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4월 13일 소위 임관(조선경비사관학교 제3기 졸업)→1948년 1월 1일 중위 진급→1948년 8월 15일 대위 진급→1949년 1월 15일 소령 진급→1949년 7월 15일 중령 진급→1950년 10월 21일 대령 진급→1953년 5월 4일 준장 진급→1955년 1월 17일 소장 진급→1956년 2월 3일 중장 추서.
일제 강점기 일본군 헌병 출신이었지만, 광복 후 국군에 입대해 소위에서 대령까지 1년에 2번 꼴로 진급한 사람. 1956년 1월 30일 부하에게 암살당했고, 대한민국 최초 국군장으로 장례가 치러진 사람. 그리고 대통령에 의해 중장으로 추서된 사람. 바로 이승만 대통령의 오른팔, 김창룡(1920~1956) 이야기다.
1956년 1월 30일, 당시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 소장은 출근 도중 오전 7시 30분경 노상에서 괴한들에게 피살되었다. 김창룡의 나이 37세 때다. 이승만은 김창룡의 피살 소식을 듣자마자 그의 유해가 안치된 적십자병원을 찾아가 유해를 살펴본 뒤, 바로 김창룡을 육군 중장으로 추서했다.
2월 3일 김창룡의 장례는 대한민국 최초 국군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장례일 하루 동안 전 육‧해‧공군 부대가 조기를 게양했고, 장병들에게는 음주가무가 금지되었다.
이승만은 "김 중장은 나라를 위해 순국한 것이며 충령의 공을 세운 것"이라는 비문을 직접 써서 보낸 후, 범인 체포를 독촉하였다. 군은 전국에 비상경계망을 펴고 수사에 착수했으며, 전 군장병에게 휴가 및 외출 금지령을 내렸다.
육군 특무대는 사건 발생 20여 일 만에 과거 특무대에서 김창룡의 부하로 근무했던 허태영 대령을 김창룡 암살사건 배후로, 신초식, 송용고 등을 직접 저격에 가담한 혐의로 검거했다.
김창룡은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 산 30-1번지에 묻혔다. 1997년 유족의 청원에 따라 당시 기무사령관 임재문 준장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묘지 이장 관련 내용을 보고했고, 이후 국립묘지 대전현충원(장군 제1묘역 69호)으로 이장되었다.
김창룡 묘 이장 사실이 알려지자 민주주의민족통일대전충남연합 등 대전지역 단체들이 크게 반발했다. 1998년 시작된 김창룡 묘 이장 촉구 시위는 24년째 이어지고 있다. 올해 현충일에도 대전지역 시민단체들은 어김없이 국립대전현충원 정문 앞에서 김창룡 묘 이장 촉구시위를 벌였다.
김창룡 묘 안장이 논란 되는 이유
김창룡의 대전현충원 안장이 논란 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일제 강점기 그의 친일 행적이고, 두 번째는 군대 복무 시절 백색 테러, 용공조작사건, 민간인 학살 등에 대한 책임이다.
김창룡은 1941년 4월 신징(장춘)에 있는 일본 관동군 헌병교습소에 입소해 교육을 마친 후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했다. 그는 주로 조선과 중국의 항일조직을 정탐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같은 해 10월 중지군(中支軍)의 아마카스(甘粕) 사단 파견헌병대에 배속되었으며, 소만(蘇滿) 국경 부근에 파견되어 중국공산당과 소련에 대한 첩보 활동에 나섰다.
김창룡은 1943년에 싱안베이성(興安北省)을 중심으로 지하공작을 펴던 중국공산당의 거물 왕진리(王近禮)를 검거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고, 관동군 헌병대는 왕진리를 역공작으로 이용해 소만 국경지대에서 활동하던 9개 지하조직을 색출하고 조직원 50여 명을 체포했다.
김창룡은 이 공로로 헌병 오장(伍長)으로 특진했다. 그가 2년 동안 공장지대를 중심으로 암약하면서 항일조직을 적발한 것은 50여 건이 넘었다. 이러한 이유로 김창룡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일제가 패망하자 김창룡은 고향인 함경남도 영흥으로 돌아왔다. 1945년 11월과 1946년 4월 소련 군정에 의해 거듭 전범(戰犯)으로 체포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가까스로 탈출해 월남했다.
