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죽었다. 어쩌면 나 때문에. 언니 올가는 성녀였다. 언제나 부모님께 순종하는 멕시코 가정의 완벽한 딸이었다. 엄마는 그런 올가를 늘 제일 예뻐했다. 나와는 정반대다. 내 이름은 훌리아. 멕시코 이민자 출신 '아마'(엄마)와 '아파'(아빠)의 열여섯 살 된 둘째 딸이다.
언니의 체취를 느끼며 그리워하던 나는 방에서 언니와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을 발견했다. 실크 레이스 티팬티 다섯 장, 섹시한 여성 속옷, 노출 심한 란제리, 게다가 컨티넨탈이라고 적혀 있는 호텔 키까지. 절대로 외박을 하는 법이 없는 언니가, 남자친구도 없는 언니가 도대체 왜 이런 물건을 숨겨두고 있었을까?
훌리아처럼 이민자의 딸인 작가 에리카 산체스의 자전적인 소설 <나는 완벽한 멕시코 딸이 아니야>는 훌리아가 올가의 비밀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하지만 올가의 비밀은 소설을 재미있게 끌어가는 수단일 뿐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다.
훌리아의 자아 찾기와 홀로서기
이 소설은 훌리아의 자아 찾기, 홀로서기에 관한 이야기다. 훌리아는 어릴 때부터 예민하고 삐딱하고 까탈스러운 아이였다. 여자다운 것 따위에는 관심 없다. 친척 어른이건 신부이건 친구이건 성차별, 인종차별을 하며 시시덕거리는 꼴은 못 본다. 아마가 원하는 딸이 되고 싶은 생각도 없다.
훌리아는 문학과 미술을 사랑한다. 훌리아가 최고의 학생이고 진짜 멋진 작가가 될 거라고 격려하는 유일한 사람인 영어선생님의 말처럼, 어서 대학생이 되어 이 동네를 떠나고 작가가 되는 게 꿈이다.
아마와 아파는 이런 훌리아를 이해하지 못한다. 올가의 죽음 이후 아마와의 갈등은 더 심해진다. 죽은 올가와 훌리아를 비교하며 잔소리하고 걸핏하면 외출을 금지한다. 엄마를 사랑하고 엄마도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지만, 엄마 때문에 미칠 것 같고 숨이 막힌다.
훌리아는 아직 어리고 페미니즘으로 무장된 것도 아니어서 이론이나 운동의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고 부모의 품을 벗어날 수도 없지만, 자신에게 요구되는 사회의 전통적 규범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고 나름 저항한다.
훌리아에게 사회가 강요하는 여성성, 정상성을 거부하는 사람들, 차별과 혐오를 더 이상 참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행동하는 여성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구체적인 맥락이나 사회가 부여하는 압력은 다르지만, 훌리아의 처지는 맏딸로서 떠맡아야 하는 짐과 엄마에 대한 애증으로 상징되는 'K-장녀'도 생각나게 한다.
'미국을 위대하게 만든' 이민자들의 현실
이 소설은 이민자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는 훌리아의 시선과 경험으로 이민자 가정의 아픈 현실을 담담하게 묘사한다. 작가는 책 끝에 "목숨을 걸고 이 나라에 온 모든 이민자와 그 자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사람은 바로 당신들이다"라고 썼다.
이민자의 딸로서 트럼프에게 날리는 어퍼컷이자 동족을 향한 연대이자 다양성을 존중하라는 미국에 대한 요구일 것이다. 하지만 '미국을 위대하게 만드는' 이민자들의 현실은 고통스럽기만 하다.
우선 국경을 넘으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원래 미국 텍사스 주는 멕시코 영토로 황무지나 다름없던 곳이다. 서부개척 시대 미국인들이 텍사스에 몰려들었고 전쟁을 일으켜 그 땅을 차지했다. 그렇게 생긴 선은 장벽이 되어 살기 위해 장벽을 넘으려는 사람들의 무덤이자 잔혹한 수용소가 됐다. 설령 죽음을 피한다 해도 납치, 강도, 성폭력 등 수많은 위험 앞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된다.
트럼프의 이민 제한 정책을 비판하던 바이든도 폭증하는 불법 입국 문제에 별 대책이 없고, 이민자의 딸 해리스 부통령도 난민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경제적 지원을 약속하며 "(미국으로) 오지 말라(Don't come)"는 말만 했을 뿐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난민 문제로 골치를 겪고 있다. 한국사회도 반군의 강제 징집을 피해 제주도에 입국한 예멘 난민들을 "테러리스트", "강간범"으로 지칭하는 무슬림 혐오로 몸살을 앓았다.
