미리 남한에 통보해 주었는지 군사분계선 근처에 다다르자 해군 함선이 나와 있었다. 해군 함정의 인솔로 속초 수협 어판장 쪽으로 입항하였는데 어판장에 있어야 할 배들이 한 척도 보이지 않았고, 기자들과 경찰들만 가득했다고 한다. 배에서 내릴 때는 경찰들이 양쪽으로 도열해 있어 누구와도 접촉할 수 없도록 했으며, 버스에 올라탄 뒤에도 가족들과도 일체의 접촉을 할 수 없었다.
"시청 대회의실에 가보니 미리 책상을 전부 치워놨더라고요. 다음날부터 우리는 수사관들이 호명하는 대로 따라가 조사받기 시작했어요. 조사받은 곳은 시청 앞에 있는 여인숙들이었는데 여인숙 방에 들어가니까 책상 하나가 딱 놓여 있었고, 수사관 한 명이 앉아 있어요. 그리고는 다른 한 놈이 더 들어왔는데, 수사관이 뭐라고 하느냐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백했으니 지령 받은 걸 말하라' 하는 거예요.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고 했더니 '빨갱이'라며 무섭게 구타를 해요.
몇 년 뒤 남영동에서 이근안한테 고문당할 때 속초에서 조사받은 조서에 '빨갱이 물이 농후하게 들었음'이라고 쓰인 걸 보여주더라고요. 북한에서는 부르주아물이 들었다 하여 얻어 터졌는데, 남한에 돌아와서는 빨갱이물이 들었다 하여 맞았으니 어이없는 일 아닙니까."
약 일주일 정도 조사를 받고 난 어느 날, 김성학씨는 차를 타고 어디론가 이동했다고 한다. 그가 내린 곳은 물치 군비행장이었고, 그곳에서 다시 헬기에 옮겨져 서울로 이동했다. 김씨 뿐만 아니라 여러 명의 선원들이 함께 올라갔다고 한다. 미군부대에 들어가자마자 선원들은 각자 1인실 감방으로 들어갔다. 감방을 지키는 간수가 미군이었고, 감방 안에 구금된 사람 중 미군도 드문드문 보였다. 식사 때마다 과일이 나오고, 수갑이나 포승줄 없이 생활했기에 김성학씨는 자신이 그곳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다음날부터 그는 사무실에 불려가 한국 수사관으로부터 북한에서의 생활에 대해 약 일주일가량 조사받았다.
"하루는 이문동 중앙정보부에 갔던 적이 있었어요. 들어가자마자 수사관들이 똑바로 말하라며 주먹으로 구타를 하더라고요. 반항이라도 하면 '너 하나 여기서 죽어도 아무도 몰라'하고 협박하길래, '아, 이렇게 죽나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곳에서 살아나가려면 개처럼 행동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죠. 북한에서 생활한 모든 걸 쓰라고 해서 생각나는 대로 자세히 쓴다고 썼던 것 같아요. 이문동 조사 때 하도 맞아 그 곳에 있는 병원에서 치료도 받았던 기억이 있어요. 용산과 이문동을 합쳐 약 보름 정도 조사받고 속초로 돌아왔는데, 아버지(선장)와 기관장은 구속되었고, 저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선고를 받고 풀려났죠."
죄인 아닌 죄인의 삶
이후 김성학씨의 삶은 평범하지 않았다. 한번은 재판이 끝난 후 강릉 소재의 '새한컬러'에 입사했던 적이 있는데, 퇴근해서 자취방에 돌아오면 늘 누군가 방을 뒤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강릉경찰서 정보과 형사는 회사까지 찾아와, 김성학씨가 북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말하며 수상하면 신고 달라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결국 김성학씨는 직장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북한에 끌려갔다 온 사람에게 일상이라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남시에서 전파사를 하고 있을 때, 안보교육을 받기 위해 경기도 광주교육장에 간 적이 있다고 한다. 그곳에서 같이 납북되었던 엄OO씨를 만났는데 엄씨는 김씨를 보자마자 "성학아, 직장 다니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르겠다"며 꺼이꺼이 울었다고 했다.
"한번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부산에 간 적이 있어요, 용두산 공원 구경을 갔다가 순찰 나온 경찰에게 검문을 당했는데 강원도 사투리를 쓰는 말투가 북한 말씨 같았는지 바로 그 자리에서 저의 신원을 조회하더라고요. 신원조회에서 납북 경력이 나오자 부산경찰서로 끌고 가더니 백 경장이라는 수사관이 나와서 나를 무섭게 두들겨 패더라고요.
'북한에 다녀온 죄인'이라는 생각에 맞으면서도 항의 한번 제대로 못했어요. 그렇게 한참을 때리던 백 경장이 '당장 강릉에 올라가 나에게 연락해라. 안하면 널 간첩으로 알겠다'해서 그 길로 강릉으로 돌아와 벌벌 떨며 백 경장에게 전화했던 기억이 있어요."
납북되었다 겨우 살아 돌아오니 정말 개 같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북한 다녀온 과거도 없애주고 돈도 벌게 해주겠다는 감언이설에 HID(국군정보사령부특임대)에 들어갔었지만, 막상 사회에 나오니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었다.
하남에서 하던 대리점이 번성하여 사업을 확장하고 있을 때인 1985년, 느닷없이 이근안에게 끌려가 고문당한 뒤 '간첩'으로 기소되었다가 다행히도 무죄가 되었다. 그러나 그 고문 이후 다리를 다쳤고, 인생의 동반자였던 아내와도 헤어져야 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갔던 북한인데, '북한에 다녀온 사람'이라는 낙인으로 맘대로 이용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억울한 김성학씨의 인생은 어디서 보상받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