월남 직후 김창룡은 국방경비대 사령부 부관으로 있던 박기병 소위를 만났고, 그의 추천으로 국방경비대 제5연대에 사병으로 입대했다. 김창룡은 관동군 헌병 출신이라는 이유로 연대장의 경비사관학교 지원 추천을 받지 못하자, 부대를 이탈해 박기병이 근무하던 제3연대로 찾아갔고 정보하사관으로 재입대했다. 그러던 중 만주군 대위 출신 제3연대장 김백일의 추천으로 1947년 1월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 3기로 입교해 95일간의 단기교육을 마쳤다.
1947년 4월, 소위로 임관한 김창룡은 국방경비대 제1연대 정보장교로 보직돼 장병들의 사상사찰을 담당하며 숙군작업에 나섰다. 과거 관동군 헌병 시절 지하조직을 색출하던 능력을 여순사건 직후 전군 차원으로 강도 높게 진행된 숙군작업에서 발휘하며 숙군의 선봉장이 되었다.
1948년 11월~12월 사이 남로당 군사부 연락책임자 김영식와 군사부 총책 이재복을 검거하고, 오일균 소령과 김종석, 최남근 중령을 검거했다. 당시 정보국 선임과장 박정희 소령도 김창룡의 검거망에 걸려들었지만,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처럼 구제되었다. 백선엽 정보국장, 장도영 김정권, 미군 고문관 하우스만 대위 등의 구명운동 덕이었다. 1949년 11월까지 1년간의 숙군작업으로 장교, 하사관, 사병 등 4749명이 기소되었다.
"김창룡은 김구 암살 지시 배후"
김창룡은 안두희에게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을 지시한 배후로도 꼽히고 있다. 백범 암살범 안두희는 "김창룡 특무대장의 사주를 받아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했다"며 "범행 직후 특무대 영창으로 면회를 온 김창룡으로부터 '안 의사 수고했소'라는 칭찬을 들었다"고 1992년에 자백한 바 있다.
한국전쟁 9.28 서울수복 직후에는 부역 혐의자들을 색출한다는 목적으로 설치된 경인지역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의 본부장이 되어 부역자 처벌을 주도했고, 1950년 10월 21일 대령으로 진급했다. 1951년 5월 25일 합동수사본부가 해체되기 전까지 검거된 부역 혐의자는 1만 4844명에 달했다.
군·검·경 합동수사본부는 많은 사건을 조작해 선량한 사람들을 이 피해를 입었다는 비판을 받아 1951년 5월 해체되었는데, 김창룡은 합동수사본부가 해체되기 열흘 전인 5월 15일에 육군 특무부대장으로 취임했다.
김창룡은 특무부대장으로 있으면서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의 계기가 된 부산 금정산 공비 위장사건, 1953년 국제간첩 정국은(鄭國殷) 사건, 동해안 반란사건, 1955년 국가원수 암살미수사건 등 각종 용공 정치사건을 조작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파를 축출했다.
이 과정에서 김창룡은 1953년 5월 육군 준장으로, 1955년 1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고, 특무부대는 이승만의 친위기구이자 무소불위의 권력 기구가 되었다. 김창룡의 죽음에 이승만 대통령이 왜 그토록 비통해 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김창룡이 암살되기 몇 달 전인 1955년 8월 8일에 '특무부대가'가 제정되었다. 특무부대가는 김창룡이 제기하여 만들어졌고, 가사도 자신이 쓴 메모를 토대로 윤석중이 작사했다.
피 흘려 도로 찾은 자유와 평화 / 골고루 심어주자 금수강산에
나라의 방패 되어 청춘을 바친 / 흰 겨레는 한 겨레 한 목숨이다
지키자 나의 조국 / 슬기로운 맹호부대
정의의 선봉대다 / 우리 육군 특무부대
위와 같은 특무부대가 2절의 가사는 대전현충원 장군 제1묘역 69호의 김창룡 묘비 아래 적혀 있고, 그의 묘를 이장하라는 시위는 매년 지속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미디어마당사회적협동조합 누리집에도 게재되었습니다.