2018년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가 한국 정부에 포괄적인 인종차별 금지법 제정을 거듭 촉구하고 사회 전반으로 확산하는 인종차별 증오 표현에 대한 대책 수립을 권고할 정도였다. 난민 혐오 여론을 의식한 나머지 지난해 입국한 아프가니스탄인들을 정부에 대한 기여 여부를 강조해 굳이 난민이 아닌 '특별기여자'로 명명하기도 했다.
훌리아의 아마와 아파도 국경을 넘다 차마 훌리아에게는 말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을 겪었다. 그 일은 아마와 아파에게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기고 훌리아를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하려는 강박적 태도의 한 원인이 됐다.
무사히 국경을 넘는다 해도 '불법' 신분이기에 고향에 갈 수도 없다. 훌리아의 절친 로레나의 아빠는 모두의 만류를 무릅쓰고 할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멕시코로 돌아갔다 오는 길에 브로커에게 돈을 빼앗기고 버려져 나중에 부패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운 좋게 미국에 정착해도 미국에서의 삶은 아메리칸드림과는 거리가 멀다. 아마와 아파는 뼈 빠지게 일하지만 바퀴벌레가 득실거리는 집을 벗어나지 못한다. 훌리아의 아마는 청소일을 한다. 구역질 나는 변기, 고상한 척하는 집주인의 시선, 아픈 허리, 갈라진 손, 세제 때문에 따가운 눈. 훌리아는 아마와 청소일을 함께 갔다 온 날, 아마가 왜 그렇게 항상 기분이 나쁜지 알게 된다.
아파는 온종일 캔디를 포장한다. 늘 칼에 베이고,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붓는다. 야구 방망이로 두들겨 맞은 사람 같은 몰골로 돌아오는 날도 있다. 아파는 집에서 말이 없다. 종일 티브이만 보다 자러 간다. 그는 그냥 거기 있는 사람일 뿐, 훌리아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 아니 훌리아가 보기에는 아파 스스로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 같다.
한국의 '에리카 산체스'를 기대한다
한국에 거주하는 200만 명이 넘는 외국인 주민들의 삶은 어떨까? 한국의 이주민 10명 중 7명이 한국에 인종차별이 존재한다고 답변했다는 2020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결과나 2020년 말 영하 18가 넘는 추위 속에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캄보디아인 여성 이주노동자 고 속헹씨 사건을 보면, 멕시코 이민자보다 낫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한국인들에게 이주민은 그저 값싼 노동력, 잠재적 범죄자, 내 일터를 위협하는 경쟁자일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에리카 산체스 같은 작가가 나타나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여성가족부 조사에 따르면 '다문화 가족' 2세 중 성인 인구는 2021년 3만 7천여 명, 2024년 6만여 명, 2027년 10만 3천여 명, 2030년 16만 1천여 명으로 증가할 것으로 추산된다고 하니 숫자만 본다면 작가가 충분히 나올만하다.
하지만 25세 이상 2세 성인들에 대해서는 통계자료가 없어 파악조차 되지 않고 있고, 8~24세 중 41.9%가 경제활동을 하고 있지만 다수가 저임금 노동하는 현실을 보면 그런 기대를 한다는 것이 염치없다는 생각이 든다.
훌리아는 이렇게 꽉 막힌 상황에서, 완벽한 딸이 돼야 한다는 기대와 편견의 벽을 넘을 수 있을까? 올가는 무엇을 숨기고 있었을까? 아마는 무엇이 그렇게 불안해 훌리아를 가두려 하고, 그림도 즐겨 그리던 아파는 왜 무력하게 삶을 그저 흘려보내고 있을까?
자칫 흔한 소녀의 성장담으로 그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작가는 구조적 차별과 억압에 맞서 싸우고 좌절하다 다시 일어서는 훌리아의 일상과 분투를 '불법' 이민자의 구체적 현실 속에서 끌어냄으로써 보편적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작품으로 만들었다.
올가의 비밀에 대한 답을 찾는 훌리아의 여정에 함께 하는 독자는, 독립하고 싶고 내 삶을 갖고 싶고 숨을 쉬고 싶은 훌리아/소녀들을 응원하는 작가의 따뜻한 공감과 연민에 위로를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